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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특례시의 종합/*김충영의 현미경

[김충영 수원현미경(133)] 김동욱 교수 “수원화성은 나의 시작이자 마침표”-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33)] 김동욱 교수 “수원화성은 나의 시작이자 마침표”-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4.03.04 06:00 화성행궁 복원현장에서 김동욱 교수. (사진=김동욱 교수)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배경에는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노력이 있었는데 이를 진두지휘한 사람은 민선1기 심재덕 수원시장이다. 그에 앞서 심 시장에게 수원화성의 세계문화유산 가치를 이론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김동욱 교수이다. 김 교수는 1974년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입사했다가 우리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퇴사했다. 고려대 대학원에 진학한 후 아직 복원작업이 시작되지도 않은 수원화성에 관심을 갖고 틈틈이 수원화성을 답사하면서 ‘화성..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31)] 수원연화장 건립의 첫 단추는 이상룡 수원시장이 꿰었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31)] 수원연화장 건립의 첫 단추는 이상룡 수원시장이 꿰었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4.02.05 06:00 1920년경 건립한 수원최초 화장장 모습. (사진=수원시) 수원연화장(화장장) 건립 필요성을 제일 먼저 주장하고 부지를 선정한 사람은 이상룡 제20대 관선 수원시장이고, 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이는 민선1기 심재덕 수원시장이다. 제20대 이상룡 전 수원시장. (사진=수원시) 1910년대 후반 수원 최초의 화장장이 세류동 825번지에 건립돼 운영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도 화장을 권장했으나 보편적인 장례문화로 자리잡지 못했다.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과 가난한 사람들의 화장이 차츰 늘어갔다. 1920년 동아일보에 수..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29)] 수원 ‘제야의 종’ 타종행사의 변천 - 김충영 논설위원 겸 중부취재본부장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29)] 수원 ‘제야의 종’ 타종행사의 변천 - 김충영 논설위원 겸 중부취재본부장 / 도시계획학 박사 효원의 종각 모습. 1991년 주조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1993년 10월 14일 최초 타종식을 가졌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제야의 종'은 섣달 그믐날에서 새해로 넘어가는 밤 12시에 타종한다. 원래는 절에서 아침저녁으로 백팔번뇌를 없앤다는 의미로 108번을 타종하던 것이다. 종을 33번 치는 이유는 하늘 세상인 도리천(忉利天, 33천)에 닿겠다는 기원을 담고 있다. 제야의 종은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함이다. 조선시대 타종행사는 1396년부터 시작됐다. 도성의 4대문과 4소문을 열고 닫는 시간에 맞춰 새벽 4시(오경)에 대문을 열 때, 밤10시(이경)에 문을 닫아 통행금지를 알..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28)] 수원화성 박물관앞 선정비(반남박씨 박주수, 박기수)와 금성위 박명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겸 중부취재본부장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28)] 수원화성 박물관앞 선정비(반남박씨 박주수, 박기수)와 금성위 박명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겸 중부취재본부장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12.11 04:30수정 2023.12.16 12:52 ​ 수원화성박물관앞 수원유수 선정비. 2008년 화성박물관을 건립하면서 노송지대에 있던 선정비 10기를 옮겨 세웠다. (사진=김충영 필자) 조선시대 고을 입구에는 재임시절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수령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선정비(송덕비, 공덕비, 불망비로도 표현)를 세웠다. 수원에는 주로 팔달문과 장안문 밖에 세웠는데 1950년 6.25를 겪으면서 훼손된 것을 노송지대로 옮겨 놓았다. 이후 수원박물관과 수원화성박물관을 건립하면서 구읍시절의 수원부 관련 ..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28)] 수원화성 박물관앞 선정비(박주수, 박기수)와 금성위 박명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겸 중부취재본부장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28)] 수원화성 박물관앞 선정비(박주수, 박기수)와 금성위 박명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겸 중부취재본부장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12.11 04:30수정 2023.12.11 10:36 ​ 수원화성박물관앞 수원유수 선정비. 2008년 화성박물관을 건립하면서 노송지대에 있던 선정비 10기를 옮겨 세웠다. (사진=김충영 필자) ​ 조선시대 고을 입구에는 재임시절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수령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선정비(송덕비, 공덕비, 불망비로도 표현)를 세웠다. 수원에는 주로 팔달문과 장안문 밖에 세웠는데 1950년 6.25를 겪으면서 훼손된 것을 노송지대로 옮겨 놓았다. ​ 이후 수원박물관과 수원화성박물관을 건립하면서 구읍시절의 수원부 관련 공.. 더보기
[기획특집] 올해는 화성(華城)명칭 사용 230주년이 되는 해-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획특집] 올해는 화성(華城)명칭 사용 230주년이 되는 해-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7.17 06:00수정 2023.07.17 14:54 ​ ​ 뎡리의궤 화성전도. (자료=수원시) 올해는 수원을 화성(華城)으로 이름을 바꾼 지 230주년이 되는 해다. 중국의 요(堯)임금이 화(華)지방을 순찰할 때 화(華)의 봉인(封人)이 장수(壽), 부귀(富貴), 다남자(多男子)의 세가지를 축원(祝願)한 뜻을 기려 '화성(華城)'이라고 고을 명을 지었다. 화(華)의 지방 봉인(封人)의 축원대로 정조는 조선을 요(堯)임금시대와 같은 태평성대를 이루고자 하는 바램을 수원 화성에서 이루고자 함이었음이라. 수원을 화성(華城)으로 이름을 바꾼 역사를 되짚어본다. ‘화성(華..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15)] 수원 민자역사는 현대백화점이 될 뻔했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15)] 수원 민자역사는 현대백화점이 될 뻔했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7.10 05:50 수정 2023.07.10 06:16 ​ 1920년대 엽서에 담긴 수원 명소 사진. 1928년 8월 27일 완공된 한옥 수원역사로, 한국전쟁 당시 파괴됐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수원역은 1905년 1월 1일 경부선 개통과 함께 문을 열었다. 경부선은 국가 간선철도로 여객과 화물 물동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자 역사(驛舍)의 필요성이 대두 됐다. 1927년 6월 1만원의 예산으로 역사 설계에 착수, 1928년 8월 27일 낙성식에 이어 9월 1일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 수원역사는 일제 강점기임에도 수원의 역사성을 고려해 한옥형식으로 건축됐..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14)] 수원 행궁동내 ‘매향동’ 마을만들기 사업 발동 걸렸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14)] 수원 행궁동내 ‘매향동’ 마을만들기 사업 발동 걸렸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6.26 05:35수정 2023.06.26 05:41 ​ 매향동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 화합행사(매향사모)모습. 지난 15일 방방카페에서 30여명이 모여 화합의 행사를 갖고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은 2007년 8월 6일 수원 화성 내 3개 행정동(팔달동, 남향동, 신안동)을 행궁동으로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궁동은 1789년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의 최대 길지인 수원 화산(구 읍치)으로 이장할 때 신읍을 팔달산 자락에 건설하면서 조성된 마을이다. 행궁동은 그동안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으로 인해 많..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13)] 원래는 지지대고개~ 팔달산 서쪽으로 계획했던 경부철도-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13)] 원래는 지지대고개~ 팔달산 서쪽으로 계획했던 경부철도-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6.12 09:53 ​ 1914년 수원시 기본지도. 의왕 고천~지지대고개~팔달산 서쪽을 경유하는 노선이 오늘날의 노선으로 변경된 지도. (자료=수원시) 경부철도 건설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첫 단계 사업으로 추진됐다. ​ 1894년 봄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기화로 8000여 명의 대군을 한반도에 출동시킨 일본은 7월 23일 경복궁을 불시에 점령하고 이어서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같은 도발행위를 정당화하고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1894년 7월 30일에는 경인, 경부철도 부설권 및 전신관련 권리와 목포항 개항 등을 요구했다. ..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10)] 수원은 ‘생태교통수원 2013’으로 관광도시가 됐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10)] 수원은 ‘생태교통수원 2013’으로 관광도시가 됐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5.01 05:45 ‘생태교통수원 2013’ 화서문로 거리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생태교통수원 2013’은 수원시가 당면한 환경, 교통, 도시재생, 거버넌스 정책 등의 다양한 분야와의 융복합 실현을 통해 당면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향해 큰 걸음을 내딛는 정책전환의 사업이었다. ​ 첫째, ‘생태교통수원 2013’은 기후 변화에 대응한 환경정책이었다. 기후변화와 지구환경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지구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에 수원시가 가장 먼저 실천에 옮긴 행사였다. ​ 둘째, ‘생태교통수원 2013’은 선진 미래교통을 실험한 교통..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09)] ‘생태교통 수원 2013’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행사였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09)] ‘생태교통 수원 2013’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행사였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4.17 05:30 ​ ‘생태교통수원 2013' 개막식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생태교통 2013’의 첫 번째 목적은 석유고갈 시대를 대비, 1개월간 차 없는 삶을 살아보자는 행사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낙후된 구도심을 되살려야 한다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수원화성은 전 회에서 밝힌 바와 같이 227년간 누대에 걸쳐 만들어진 세계문화유산이다. ​ 1997년 12월 6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됨으로써 수원화성은 중앙의 기관은 물론 경기도나 수원시민 모두 수원화성의 복원정비에 대해 필요성을 공감했다. 암묵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2013년..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08)] ‘세계문화유산 화성’ 오늘이 있기까지 이야기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08)] ‘세계문화유산 화성’ 오늘이 있기까지 이야기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4.03 04:20 ​ 2022년 6월의 화성과 주변 항공사진.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수원화성은 227년 동안 흥망성쇠(興亡盛衰)의 과정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수원화성은 여러 시기를 담당한 지도자들과 실무진들의 노력으로 오늘의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명예를 지키고 있다. ​ 지도자별 역할을 살펴보자. ​ 먼저 정조대왕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조선의 최고 명당인 수원 구읍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팔달산 자락에 신읍을 건설했다. 4년이 지난 1793년 (정조17) 1월 12일 수원을 화성으로 개명하고, 유수부로 승격시켜 수원..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07)] 아쉽다! 심재덕 시장의 이루지 못한 꿈-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07)] 아쉽다! 심재덕 시장의 이루지 못한 꿈-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3.20 01:10 ​ 세계적 야외공연장 조감도. 창룡문과 연무대 앞을 하나의 광장 겸 공원으로 계획한 조감도. (자료=수원시 화성주변 정비계획보고서) 1997년 12월 6일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 25년이 지났다. 그동안 수원시는 혼신의 노력을 다해 오늘의 수원화성을 만들었다. 그 결과 요즘 수원화성의 주말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관광객이 찾아온다. ​ 필자는 매일 아침 매탄3동에서 경수산업도로를 통해 수원화성 내 매향동 작업실로 출퇴근을 한다. 지난 토요일 오후 2시쯤 동수원고가 차도~못골사거리~창룡문 사거리를 통해 성 안으로..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06)] 숙지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06)] 숙지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3.06 05:50 2022년 6월 숙지공원 항공사진. 숙지산을 공원으로 지정해서 임야가 대부분이다. 2003년과 2009년 농지에 축구장과 다목적체육관, 야외공연장, 산책로, 휴게시설, 주차장이 조성됐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1967년 7월 3일 수립한 수원도시계획에서 숙지산 일원 27만3669㎡가 숙지공원으로 지정됐다. 숙지산(熟知山)은 수원화성 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789년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을 길지인 수원부의 화산으로 옮기기 위해 구읍을 오늘날의 수원으로 이전했다. 이후 정조는 신하들의 건의로 화성축성을 추진하게 된다. 화성축성에 대한 논의가 한창 진행되던..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05)] 여기산 · 서호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05)] 여기산 · 서호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2.20 05:20 여기산 · 서호 공원 항공사진(2022년 6월). 여기산과 서호 농촌진흥청 시험답, 왼쪽에 농촌진흥청 건물과 도로변에 농업박물관 건립이 완료된 모습이 보인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1967년 7월 3일 52만㎡ 여기산이 공원으로 지정됐다. 여기산은 해발 104.8m의 산으로 산 정상부에 453m의 테뫼식 산성이 있다. 1979~1984년 발굴된 토기 및 철촉, 방추차, 온돌 구조 및 집 자리는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및 초기 철기시대의 생활유적지로 확인됐다. 여기산은 화성축성 당시 팔달산과 숙지산, 앵봉과 함께 성돌을 채취한 채석장이었..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04)] 만석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04)] 만석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2.06 06:00 ​ 만석공원 조성계획도. 광장, 다목적운동장, 축구장, 테니스장, 게이트볼장, 배드민턴장, 족구장, X-게임장, 주차장, 화장실, 정자, 영화정, 어린이도서관, 미술관, 야외음악당, 청솔노인복지관, 기념비, 생태학습장, 수변데크 등이 조성됐다. (자료=수원시) ‘만석공원’은 1795년 5월 18일 완성된 ‘만석거’에서 유래했다. 1794년(정조18)11월 1일 정조는 흉년으로 곤궁한 백성을 염려해 해동기까지 성역 중지를 선언하고 화성 인근에 저수지와 농지개간을 지시했다. “그렇게 하면 10년 후에는 수확이 만 섬(萬石)에 달할 것이니 이것은 ’만 명‘이 넉넉히 ..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03)] 인계 제3호, 청소년문화 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03)] 인계 제3호, 청소년문화 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1.23 04:55 ​ 인계제3호, 청소년문화공원 조성계획도. 중앙부분이 청소년문화회관, 아래 원형은 다목적 광장, 상단 왼쪽부분은 56년 동안 조성되지 못한 숲, 오른쪽 역시 미조성 됐으나 사각부분을 공원을 축소하고 매화초등학교를 지었다. (자료=수원시) ‘인계 제3호 공원’은 수원의 중심에서 동남쪽에 자리 잡은 인계리에 위치했다. 솔숲과 전답, 딸기 밭, 화분공장과 1956년에 자리 잡은 수원송신소 진입로가 지나가는 농촌마을이었다. 1967년 7월 3일 정부수립 후 우리 손으로 수립한 최초의 도시계획에서 인계동 300번지 일원 32만1200㎡가 공원으로 지..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02)] 효원공원을 조성한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02)] 효원공원을 조성한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1.09 05:10수정 2023.01.09 09:22 ​ 효원공원입구 상징조형물. 서북공심돈을 형상화했다. 공원명은 소형 양근웅선생이 썼다. (사진=김충영 필자) 1967년 7월 3일 수립한 도시계획에서 3만9500㎡가 ‘인계 제2호 공원’으로 결정됐다. 이후 공원부지는 1980년에 수립한 ‘수원도시장기종합개발계획’구상(안)에서 중심상업지역으로 계획됐다. 이어 추진된 20년 단위의 ‘2001년 수원시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건설부(국토교통부 전신)는 중심사업지역이 수원시의 여건에 비해 너무 넓다고 축소를 주문했다. 당시 최영길 도시과장은 건설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101)] 수원 올림픽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01)] 수원 올림픽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입력 2022.12.26 05:40 ​ 올림픽공원비. 서예가 이수덕씨의 글을 자연석에 새겨 1988년 세웠다. (사진=김충영 필자) 일제강점기인 1944년 수원최초의 도시계획에서 북공원, 동공원, 팔달산공원, 세류공원, 동산동원 등이 지정됐다. ​ 1949년 8월 15일 수원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본격적인 도시개발을 추진해야 했으나 1950년 6.25의 발발로 중단됐다. ​ 이후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물 무렵인 1961년 우리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추진한 도시계획은 행정미숙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1963년 12월 10일 경기도청 수원이전이 확정되자 도청소재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도시계획이 다시 추진됐다. ..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99)] 수원은 ‘효원의 도시’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99)] 수원은 ‘효원의 도시’다-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입력 2022.12.05 05:20 ​ 가칭 화산대효원종합계획 보고서. 제1무임소장관이던 이병희 국회의원이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계획서이다. (자료=수원시) 수원이 ‘효원의 도시’라는 별칭을 사용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효원(孝園)이라는 단어는 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단어이다. 이는 효(孝)와 전원(田園)을 합성한 단어임을 알 수 있다. ​ 수원에서 ‘효원’이라고 표기한 기록은 1973년 ‘수원성곽복원정화계획’이다. 부제를 ‘화산대효원종합계획’ 이라고 적었다. 당시 ‘제1무임소장관 이병희 국회위원’이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결재를 얻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에서 최초로 등장하고 있다. 이 계획서를 작성..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98)] 신도시 화성은 영국 전원도시보다 114년 앞서 건설됐다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98)] 신도시 화성은 영국 전원도시보다 114년 앞서 건설됐다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김충영 논설위원 승인 2022.11.28 06:00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영국의 전원도시 레치워스 시가지 전경. 1903년 런던 북쪽 60km 지점에 건설한 영국 최초의 전원도시 모습이다. (사진=구굴지도) 전원도시(Garden City)의 등장은 1898년 영국의 도시계획가 에버네저 하워드의 학설에서 시작됐다. ​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자 생활환경이 악화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 해결책으로 도시적인 것과 전원적인 것을 융합한 도시만이 이상적인 삶을 영위케 한다고 생각했다. ​ 가든 시티는 정원이 많은 도시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전원 속에 .. 더보기
[김충영 수원현미경(96)] 서수원 개발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96)] 서수원 개발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김충영 논설위원 승인 2022.11.14 05:35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 서수원의 남은 땅은 귀하게 쓰여야 한다 수원시도시개발현황도. (자료=수원시) 1904년 12월 27일 건설된 경부선 철도는 수원을 둘로 나눴다. 서수원은 중심시가지와 분리되면서 불편을 격어야 했다. 여기에 1938년 수원비행장이 들어서면서 비행소음은 물론 비행안전구역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건축행위가 규제돼 발전을 가로막았다. 서수원은 동쪽의 도심에 비해 제약이 많았다. ​ 필자는 1980년대 서수원지역 오목천동에서 10여년을 살았다. 당시 서수원 주민들은 동수원에 버금가는 발전을 갈망했다. 지역의 일꾼이 되겠다고 입후보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