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영 수원현미경(138)] 서호육교를 만든 이야기(송재규 전 수원시의회 의장 편)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4.05.13 06:00수정 2024.05.13 09:20
서호육교 모습. 화서1동 현대아파트옆에서 덕영대로, 경부철도를 횡단해 서호공원으로 통과한다. (사진=필자 김충영)
올해 1월 26일 수원지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스타필드 수원점' 오픈이 있었다. 연일 스타필드에 기록적인 인파로 주민들이 몸살을 알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지난 4월 30일 수원일보 김우영 논설실장에게 산책을 제안했다. 김 실장은 흔쾌히 응했다. 스타필드 방문에 앞서 서호를 찾기로 했다. 팔달구청을 출발해 행궁광장~화령전을 경유, 화서문을 통과해 영복여중을 지나 수성로를 거쳐 스타필드 앞길을 통과해 서호육교를 넘어 서호공원에 들어섰다. 서호육교를 넘으면서 옛 생각이 났다.
송재규 전 수원시의회의장. 제4대~7대까지 4선 시의원에 당선되고, 화서신협 이사장으로 4선에 당선돼 현재까지 봉사하고 있다. (사진=송재규 전 수원시의회의장 제공)
서호육교는 화서1동을 지역구로 하는 송재규 시의원의 집념과 열정이 만들어 낸 걸작이다. 서호육교는 서호의 동쪽 지역에서 서호공원으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는 점에서 화서동, 고등동 주민들에게 주는 혜택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화서동 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민 조철형 씨는 “서호육교가 없었다면 잘 조성된 서호공원은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라며, “서호육교가 있어 매일 서호를 산책할 수 있어 행복한 노후를 살수 있다. 서호육교가 놓이게 됨에 따라 아파트값도 많이 올랐다”고 서호육교를 예찬하기도 했다.
서호육교의 탄생은 심재덕 씨가 수원문화원장으로 취임한 후 비롯됐다. 그는 ‘서호를 수원시민에게 돌려주자’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서호인 축만제(祝萬堤)는 정조가 화성을 건설 후 농업을 장려해 자족도시를 이루기 위해 조성한 수리시설이다. 정조는 화성건설과 병행해 가장 먼저 만석거와 대유둔을 조성했는데 이의 성과는 지대했다. 정조는 이어 현륭원 앞에 만년제를 축조하고 이어 화성유수 서유린에게 화성의 서쪽에 저수지와 둔전(국영농장) 건설을 지시했다. 이렇게 하여 축만제와 서둔이 조성됐다.
수원의 만석거와 만년제, 축만제는 조선을 대표하는 농업용 수리시설이다. 서호는 수원팔경의 하나인 ‘서호낙조’로 유명했고, 일제 때 만든 ‘조선명승실기’에도 조선땅 143곳의 명승지 중 세 번째로 빼어난 경치로 선정되기도 했다.
정조가 농업장려책으로 조성한 농업기반시설인 축만제와 서둔은 대한제국 시기 농사시험소가 수원에 입지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농업학교는 서울농대로 발전하고 농사시험소는 농촌진흥청으로 발전하여 수원은 농업연구도시로 발전했다.
농업용수로 사용되던 축만제와 제방의 노송은 여기산과 더불어 수원시민들의 휴식장소이자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가 되기도 했다.
필자 또한 서호에 대한 추억이 많다. 수원공고 3학년 때인 1973년 10월부터 농촌진흥청 농업기술연구소(현 농업과학기술원)에서 실습을 시작으로 군에 가기 직전인 1976년 7월까지 3년여를 서호와 함께 지냈기에 아련한 추억이 있다.
1967년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은 급격한 인구 증가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도시개발이 가속화되어 서호(축만제) 상류지역에 많은 인구가 거주하게 됨에 따라 서호의 오염은 막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여건상 폐수처리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다.
서호의 관리기관인 농촌진흥청은 시민들의 출입을 통제하면 오염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 서호 주변에 펜스를 둘러치고 시민들의 출입을 막았다. 이로 인해 서호는 시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됨으로써 더욱 오염이 가중됐다.
심재덕 수원문화원장은 1987년 취임 후 수원의 상징인 수원천 살리기와 서호를 수원시민에게 돌려주자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1988년에는 <수원사랑>10월호에 죽음의 호수로 변한 서호를 알리는 글을 게재하여 시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에 힘입어 서둔동 주민들은 농촌진흥청을 상대로 서호개방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나섰음에도 농촌진흥청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후 수원문화원과 서호주변 서둔동과 화서동 주민들은 서호개방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했다.
이때 당시 화서1동 송재규 동정자문위원장도 서호 살리기와 개방운동에 함께 동참했다.
지방의회의 출현은 서호 개방운동의 전환점이 됐다. 화서1동을 지역구로 당선된 송재규 시의원은 1991년 9월 17일 ‘제4대 의회 100회 수원시의회(임시회)’에서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을 잇는 천혜의 경관자원에 대한 보호대책을 질의했다.
“숙지산 중턱에 이렇게 고층아파트가 건축되면서 숙지산이 아파트에 눌렸습니다. 산봉우리보다도 아파트가 더 높게 보이니 숙지산도 답답하고 우리 마음도 답답합니다. 팔달산, 숙지산, 서호, 여기산을 잇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우리가 가꾸고 보호할 시책을 펴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다.
그리고 서호를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고 개방해줄 것을 수원시에 건의했다.
“서호를 수원시민에게 개방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요? 화서택지 개발사업 및 서호를 중심으로 많은 변화가 예상되는데, 그로 인한 서호 오염을 사전에 대비하고 죽어 가는 서호를 범시민운동으로 살려서 수원의 상징인 서호를 시민에게 개방하여 시민의 정서함양과 그 주의를 휴식공간으로 발전시켜 아름다운 수원을 가꾸고 사랑하며 자랑할 수 있도록 건의하는 바입니다”
1993년 서호와 여기산 주변 항공사진. (사진=수원시)
이러한 노력에도 농촌진흥청은 꿈쩍도 하지 않자 심재덕 수원문화원장은 1992년 7월 9일 경인일보에 서호의 문제점을 기고했다.
항미정은 잘 보존 되고 있는 것인지, 서호의 수면은 옛날과 같은 모습인지, 앞의 두 가지는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서호의 축만교는 원형을 무시한채 왜곡하여 콘크리트로 거대하게 만들었는지, 서호를 살릴 의지가 있는 것인지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화성축성 200주년 기념 세계연날리기 행사. (사진=수원시)
7년간의 서호살리기와 개방운동은 1995년 민선1기 시장선거에 심재덕 수원문화원장이 수원시장에 당선되면서 활발하게 진행됐다. 그중 서호 문제는 농촌진흥청과 협의를 통해 서호에 쌓인 오염된 토양을 준설하고, 서호개방을 관철 시켰다. 이를 기념해 1996년에는 ‘화성축성 2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세계 연날리기 대회’를 농촌진흥청 운동장에서 가졌다.
서호가 개방됐지만 화서1동 지역 주민들은 그림의 떡이었다. 서호변으로 50m 폭의 경부철도가 통과하고, 철도변으로 40m 폭의 덕영대로가 개설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송재규 시의원은 경부철도와 덕영대로를 넘어가는 육교를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원시 도로과에서는 '공원을 이용하는 도로이니 녹지공원과의 업무'라고 했고, 녹지공원과는 '현재 덕영대로 건설이 끝나지 않았으니 도로과에서 해야 한다'고 했다.
송재규 시의원은 당시 도시계획과 도시계획계장인 필자에게 와서 하소연 했다.
필자는 서호육교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많은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우선 기본계획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자고 제안했다. 그런 이유로 1994년 첫 시작을 도시계획과에서 ‘서호육교’기본계획을 수립했다.
1995년 심재덕 시장의 당선으로 서호육교 설치사업은 순조롭게 추진됐다. 그런데 철도청이 경부철도 40m 위에 보를 설치하는 것에 위험하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당시 수원 출신 이호정 국회의원이 건설교통위원장을 하고 있어서 철도청을 설득해 추진할 수 있었다.
138-5, 2022년 서호와 여기산 주변 항공사진. 서호 오른쪽 위쪽에 서호육교가 보인다. (사진=수원시)
서호육교는 심재덕 시장의 혜안과 송재규 시의원의 열정과 끈질긴 노력으로 이룬 성과다.
1991년 4대 의회 때 시의원에 당선되어 7대에 이르기까지 16년간 화서1동 지역과 수원시 발전을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관내 순찰을 통해 주민불편사항을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하나하나 개선해 화서1동은 물론 수원시 발전에 크게 기여를 한 송재규 전 시의회의장.
현재는 화서신협 이사장으로 4선을 실현해 30년이 넘도록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그의 열정과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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