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영 수원현미경(105)] 여기산 · 서호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2.20 05:20
여기산 · 서호 공원 항공사진(2022년 6월). 여기산과 서호 농촌진흥청 시험답, 왼쪽에 농촌진흥청 건물과 도로변에 농업박물관 건립이 완료된 모습이 보인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1967년 7월 3일 52만㎡ 여기산이 공원으로 지정됐다. 여기산은 해발 104.8m의 산으로 산 정상부에 453m의 테뫼식 산성이 있다. 1979~1984년 발굴된 토기 및 철촉, 방추차, 온돌 구조 및 집 자리는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및 초기 철기시대의 생활유적지로 확인됐다. 여기산은 화성축성 당시 팔달산과 숙지산, 앵봉과 함께 성돌을 채취한 채석장이었다. 여기산 채석장은 1970년대까지 운영됐다.
축만제 표석. 1799년 축만제(서호) 제방에 세운 표석이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이후 1976년 3월 27일 서호가 추가 편입되어 62만1994㎡가 됐다. ‘여기산 · 서호공원’이 된 것이다.
서호는 축만제(祝萬堤)로서 1799년(정조23)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만들었다. 국토지리정보원 고시(제2020-1130호)에 따라 공식적으로 원래의 축만제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정조는 1795년 ‘만석거(萬石渠)’ 축조에 이어 1797년 만년제(萬年堤)를 축조하고, 당시 화성유수 서유린에게 화성 서쪽에 저수지와 둔전인 국영농장 건설을 지시했다. 이것이 축만제, 즉 서호다. 천년만년 ‘만석(萬石)’의 생산을 축원하는 뜻이 있다.
‘화성지’, ‘수원읍지’를 살펴보면 축만제는 수원부 치소로부터 서5리 북부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길이 1246척, 넓이 720척, 높이 8척, 두께 7척5촌, 깊이 7척, 수문2곳, 몽리답 232섬지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저수지 한복판에는 인공섬을 만들었다.
저수지가 축조되자 정조는 ‘축만제둔’을 조성했다. 오늘날 서둔이란 지명은 여기서 유래한다.
정조는 화성건설 이후 수원을 경제적 기반이 튼튼한 자립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화성 유지관리 비용을 둔전운영을 통해서 조달하고자 했다. 축만제는 정조시대 농업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31년(순조31)에 건립된 항미정. 항주의 서호 미목(아름다운 눈섭)에서 따온 이름이다. 정면 네칸에 측면 칸 반의 규모로 ‘ㄱ’자 모습의 43.5㎡ 정자이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1831년(순조31) 항미정을 건립하여 서호낙조(西湖落照 : 해질녁 낙조 드리운 서호)의 아름다운 풍광이 탄생했다. 일제 때 만든 ‘조선명승실기(朝鮮名勝實記)에 143곳의 명승지 중 서울과 금강산에 이어 세 번째로 아름다운 곳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1906년 근대적인 농법을 전파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일제의 농업책 수행기관 ‘권업모범장’이 이곳에 설치됐다. 1929년 ‘농사시험장’으로 개편하여 시험 · 연구 사업을 추진했다. 1944년 5월에는 ‘농업시험장’으로 개칭하고 농사시험 · 연구기구를 일원화하고 재배기술을 농촌에 보급하는 일을 담당했다.
1946년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중앙농사시험장으로 개칭되었다가, 1947년 농사개량원, 1949년 농업기술원, 1957년 농사원으로 개편하고, 1962년 농촌진흥청으로 개편하여 국내 최대 농업 관련 국가기구로 발전했다. 농촌진흥청은 1970년대 부족한 식량자원 확보를 위해 쌀 3천 만석 사업을 전개해 달성했다.
필자와 여기산·서호공원과의 인연은 1973년 10월 수원공업고등학교 3학년 때 농촌진흥청 산하 농업기술연구소(현 국립농업과학원)에 실습을 나가면서부터다. 군에 입대하기 전인 1976년 8월까지 3년 가까이 여기산과 서호 옆에서 지냈다.
가끔 점심을 먹고는 서호 제방을 산책 하거나 여기산을 오르기도 했다. 1975년 초겨울에는 저수지 물이 바닥을 보인 일도 있었다. 얼음판 밑 1m 정도의 가물치를 큰 돌을 내리쳐 잡은 기억이 난다.
이 시절 수원에는 현대식 공원하나 없었다.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공간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팔달산과 서호, 원천유원지 정도였다.
서호는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저수지 이지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수원시민들의 휴식 장소이자 놀이터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각광을 받은 곳이다.
1993년 11월 여기산 · 서호 항공사진. 서호 상류에 직사각형으로 설치된 강중폭기조(간이정화시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1967년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으로 서울~수원간 도로 확장이 필요했다. 수원시는 도로건설비를 줄이기 위해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추진했다. 1968년부터 영화1·2지구와 파송1·2지구가 개발되면서 북수원 서호천 유역에 거주민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당시 수원은 오폐수 처리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오폐수가 하천을 통해 저수지로 유입됐다. 1970년대 말 저수지 오염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농촌진흥청은 오염방지를 위해 서호주변에 철조망을 둘러치고 시민들의 출입을 금지했다. 시민을 통제한다고 수질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당시 오수 차집관거 설치와 하수처리장 건설은 요원했다. 응급조치로 강중폭기조(간이정화시설)를 서호 상류에 설치했으나 오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수원시민들은 불만이 쌓이게 됐다.
당시 서호개방을 처음으로 들고 나와 행동에 나선 사람은 1987년 수원문화원장으로 취임한 심재덕이었다.
심 원장은 수원천 살리기에 앞장서는 한편 서호를 수원시민에게 돌려주자는 캠페인도 함께 전개했다. 1988년 ‘수원사랑’ 10월호에 죽음의 호수로 변한 서호를 알리는 글을 써서 시민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이때부터 심재덕 문화원장은 서호를 시민에게 돌려주는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김준혁 한신대 교수가 쓴 ‘미스터 토일렛 심재덕 평전’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돼 있다.
1990년 서호 주변 서둔동 주민들은 농촌진흥청을 상대로 서호를 개방하라는 요구를 본격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농촌진흥청은 움직이지 않았다. 심 원장은 1992년 7월 9일 경인일보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첫째, 항미정은 잘 보존되고 있는가? 옛 선현들이 주변과 조화를 이뤄 건축했는데 항미정 옆 동산은 왜 깎여 없어졌는가?
둘째, 서호의 수면은 옛날과 같은 모습인가? 여기산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서쪽의 활처럼 휘여 아름답던 그곳에 직선 운동장이 된 것은 어떤 연유인가?
셋째, 위의 두 가지 형질변경은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넷째, 서호의 축만교는 무엇인가? 일본인조차 항미정과 여기산을 생각해 아담하고 예쁜 다리를 놓았는데 경관을 무시하고 거대한 콘크리트 다리를 건설한 것은 누구의 의견을 듣고 한 것인가?
다섯째, 서호를 살릴 것인가? 금빛잉어, 가물치, 온갖 물고기가 노닐 던 서호는 사호(死湖)가 됐다.
화산지하차도 수해복구 현장. 임창열 경기도지사, 심재덕 수원시장, 박종희 국회의원, 수원시와 경기도 간부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당시 수원시는 집중폭우 때 서호천 주변의 침수피해가 극심하게 발생했다. 서호의 수문을 농촌진흥청에서 관리했기에 수원시와 손발이 맞지 않아 수위조절을 제때 하지 않아 수위가 높아져 침수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수원시는 서호 관리권한을 수원시에 위임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서호는 농사시험 사업에 필요한 관개용수로 활용하기 때문에 관리권을 넘겨줄 수 없다는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1995년 7월 1일 제1기 민선시장으로 당선된 심재덕 시장은 문화원장 시절 추진한 서호 개방 사업을 추진했다. 서호 개방을 위해서는 수질개선이 급선무였기에 호수 바닥에 쌓인 오염토사 준설공사를 추진했다. 그리고 상류에 설치된 강중폭기조(정화시설)를 철거하고 공원조성을 추진했다.
화성축성 200주년 세계연날리기 행사 모습. 서호를 메워 조성한 잔디운동장에서 연날리기 행사가 개최됐다. (사진=수원시)
1996년은 수원화성 축성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전인 1994년 7월 29일 당시 심재덕 문화원장은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제안한 바 있다. 기념사업 일환으로 국제연날리기 행사를 농촌진흥청 운동장에서 개최함으로써 서호개방 시민운동 사업을 마무리 했다. 이 운동장은 서호를 메워 만든 것이었다.
축만제는 2016년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로부터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인정받았다. ‘가뭄에 대비한 구휼 대책과 화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식량과 재원을 제공하는 등 백성의 식량 생산과 생계에 기여했고, 화성이라는 신도시 건설의 하나로 조성한다는 아이디어가 혁신적이었고, 항미정 건립으로 관개용수 공급의 단일 목적을 넘어 조선후기 선비들의 풍류와 전통을 즐기는 장소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봄철 서호 풍경. 서호주변에 벚꽃이 만개하여 서호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정조의 애민사상에서 비롯된 농업기반 시설은 우리나라 농업의 본산이 됐다. 나아가 쌀 생산 3천 만석을 달성해 쌀 분야의 자급을 이루었다.
2014년 농촌진흥청은 비록 수원을 떠났지만 정조시대 이후 대한민국의 농업의 본산지임을 잘 지켜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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