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영 수원현미경(104)] 만석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2.06 06:00
만석공원 조성계획도. 광장, 다목적운동장, 축구장, 테니스장, 게이트볼장, 배드민턴장, 족구장, X-게임장, 주차장, 화장실, 정자, 영화정, 어린이도서관, 미술관, 야외음악당, 청솔노인복지관, 기념비, 생태학습장, 수변데크 등이 조성됐다. (자료=수원시)
‘만석공원’은 1795년 5월 18일 완성된 ‘만석거’에서 유래했다.
1794년(정조18)11월 1일 정조는 흉년으로 곤궁한 백성을 염려해 해동기까지 성역 중지를 선언하고 화성 인근에 저수지와 농지개간을 지시했다. “그렇게 하면 10년 후에는 수확이 만 섬(萬石)에 달할 것이니 이것은 ’만 명‘이 넉넉히 먹을 수 있는 양식이다. 이는 성을 지키는데 일조(一助)가 되리라”고 했다.
1795년(정조19년) 윤2월 14일 원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던 정조는 화성유수 조심태로부터 개간이 가능한 땅에 대한 설명을 듣고 곧 작업에 착수할 것을 지시했다. 공사는 1795년 3월 1일 진목천의 물줄기를 막는 공사를 시작으로 5월 18일 완성했다. 정조는 1796년(정조20) 1월 원행 때 ‘만석거(萬石渠)’로 명명했다.
영화정도. 만석거를 감싸고 있는 옆의 길이 만석거 제방 겸 원행길이다. 북쪽에 영화정이 있고, 만석거 표석이 세워져 있다. 만석거에는 놀이배 2척이 있고, 남쪽으로 여의교가 위치하고 있다. 화성성역의궤 권수에 수록된 그림이다. (자료=수원시)
만석거는 둘레 1022보로써 주변에 101석(石) 5승락(升落:되지기, 마지기의 10분의 1이다.)의 대유둔이 조성됐다. 만석거는 폭우에 대비해 수위를 조절하는 수문(水門)과 둔전 관개(灌漑)에 필요한 수갑(水閘)을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고 주변에 송림지대를 조성하여 유락시설로 이용되도록 했다.
연못에는 작은 섬을 두어 꽃나무를 심고 연꽃을 심었으며, 연못가에 영화정(迎華亭)을 세워 주변을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1796년 10월 16일 낙성연때는 연못에 배를 띠우고 연회를 갖기도 했다.
1925년 7월 ‘을축대홍수’때 제방이 유실되자 제방으로부터 400m 상류지점에 제방을 새로이 축조하여 오늘날의 저수지가 됐다. 만석거는 일왕면에 있다하여 일왕저수지로 불리기도 했으며, 조기정 방죽으로 불리기도 했다. 1995년 7월 1일 민선 1기 심재덕 시장은 공원이 완성되자 옛 이름을 취해 ‘만석거’, ‘만석공원’으로 바로 잡았다.
만석거가 공원이 된 것은 1967년 7월 3일이다. 정부수립 후 최초로 수립한 도시계획에서 ‘제4호공원’으로 32만9004㎡가 지정됐다. 공원조성은 1992년 들어서 추진됐다. 공원으로 지정 된지 25년이 지나도록 공원조성이 이뤄지지 않아 여러 분야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1990년 1월 항공사진. 만석공원 개발전 사진이다. 토지구획정리사업 시행으로 가옥이 많이 보인다. (사진=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첫째는 1990년대까지 서호천 유역이 침수피해가 많았다. 서호 여수토(물넘이뚝) 제방과 만석거 여수토 제방이 높아 집중 호우 시 침수 피해가 자주 발생했다.
두 번째는 저수지를 제외하고 전·답과 임야로 형성된 60%이상의 토지가 사유지여서 보상을 요구하는 민원이 발생했다.
세 번째는 파송1·2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의 시행으로 거주민이 많아지자 오수가 저수지에 유입돼 심각한 악취가 발생했다.
네 번째는 북수원권 주민들의 여가와 휴식공간 제공을 위해 공원조성이 필요했다.
1988년 7월 1일 구제(區制)가 도입되면서 공원업무는 도시과 도시정비계에서 담당했다. 1992년 8월 21일 필자는 구획정리계장에서 도시계획계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이윤희 도시정비계장이 건설과 도로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양원 하수계장(전 수원시 건설국장)이 도시정비계장으로 발령받았다. 주 계장은 이미 하수계장시절 서호천 침수대책사업을 추진했다.
주 계장은 일왕저수지(만석거)에 대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수원시 ‘제4호공원 조성사업’추진계획을 수립하여 가장 먼저 침수대책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이어 공원조성계획을 수립하게 됐는데, 당시는 김포 쓰레기 매립장이 조성되지 않은 시기여서 각 시.군은 자체적으로 생활쓰레기를 처리했다. 수원시는 구릉지대가 없어 쓰레기 처리에 많은 애로가 있었다. 문제는 만석거 제방아래 부분 논에 쓰레기를 매립했던 것이다.
주 계장은 그곳이 1796년 만석거 조성당시 원래 저수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원팔경의 하나인 북지상련(北池賞蓮)을 복원해 보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예산이 많이 들어가서 제방 아래 부분의 쓰레기 처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수원시 청소부서의 의견에 따라 그곳에 운동장을 조성하는 계획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대안으로 북지상련(北池賞蓮)표석을 세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022년 6월 항공사진. 만석공원이 완성된 모습이다. 왼쪽 숲은 예산부족으로 조성하지 못한 것이 현재까지도 숲으로 남아 있다. (사진=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공원조성계획에서 중점을 둔 것은 테니스장이었다. 체육부서에서는 전국단위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14면을 확보해야 했다. 광장, 다목적운동장, 축구장, 배드민턴장, 게이트볼장, 족구장, X-게임장, 주차장, 화장실, 정자, 영화정, 어린이도서관, 미술관, 야외음악당, 청솔노인복지관, 기념비, 생태학습장, 수변데크 등이 조성됐다. 배드민턴장은 이후 실내경기장으로 재조성됐다.
문제는 32만9004㎡(9만9523평)의 공원부지 중 수원시 땅이 없다는 것이었다. 수원시의 예산형편으론 1년에 20억~30억원씩 확보할 경우 10년 이상 걸려야 했다. 주 계장은 사업추진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해마다 확보되는 예산은 저수지 밖의 토지 보상에 집중했다. 저수지는 수화농지개량조합(현 농어촌공사)소유였으므로 사용동의를 얻어 공원 조성을 추진했다. 수원시는 수화농지개량조합에 보상금을 바로 지급하지 못해 빚 독촉을 받아야 했다.
수원미술전시관 전경. 수원화성의 한옥 지붕처마를 표현한 건축물이다. 재활용센터로 지어진 건물이 수원미술전시관으로 활용됨으로써 미술관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은 미술관이다. (사진=수원시포토뱅크)
공사가 절반정도 추진될 즈음인 1995년 7월 1일 심재덕 시장 취임으로 많은 부분 조성계획을 수정했다. 만석공원이 이목동의 집에서 출퇴근 길옆에, 멋진 건물이 지어지는 것을 보게 됐다. 건물의 용도를 확인해보니 청소과에서 재활용센터를 짓고 있음을 알게 됐다.
당시 수원시 미술인들은 미술전시관 건립을 당면사항으로 정하고 심 시장에게 지속적으로 주문했다. 심 시장은 당시 설계자인 진우건축 김동훈 건축사에게 미술관으로 사용할 수 없냐고 하여 미술관으로 사용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그 건물은 결국 ‘재활용센터’가 되지 못하고 ‘수원미술전시관’이 됐다.
공원조성계획도 바뀌었다. 당시만 해도 남수문 복원은 요원했다. 그래서 상류지역에 남수문 형상의 교량 설치를 주문했다. 함께 영화정 역시 복원을 주문했다. 만석공원조성이 완공되자 주양원 계장은 사무관으로 승진하여 장안구 건설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민선 심재덕 시장은 이 무렵 수원시목을 은행나무에서 소나무로 바꾸게 된다. 당시 장안구청장은 심재덕 시장과 수원농림고등학교 동창인 김영철 구청장이었다. 김 구청장은 만석공원과 능행길 등에 시목인 소나무 식재를 적극 추진했다. 만석공원은 시민들의 기증 목으로 추진하는 식재 계획을 수립했다.
공원 외곽에 200주를 심기로 했다. 나무의 규격은 높이 10m 크기로 1주당 80만원으로 책정했다. 대신 화강석으로 팻말을 세워주는 조건으로 계획을 세웠다. 기증자들에게는 회갑, 칠순, 개업, 자녀출산 등 경사스런 기념일에 맞추어 기념식수 의미를 부여했다.
후일 담당자들은 상급기관으로부터 호된 감사를 받았다고 한다.
만석거 연꽃심기 행사 기념사진. 화성연구회 김이환 초대 이사장과 회원 15명이 함께 참여했다. (사진=수원시포토뱅크)
만석공원 조성이 완료되자 북지상련(北池賞蓮)이 사라짐을 아쉬워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2000년 4월 16일 용주사 포교당인 수원사가 주관, 수원의 문화단체가 참여하는 연꽃심기 행사가 열렸다. 필자도 화성연구회 회원 15명과 함께 참여했다. 현재 만석공원의 연꽃은 이때 심은 연꽃이 멋진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만석공원에는 수원발전을 위해 헌신한 7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이병희 전 무임소장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2000년 5월 19일 이병희 선생 동상건립 추진위원회가 세워 고인의 수원사랑 뜻을 기리고 있다.
만석거는 2017년 10월 11일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가 지정한 '세계 관개(灌漑)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됐다. 만석거는 수갑(水閘)이라는 조선 시대 최고의 수리기술이 반영된 당대 선도적 구조물이고, 백성들의 식량 생산과 농촌 번영에 이바지했으며, 건설 당시 아이디어가 혁신적이고, 가을 풍경이 수원 추팔경(秋八景)의 하나로 불릴 정도로 역사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만석공원은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대왕의 애민의 정신이 서려있는 공원이다. 북수원권 시민들의 여가와 휴식공원으로 자리 잡았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수원특례시의 종합 > *김충영이 만난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충영 수원현미경(106)] 숙지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1) | 2023.03.06 |
---|---|
[김충영 수원현미경(105)] 여기산 · 서호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0) | 2023.02.20 |
[김충영 수원현미경(103)] 인계 제3호, 청소년문화 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0) | 2023.01.24 |
[김충영 수원현미경(102)] 효원공원을 조성한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0) | 2023.01.09 |
[김충영 수원현미경(101)] 수원 올림픽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0) | 2022.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