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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36)] 권선구청 개청과 청사건립에 얽힌 이야기 [상] (전 권선구청장 권인택 편)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36)] 권선구청 개청과 청사건립에 얽힌 이야기 [상] (전 권선구청장 권인택 편)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4.04.15 06:00

장안구와 권선구청 개청을 경축하는 교동 아취광고 걸이대. 1988년 6월 30일 촬영. (사진=경기도멀티미디어)

1988년 7월 1일 수원시 최초로 구청(區廳) 제도가 시행돼 북쪽에는 장안구, 남쪽에는 권선구가 설치됐다. 수원시 인구가 54만3724명이 되어 ‘지방자치법 제3조 제3항 특별시 또는 광역시가 아닌 인구 50만 이상의 시에는 자치구가 아닌 일반 행정구를 둘 수 있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

 

권선지명 유래비. (사진=김충영 필자)

구(區)의 명칭은 수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지명을 사용했다.

장안구는 장안문에서 따왔고, 권선이라는 지명은 고려말 한림학사 망천(忘川) 이고(李皐)선생으로부터 비롯된 지명이다. 이고 선생은 고려가 쇠망하자 낙향해 팔달산 자락에서 살다가 적사리(赤寺里)로 이사를 해 학당을 열어 제자들에게 권선(勸善)을 가르치고 몸소 실천했다. 이고 선생은 효심 또한 지극해 나라에서 ‘권선리’라는 지명을 사명(賜名)했다.

수원시는 구청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청사와 인력, 장비 등의 준비를 위해 개청 20여일을 앞두고 (1988.6.11) 장안구청과 권선구청 개청준비단을 출범시켰다.

당시 권선구청 개청 총괄책임자는 고 박계민, 준비단장에는 고 이말봉 과장, 정자동 사무장이었던 권인택이 실무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구청 개청 후 박계민은 초대 구청장, 이말봉은 초대 총무과장, 권인택은 초대 총무계장으로 발령되어 권선구청 탄생에 선봉적인 역할을 했다.

구 수원시청사. 1988년 7월 1일부터 2006년 3월 27일까지 권선구청사로 사용했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신설되는 권선구 청사는 1986년 12월 31일까지 수원시 청사로 사용하였던 수원시 교동소재 구 시청 건물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하지만 구 시청사 건물은 일제시대에 건립되어 심하게 노후돼 대대적인 대수선 공사 없이는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개청을 준비하기에는 기일이 촉박할 뿐만 아니라 준비 과정이 방대했다. 주야간 준비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과별 사무실에 집기조차 들여 놓지 못한 상태였다. 개청이 임박해지자 개청 2일전 유석보 시장과 시 간부들이 개청 준비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방문했다. 건물외벽에는 페인트칠과 노후부분을 수선하기 위해 설치한 비계(동바리)가 그대로 있었다.

주변은 건축물 잔재며 청소상태가 엉망일 뿐만 아니라 산재된 쓰레기 또한 산더미 같았다.

개청식장 내 현판조차 걸지 못한 상태를 확인한 점검단은 개청준비가 덜되었으니 권선구청 개청은 연기하고 장안구청만 개청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개청식을 위해 경기도지사를 비롯한 내빈과 구민에게 초청장이 발송됐고 식전행사까지 계약된 상태였다. 권인택 실무팀장은 기왕에 초청장까지 발송된 개청식을 연기하는 것은 어려움이 많으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제가 책임지고 개청할 수 있도록 마무리 짓겠다고 주장했다. 당시 간부들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다고 비난했다. 이런 역경을 딛고 개청행사는 예정대로 열렸다.

준비단은 유관기관 및 부서별 대책회의를 개최하여 시간대별 세부계획을 수립했다. 공사업체에서는 외부에 설치된 가설재(동바리)를 장비까지 동원하여 밤샘 작업으로 철거했고, 주차장에 싸놓은 새로 구입한 집기를 부서별로 들여놓기 위해 새벽에 전직원 비상을 걸어 사무실 바닥 청소까지 완벽하게 정리 정돈했다.

개청일 당일 새벽에는 권선구 관내 미화원과 청소차량이 동원되어 건축잔재를 비롯한 쓰레기를 2시간여 만에 처리했고, 소방서의 협조를 얻어 소방차를 이용, 건물외벽과 계단 등 식장내를 고압호스로 깨끗하게 청소를 완료하고, 개청 당일 아침 8시 행사용 현수막을 부착하자 개청준비가 완료됐다.

개청식 준비가 완료됐다는 소식에 “군인을 동원했나. 어떻게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간다”는 말도 나왔다. 어렵고 힘들었던 개청식을 무사히 개최한 후 권선구 초대 총무계장 권인택은 주변으로부터 ‘독일병정’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그는 개청이후 권선구청 초대 총무계장을 거쳐 인사계장, 세무과장, 교통행정과장을 역임했다.

재정경제국장 등을 역임한 후, 2003년도에 16대 권선구청장으로 발령됐다. 1988년 권선구청 개청 추진단 실무팀장을 맡은 지 15년 만이다.

수원시는 1988년 7월 1일 장안구와 권선구의 구제(區制) 실시이후 1993년 인구가 71만4272명으로 증가하게 됨에 따라 장안구와 권선구 행정구역을 분할 개편하여 팔달구를 신설해 3개구가 됐다.

이후 2003년 수원시는 104만223명으로 증가함에 따라 장안, 권선, 팔달구 행정구역을 분할 개편해 영통구가 신설됨에 따라 수원시는 4개구 체계가 됐다. 행정구역 개편과정에서 권선구청사가 팔달구 관할구역에 남게 된 것이다.

권선구민이 팔달구 관할구역 내 있는 권선구청을 방문, 민원을 처리해야하는 등 불합리한 현상이 대두됨에 따라 권선구청 이전이 시급한 과제가 됐다.

이렇게 하여 권인택 권선구청장에게 관할구역에 새 구청사를 마련해야 하는 임무가 부여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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