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영 수원현미경(113)] 원래는 지지대고개~ 팔달산 서쪽으로 계획했던 경부철도-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6.12 09:53
1914년 수원시 기본지도. 의왕 고천~지지대고개~팔달산 서쪽을 경유하는 노선이 오늘날의 노선으로 변경된 지도. (자료=수원시)
경부철도 건설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첫 단계 사업으로 추진됐다.
1894년 봄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기화로 8000여 명의 대군을 한반도에 출동시킨 일본은 7월 23일 경복궁을 불시에 점령하고 이어서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같은 도발행위를 정당화하고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1894년 7월 30일에는 경인, 경부철도 부설권 및 전신관련 권리와 목포항 개항 등을 요구했다.
조선은 경복궁에서 일본군 철수를 조건으로 1894년 8월 20일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는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했다. 이어 1894년 9월 8일에는 대한제국 정부와 경부철도주식회사 발기인 사이에 ‘경부철도합동계약’이 체결했다. 계약내용은 철도노선 부지 및 정차장 등 필요한 용지는 대한제국이 제공하며, 운영권은 한·일 양국의 정부나 국민 외에는 그 주권을 양도하지 않을 것 등 총 15개 조항이 명시됐다.
1901년 6월 경성거류민단, 경성상업회의소, 경성영사관이 일본 정부와 관민 유력자를 움직여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는 러시아에 대항하여 조선에서 이권 확장과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경부선은 1901년 9월 21일 서울 영등포와 부산 초량에서 일본자본 회사인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기공, 4년 후인 1904년 12월 27일 완공하고, 1905년 1월 1일 영업을 개시하여, 그해 5월 25일 서울 남대문 정거장 광장에서 개통식이 거행됐다.
조선의 6대로를 대동여지도에 표기한 지도. 제5대로인 제주로가 수원을 통과한다. (자료=김충영 필자)
경부철도가 수원을 통과하게된 것은 역사 이래 수원이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정조 이전 시대 오늘날의 수원으로 조선의 6대로중 제5대로인 제주대로가 과천을 거쳐 수원을 통과해 제주도로 향했다. 오늘날의 수원에 신읍이 건설되고 1795년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열기 위해 시흥길을 새로이 건설하고, 영화역을 설치하면서 수원은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교통요충지가 됐다.
경부선이 수원을 통과하기까지 여러 차례 노선 변경이 있었다. 일본은 경부철도의 노선을 선정하기 위해 5회에 걸쳐 현장답사를 실시했다. 1,2차 답사 때 경부선 노선은 서울-용인-죽산-청주를 거쳐 부산으로 이어지는 노선이었다. 3차노선 답사 때 노량진-영등포-수원-공주-논산을 거쳐 부산에 이어지는 노선으로 결정됐다.
1,2차 노선은 최단거리노선이었다면, 3차 노선은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을 연결하는 노선이었다. 4,5차 답사 때에는 군사적인 면과 경제적인 고려하여 지금의 수원을 통과하는 ‘삼남길’노선으로 결정됐다.
수원구간은 경부철도 제2공구 구간인 안양 명학동~진위구간 22마일(35.4km)에 해당된다. 1902년 7월에 착공하여 1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명학동~수원구간은 1903년 10월경에 공사용 열차가 운행되었다.
그런데 수원지역을 통과하는 노선이 확정되기 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당초 일본 건설회사는 사그내(의왕 고천)에서 동쪽으로 약간 방향을 틀어 지지대 고개의 서쪽산에 터널을 뚫고 대유평을 거쳐 화서문밖, 팔달산 기슭을 뚫고 상유천, 대황교 동편으로 나가는 노선을 계획했다.
지지대 비각. 1808년 2월 28일순조의 지시로 세웠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그러나 수원 사람들은 팔달산이 정조의 사당인 화령전의 주산이고, 지지대 역시 정조와 관련된 유적임을 들어 사그내(의왕 고천)-지지대로 연결되는 철도노선을 반대했다. 수원 사람들이 모여 반대 시위를 벌이자 대한제국 황실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1902년 4월 28일 철도원 총재 유기환은 수원 영통출신으로 지지대 터널공사 반대의사를 일본측에 전달했다. 일본측은 합동조약에 ‘선로의 부설방법은 회사가 선정하는 기사의 측량에 따라 시공한다’ 는 조항에 따라 계획대로 강행할 것을 결의한다.
4월 30일 일본감독은 철도원 총재를 찾아와 터널의 시공 위치는 지지대비에서 150m나 떨어져 있어 하등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때 수원부민들이 남문 밖에 모여 철도는 지지대를 통과 할 수 없다고 반대 시위를 했다.
수원군수 김각현도 보고를 통해 팔달산은 화령전이 있는 왕산(王山)이고 지지대도 소중한 곳이며, 그 구간에는 전답분묘가 많아 민원이 답지하니 어떻게 조치할까하는 보고를 올렸다.
지역사정을 잘 알고 있는 유기환 총재는 일본 철도회사 기사에게 노선 변경을 주장했다. 1902년 5월 9일에는 일본 하야시 공사가 고종을 알현, 철도원이 까닭 없이 항의해 철도공사가 지연되니 자기들의 주장을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고종은 철도원 유기환 총재와 협의할 것을 지시했고 철도원은 노선변경을 주장했다.
수원향교 앞에서 수원역 방향 향교로 모습. 1907년 독일인 헤르만 산더가 찍은 사진. (사진=수원시)
일본측이 조약을 근거로 공사 강행의 뜻을 통보해오자 우리측 철도원에서는 철도노선을 군산포(軍山浦)-사시현(四時峴)-대대동(大垈洞)-서둔동-상류천을 지나는 노선을 택하면 다소 우회하지만 터널을 뚫지 않고 다른 문제가 없으니 그렇게 변경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일본측은 조약을 근거로 철도원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음은 물론 공사 속개를 통보해 왔다. 그러자 철도원은 경기도 관찰사 이근명에게 명하여 공사착수를 엄금하라고 지시했다.
양국 의 갈등이 계속되자 6월 1일 기공이 무기한 연기됐다. 이즈음 철도원 총재에서 외부대신 서리로 취임한 유기환이 고종의 지시를 받아 하야시 공사를 설득, 우리측 주장을 관철함에 따라 경부선은 수원사람들의 뜻대로 수원 읍치에서 서북쪽으로 우회하는 ‘군포-부곡-수원역-병점’ 노선으로 확정됐다.
1917년 수원전도. 위 사진의 향교로를 지도에서 볼 수 있다. (자료=수원시)
경부철도는 1905년 1월 1일을 기해 영등포-안양-부곡-수원-병점-오산-진위-서정리-평택으로 이어지는 노선으로 개통됐다. 수원역사는 간이역으로 출발해 1928년 9월 1일 전통 한옥형태의 역사가 건립됐다.
수원은 신읍조성 이후 화성건설과 시흥 능행길 조성, 영화역 설치로 조선시대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했다.
대한제국 시기 경부철도가 수원을 통과함에 따라 교통 요충지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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