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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1)] 수원 올림픽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01)] 수원 올림픽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입력 2022.12.26 05:40

올림픽공원비. 서예가 이수덕씨의 글을 자연석에 새겨 1988년 세웠다. (사진=김충영 필자)

일제강점기인 1944년 수원최초의 도시계획에서 북공원, 동공원, 팔달산공원, 세류공원, 동산동원 등이 지정됐다.

1949년 8월 15일 수원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본격적인 도시개발을 추진해야 했으나 1950년 6.25의 발발로 중단됐다.

이후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물 무렵인 1961년 우리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추진한 도시계획은 행정미숙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1963년 12월 10일 경기도청 수원이전이 확정되자 도청소재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도시계획이 다시 추진됐다.

이 시기 박정희 정부는 산림녹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광교산과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 등과 수원에 산재한 마을 뒷동산 역시 사방사업을 시행, 숲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 때 상권선의 마을 뒷동산에 리기다소나무 숲이 조성됐다.

경기도청 수원 이전이 1967년 6월 23일로 가까워지자 도시계획은 속도를 내어 1967년 7월 3일 우리 정부에 의한 수원시 최초의 도시계획이 수립됐다. 이때 도시 전반의 내용이 도시계획에 반영됐다.

1944년 일제강점기에 지정된 5개소의 공원이 받아들여졌고, 신규 공원 12개소가 추가 지정됐다. 이때 공원에 편입된 곳은 화성축성 때 조성된 저수지와 성돌을 채취한 산과 일제강점기 축조된 저수지, 사방사업으로 형성된 양호한 임상 등이다. 올림픽공원(인계제1호공원) 역시 이 때 공원이 됐다.

인계동과 권선동 모습. 1974년 8월 항공사진이다. 가운데 둥근 모습의 길이 마라톤코스였다. 윗 부분에 수원공고와 인계초등학교가 보인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올림픽공원은 1980년 5월 29일 권선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가 지정될 때까지 13년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그곳은 필자가 수원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한 1971년 3월 2일 당시까지 여느 시골이나 다름없는 한적한 농촌 마을이었다.

이곳은 필자의 학교 체육대회 때 상권선 마을 소나무 숲을 돌아오는 마라톤코스였다.

그곳이 반환점이어서 학교에서 출발해 인계초등학교를 지나 논길을 달려본 추억이 있다. 고교시절 태권도부 활동을 했다. 당시 방학 때면 인계동 화랑체육관에서 태권도 수련을 했다. 이 때 짓궂은 친구들이 앞장서서 복숭아 서리, 참외 서리를 함께한 추억이 있다.

필자는 1980년에 2001년 목표의 ‘수원도시장기종합개발계획’수립을 담당했다. 그리고 ‘권선토지구획정리사업 개발계획’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1983년 8월 20일 토목8급에서 토목7급으로 승진해서 도시과 도시계획계에서 건설과 하수계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1984년 문화관광부는 도 단위 문화예술회관 건립 지침을 시달했다.

경기아트센터(경기도문화예술회관) 조감도. (사진=김충영 필자)

경기도는 도청소재지인 수원시에 문화예술회관 건립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수원문화예술회관 업무가 건설과로 배당됐는데 당시 하수계의 업무가 여유가 있다고 판단한 당시 이유하 건설과장은 담당업무를 필자에게 배당했다. 필자가 문화회관 업무를 맡게 된 사유는 도시계획업무를 오랫동안 담당해서 법제 업무에 능하다는 이유였다.

수원문화예술회관의 최초의 부지는 수원에서 흔히 의회부지라고 불리던 토지구획정리사업의 체비지가 결정됐다. 설계공모 후 작품심사 과정에서 부지가 협소하다는 의견이 제시됨에 따라 더 넓은 부지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결정된 곳이 시청 앞의 인계제1호공원(올림픽공원)이 선정 됐다.

설계자가 선정되면서 수원문화예술회관 실시설계가 진행됐다. 설계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자 건축허가를 받기위해 서류검토에 들어갔다. 도시공원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착오가 발견됐다. 도시공원법에는 건폐율이 대지면적의 10%를 넘을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다.

인계제1호공원(올림픽공원)은 5만8454㎡(1만7682평)였다. 도시공원법상 건축물의 바닥 면적이 5845㎡(1768평)가 최대 규모였다. 그런데 수원문화예술회관의 건축면적은 8,817㎡(2667평), 건축연면적은 2만2000㎡(6655평)여서 건폐율을 넘어서는 규모였다.

이를 숨기고 계속 진행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필자는 도시계획을 오랫동안 담당했던 터라 수원의 도시계획 진행사항을 잘 알고 있었다. 권선토지구획정리 사업지구 바로 옆 단지를 한국토지개발공사가 인계제2호공원(효원공원)을 매탄1택지개발사업 지구에 포함하여 개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필자는 그간의 문제점을 보고하고 대안으로 효원공원에 문화회관을 건립할 수 있음을 보고하자 당시 계장, 과장, 국장, 부시장, 시장은 크게 나무라지 않고 매탄1택지개발지구 효원공원으로 위치 변경을 허락해줘 큰 무리 없이 위치 변경을 추진할 수 있었다.

수원시는 1985년 11월 15일 권선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에 시청사 건립을 추진해 1987년 1월 22일 개청식을 가진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을 시절이었다. 시청이 허허벌판에 들어서자 시청 맞은편에 확보한 인계1호공원 조성이 시급했던 시절 수원 올림픽공원 조성이 추진됐다.

서울올림픽이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 동안 서울과 지방에서 개최됐다, 당시 160개국이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 열렸다. 88서울올림픽 경기는 23개 경기종목이 개최됐다. 이 때 서울에서 14경기, 경기도에서 8개 종목이 열렸다.

경기도에서 열린 종목은 수원실내체육관 핸드볼, 성남공설운동장 하키, 성남 상무체육관 레슬링, 과천 승마공원 승마, 광주 조정 카누경기장에서 조정과 카누, 고양 파주에서 싸이클 단체전과 개인전, 원당 종합마술경기장에서 승마 경기가 개최됐다.

올림픽공원 착공식 모습. 1987년 4월 18일 시청앞 올림픽공원에서 열렸다. (사진=경기도 멀티미디어)

서울은 1986년 아시안게임에 맞춰 올림픽공원을 조성한 상태였다. 김용래 경기도지사는 경기도에서 8개 종목이 개최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수원에 올림픽공원을 만들 것을 요청해 추진됐다. 수원 올림픽공원은 88올림픽을 준비하던 1987년 4월 18일 시청 앞 인계1호공원에서 착공식이 개최됐다. 이날 행사에는 김용래 경기도지사, 유석보 수원시장, 경기도 단위 기관장, 공무원과 시민이 참석했다.

1990년 1월 올림픽공원 모습. (사진=수원시항공사진서비스)

수원시는 1988년 7월 1일 구(區)제가 도입돼 북쪽에는 장안구, 남쪽에는 권선구가 개청했다. 이 때 필자는 도시과 도시계획계 차석에서 구획정리계장으로 진급해 이미 시작된 올림픽공원 조성사업을 담당했다. 이 때 한상률 토목7급(전 팔달구청장)이 담당해 마무리 했다. 공원에는 화장실 1동, 노인정, 음수대, 주차장 2개소, 배드민턴장, 농구장, 족구장, 테니스장, 씨름장, 산책로, 잔디광장과 수목이 식재됐다.

제24회 서울올림픽 개최기념비. 소형 양근웅 선생의 글을 새겼다. (사진=김충영 필자)

88올림픽이 끝나자 ‘올림픽공원’ 공원명비와 ‘제24회 서울올림픽 개최 기념비’를 세웠다. ‘올림픽공원’ 공원명 제호는 서예가 소당 이수덕 선생이 썼다. ‘제24회 서울올림픽 개최기념비’는 소형 양근웅 선생이 썼다.

경기도는 1989년 1월 25일 수원올림픽공원에 ‘올림픽기념 조각공원’ 조성계획을 발표했다. 작품공모를 통해 16개 작품을 설치했다.

가끔 올림픽공원을 돌아볼 때면 1985년 당시 도시공원법상 건폐율 부족으로 문화회관 건립이 불가함을 알았을 때 절박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문화회관을 올림픽공원에 지었으면 어떠했을까. 올림픽공원이 없는 삭막한 환경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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