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국가백년지대계’를 내세워 먼저 기선을 잡았다. 이 대통령은 10월17일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정책에는 적당한 타협이 없다”라고 말했다. ‘세종시’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다들 세종시에 대한 수정 방침을 뜻하는 거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측근들의 다양한 해설이 쏟아졌다. “지금 이 얘기를 꺼내서 대통령한테 도움 될 게 뭐 있느냐, 그럼에도 용기를 낸 건 정말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는 요지였다.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충청권 고립작전’(이 즈음 세종시 수정론자들의 논조는 대부분 세종시 문제를 충청권만의 이슈로 한정했다)이 먹혀들면서 비충청권이 대거 ‘수정 가능’ 쪽으로 돌아섰다. 충청권 안에서도 “적절한 대안이 마련된다면야…”라며 움츠러드는 기색이 역력했다.
| | | 박근혜 전 대표는 ‘여권 분열의 주범’이라는 책임론을 비켜가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때 한 약속을 뒤집었다”라는 비난을 피해가야 한다. | 그런데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신뢰’ 발언이 나오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박 전 대표는 10월23일 세종시 논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작심한 듯 견해를 밝혔다. “정치는 신뢰다. 이렇게 큰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한나라당이 국민에게 무슨 약속을 하겠는가. 국민이 과연 (한나라당을) 믿어주겠나.” 그러면서 정말 세종시의 자족 기능이 걱정된다면 “원안에다가 +α를 하면 된다”고 말했다. 친박계 의원들의 엄호사격이 잇달았다. “세종시 원안 추진은 이명박 대통령도 약속했던 사항이다. 원안 추진이 ‘양심상 어렵다’고 생각했다면 아무리 급하더라도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지 왜 이제 와서 딴소리냐”는 요지다.정운찬 총리에 대해서는 거의 쌍소리가 나온다. “박근혜 전 대표를 만나 직접 설득하겠다”는 정 총리의 발언(10월29일) 이후 비난 수위가 더 올라갔다. 한 친박 의원은 “이명박 꼭두각시 주제에 누가 누구를 설득한다는 거냐. 세종시 문제는 박 전 대표가 오랫동안 검토했고 당론까지 도출해낸 전문가 중의 전문가다. 설득하려면 여론부터 설득해라”라고 쏘아붙였다.
‘신뢰’라는 원칙에 ‘+α’라는 방법론까지 제시되자 여론은 다시 ‘원안 추진’ 쪽으로 기울었다. 여론조사기관인 리서치플러스의 9월26일 조사 때는 ‘수정안 지지’ 46.7%, ‘원안 지지’ 42.4%로 수정안 지지가 높았다가, 박 전 대표 발언 후인 10월31일 조사에서는 ‘원안+α 지지’ 48.7%, ‘수정안 지지’ 39.4%로 뒤집어졌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11월2일자 조사에서는 박근혜 전 대표의 ‘원안 +α’에 대해 ‘문제 없다’는 긍정적 응답이 64.1%로 ‘문제 있다’는 의견(25.4%)을 압도했다. 이런 여론의 변화에는 영남을 비롯한 비수도권의 가세가 큰 영향을 미쳤다. 세종시 문제를 ‘충청권만의 문제’에서 ‘국토 균형발전의 문제’로, ‘효율성’만의 접근이 아닌 ‘국가 정책의 신뢰성’ 문제로 전환시킴으로써 다른 지역뿐 아니라 수도권 안에서도 지지를 끌어낸 것이다. 여기저기서 ‘박근혜의 힘’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여론이 뒤집어지면서 한나라당 내 친이 진영에서 산발적으로 제기됐던 ‘국민투표’안은 슬그머니 잦아들었다. 오히려 친박 진영에서 “국민투표? 마다할 이유 없다”는 자신감이 흘러나온다. 친박 진영, "미디어법 때와는 다르다"
한 번씩 강펀치를 주고받은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는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갈 태세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운찬 총리에게 늦어도 내년 1월까지는 ‘대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수정 방침에는 변 함이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면서 대신 여론의 흐름을 다시 한 번 바꾸기 위한 시간을 확보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국가 경쟁력, 통일 이후의 국가 미래, 해당 지역의 발전이라는 대안의 세 가지 조건까지 제시했다. ‘백년지대계’와 같은 맥락이다.
이 대통령은 “적절한 시점에 국민에게 직접 입장을 밝히겠다”고도 했다. 대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든, 대안이 만들어지고 나서든 필요하면 직접 대국민 설득에 나서겠다는 의미다. 이 경우 이 대통령이 대선 공약을 뒤집는 것에 대해 어떤 논리를 펼지가 주목된다. 유감 표명이 있다면 어떤 수준일지도 관심사다.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1월에 나올 세종시 대안 내용과 함께 여론의 흐름을 좌우할 2대 핵심 변수이기 때문이다. 친이 진영의 한 인사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면 상황은 금세 달라질 것이다”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친이 진영은 대통령의 전면 등장과 함께 박근혜 전 대표를 압박할 또 다른 카드도 준비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친이 의원은 “정부안이 나오면 이를 한나라당 당론으로 채택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친박계가 반대를 하겠지만 결국 표대결을 하면 당론으로 채택될 것이고, 당론이 되고 나면 박 전 대표도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사라진다. 2005년 세종시법(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을 통과시킬 때도 내부에 반대파가 많았지만 당론이라며 밀어붙였다”라고 말했다. 올해 초 미디어법 통과 때처럼, 처음에는 박 전 대표가 반대를 하겠지만 일단 당론으로 확정되고 나면 ‘할 만큼 했다’며 돌아서리라는 것이다. 그는 박 전 대표의 ‘원칙 앞세우기’가 스스로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여차하면 친이 진영에서 ‘해당 행위’와 ‘원칙 파괴’를 들어 박 전 대표를 공격할 빌미가 생긴다는 뜻이다.
하지만 친박 진영에서는 “이번에는 미디어법 때와 다르다”는 반응이 나온다. 그때는 절차상의 문제를 짚는 수준이었지만, 세종시 문제는 한나라당, 나아가 정치 지도자의 신뢰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친박 의원은 “친이계가 그런 식으로 계산하고 있다면 큰 오산이다. 당론으로 채택하기도 어렵겠지만, 그 경우 본회의 보이콧 등으로 법안 통과가 어려울 수 있다”라고 말했다.
친박계로 분류되는 이완구 충남지사는 표대결로 가기도 전에 여론의 외면을 받을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1월에 나오는 안이 여론의 지지를 받으려면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실행력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공공부문은 물론이고 기업이나 학교 이전 같은 민간 부문의 경우 상당한 인센티브를 줘야 하는데 국가 재정이 지금 그걸 감당할 수 있겠나.” 이 지사는 세종시 수정안이 그대로 추진될 경우 혁신도시 추진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걱정했다. 효율성을 내세운다면 왜 행정부는 빼고 공기업만 (지방으로) 가야 되느냐는 반발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 정책 전반에 대혼란이 생기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대통령 몫이 될 것”이라고 그는 경고했다.
이처럼 친박 진영이 거세게 반발하고 나오는 배경에는 이번 세종시 수정 과정이 한편으로는 ‘박근혜 흔들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정운찬’이라는 충청 출신의 새로운 ‘잠룡’을 발탁해 전면에 내세우는 것도 그렇고, 박 전 대표의 제2의 정치기반인 충청권을 겨냥하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친이계 사이에서는 아예 ‘박근혜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부시장을 지낸 정태근 의원은 11월5일 대정부 질문에서 “2005년 당시 박근혜 대표가 충청표를 의식해 세종시 원안 처리에 합의해줬다”며 박 전 대표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역시 서울시 부시장을 지낸 정두언 의원은 “세종시 수정이 좌절될 경우 박 전 대표가 책임져야 할 것”이라며 비판에 가세했다.
다음 대선까지는 아직 3년이나 남았다. 하지만 세종시 문제로 촉발된 친이-친박 간 갈등이 단순한 치고받기 수준을 넘어서면서대선 국면이 한층 당겨지는 분위기다. 친이-친박 간 싸움이 과연 어디까지 갈지는 세종시법 개정안이 도마에 오를 내년 2월 임시국회가 최대 고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