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국토횡단 중이던 개그맨 이홍렬(58)을 만나서 두 번 놀랐다. 하나는 그가 ‘전직 연예인’이라는 것이다. “전 이제 연예인이 아니잖아요.” 그의 말을 들곤 그가 은퇴 선언을 한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실은 ‘지금 이 순간’ 연예인이 아니라는 진행형의 의미. 이홍렬은 얼마 전 출연하던 모든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오로지 성공적인 국토순례를 위해서였다. 예순을 앞둔 남자가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할 일의 목록)에 대처하는 자세란 그랬다. 또 하나는 국토종단이 이홍렬의 평생소원이었단 것이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마련한 행사에 홍보대사로서 ‘얼굴 마담’으로만 나선 게 아니다. 자신의 돈 1천만원을 종자돈으로 삼고 국토종단 과정에서 모은 금액을 더했다. | ![](http://www.joongboo.com/news/photo/201206/793363_831138_1416.jpg) | | |
이홍렬은 지난달 5일 부산을 출발해 경남 창원과 밀양, 경북 칠곡과 대구, 대전, 충북 영동과 청주, 충남 아산, 경기도 수원과 안산 시흥, 평택, 인천 등을 지나 4일 서울에 도착했다. 610㎞의 대장정이었다. ‘이홍렬과 함께하는 마음으로 걷기’란 이 행사는 아프리카 남수단의 어린이들에게 자전거를 전달할 목적으로 시작됐다. 모금액은 당초 목표인 1억원을 300%나 초과 달성했다. 30일 동안 모인 액수는 2억9천548만695원.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자전거 2천379대를 사줄 수 있는 돈이다.
이홍렬이 안산을 걷던 지난 1일 아침 길거리 한복판에서 그를 만났다. 도보 행진이 27일째 되던 날이었다. 때때로 말을 잇기조차 힘겨울 만큼 가쁜 숨을 몰아쉬는 탓에 인터뷰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는 이날 시종일관 ‘자전거’ 얘기뿐이었다. 2시간여의 인터뷰를 녹음한 파일을 풀어쓰고 보니 역시 그렇다. 이홍렬은 어떤 질문을 던져도 이번 국토종단과 연관된 대답을 할 만큼 온 신경을 거기에 쏟고 있었다. 이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철저한 단문’. 그러고 보면 가족도 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묵묵히 걸음만 내디딘 한 달, 스스로도 “먹고 자고 싸고 걷기만 했다”는 한 달만큼은 자전거를 위해 걷는 게 그에게 인생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육성에 묻어나던 고단함과 진정성을 조금이라도 전달하고자 되도록 어투를 살려 실었다.
#엘리베이터는 타도 될까요?
“부산에서 걸어왔다니까 어떤 분들은 제가 힘들어서 ‘어흐, 어흐’ 이러실 줄 아나봐.”
오전 10시 안산 부곡동에서 만난 그의 달변과 제스처에 함께 걷던 10여 명의 무리에선 종종 웃음보가 터졌다.
‘힘드시죠?’란 인사에 그는 “잠을 못 자나, 밥을 못 먹나…. 물론 아픈 데는 있지만 오전에는 자고 일어난 힘으로 걷고, 오후에는 힘들고 지쳐도 다시 새로운 힘을 주신다”며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으레 홍보대사라면 사진만 찍고 얼굴만 비추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홍렬은 그저 묵묵히 외로운 도보 행진을 이어왔다. 자전거를 후원한다는 기업이 있으면 몇 ㎞를 돌아 걸어도 반드시 들러 전달식을 갖고 기념 촬영을 했다. 중간 중간 기부특강까지 했다. 해질녘 숙소로 돌아온 후 식당에 갈 때조차도 차량은 절대 이용하지 않았다. | ![](http://www.joongboo.com/news/photo/201206/793363_831140_1420.jpg) | | |
차는커녕 엘리베이터를 탑승해도 되는 건지 고민했을 정도. 그는 “아프리카 아이들과 자전거를 기부한 사람들에게 떳떳하고 싶다”는 뚜렷한 소신을 밝혔다.
“나만의 원칙이 있어요.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걸어가서 밥 먹고, 차는 근처에 가지도 말자 했어요. 배나무 밑에선 갓끈 고쳐 맬 일이 아니니까. 중간에 차를 탔냐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이상해. 자, 조금만 타도 자전거 기증한 사람들한테 볼 낯이 없고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떳떳하지 못하고. 실제 걷는 체험을 하고 걷는 게 너무 힘드니까 아이들에게 희망을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가게 되는 거죠. 아니 그건 질문이 이상해. 말이 안 돼….”
#자전거는 시간을 벌어주고 꿈을 주는 일
이번 국토종단에 임하는 그의 마음가짐은 남달랐다. 27년 전부터 후원자로, 15년째 홍보대사로 활동해온 어린이재단에서 먼 길을 맨발로 걸어 학교에 다니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소식을 접한 그는 자전거 기부를 떠올렸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이홍렬의 마음으로 걷기’를 기획했다.
“아프리카 아이들이 먼 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짐승들 습격을 받거나 몹쓸 짓(성폭행)을 당하기도 한대요. 옷이나 먹을 걸 도와줄 수도 있지만 자전거를 주어 시간을 벌어주는 거예요. 자전거로 미래의 꿈을 심어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누군가를 돕기 위해 시작했지만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의 버킷리스트 중에서 가장 크고 이루기 힘든 일이 바로 국토종단이었다. 허옇게 덥수룩한 수염은 마침내 서울에 도착, 목적을 달성하리라는 그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부산을 출발한 이후 이날까지 수염은 단 세 번밖에 밀지 않았고, 이후에는 깎은 적이 없다.
“수컷들의 본능이기도 한데 목적을 이루기까진 난 수염을 안 깎을 거예요. 산악인들이 면도를 할 힘이 없어서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이 일은 반드시 이룬다는 거죠. 더불어 야생으로 돌아가 살아보는 거죠. 내 남은 인생에서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잖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일을 내가 이룰 확률은 적어져요. 내가 가거나 시체가 가거나 둘 중의 하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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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돗개 키우기, 집사람과 남해안 걷기
사실 그는 이번 종단을 위해 3개월 전부터 예비 훈련에 돌입했다. 태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나 40도에 가까운 뙤약볕 아래서 하루에 7~8㎞를 걸었다. 그 덕인지 물집도 잡히지 않은 건강한 두 발로 대장정을 이뤄냈고, 12일 아프리카 남수단으로 향해 어린이들에게 직접 자전거를 전해줄 수 있었다.
주변의 응원들도 그에게 큰 힘이 됐다. 어느 지역을 가든 어린이재단 지역본부의 직원이나 후원자들, 자원봉사 대학생들이 이홍렬과 함께 걸었다. 이홍렬이 실시간으로 트위터에 올린 글을 보고 이동경로를 추적해 찾아와 동행한 사람들도 있었다. 전유성, 전영록, 박민선, 송은이 등 연예인 동료들이 찾아와 직접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 전날 다녀간 허참만 이홍렬이 특별히 와 달라고 부탁한 연예인. “허참씨는 나를 키워주신 분이에요. 그 분이 왔다가야 나중에 이 날을 돌이켜보면서 얘기할 때 우리 사부도 왔다고 자랑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졸랐어, 형 언제 올 거야? 오셔서 조금 같이 걸어주세요 이랬지.” 매년 가족사진을 촬영할 정도로 애틋한 부부애를 자랑해 온 그답게 국토종단 기간 떨어져 있는 아내가 수시로 보내는 문자 메시지가 힘을 보탠 것은 물론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아내의 말’을 묻자 “헤헤헤” 웃음부터 보였다. “당신은…, 헤헤헤.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 왜 이렇게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냐는 얘기가 고맙더라구요.”
국토종단은 마무리 됐지만 이홍렬의 아홉 가지 버킷리스트를 향한 도전은 계속된다. 나머지는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소소한 것이라고 한다. 다음에 이룰 것은? ‘진돗개 키우기’다. 다른 소원 중엔 ‘집사람과 남해안을 걸어보기’도 있다.
이효선기자/hyosun@joongboo.com
사진=고승민수습기자/kkssmm98@
Tip
이홍렬에게 '국토종단'은?
“걷는다는 게 느리게 움직이지만 전해지는 마음의 깊이는 깊은 거예요. 솔직히 내 심정은 이제 빨리 끝을 냈으면 하는데, 한편으론 걷기만 하면 자전거가 마법을 부리듯이 한 대씩 생겨나잖아요. 경운기를 몰고 가던 농부가 되돌아와서 자전거 사는 데 보태라고 1만원을 주시고, 서른 명이 자전거 한 대값을 모아오기도 하고요. 순간순간이 놓칠 수 없는 감동이에요. 오면서도 참 많은 걸 배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