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와 분권에 관한 오래된 논의 중에 ‘큰 것은 효율적이고 작은 것은 민주적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잘 뜯어보면 정치철학적 입장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어렵지 않은 답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효율’을 따지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보수성향을 갖습니다. 이에 반해 ‘민주’를 따지는 사람들은 진보적 성향을 갖습니다. 참여정부에 비해 보수성향이 강한 이명박 정부에서 행정구역 조정을 위해 더 노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화성, 수원, 오산을 통합하는 문제로 지역사회가 여러 가지 잡음에 쌓여 있습니다. 우리의 행정구역이 ‘조선8도’를 근간으로 편제된 것이 1414년 태종 때의 일입니다.
이 기본편제는 1914년 일제가 손보기 전까지 500년이나 지속된 틀입니다. 15세기에 갖춰진 틀이 아직까지 큰 변화 없이 오다보니 당연히 현실에 맞지 않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벌써 15년 전부터 행정체계와 구역의 개편을 논의했고 1998년에는 매우 구체적으로 전국을 63개 권역으로 나누는 연구용역이 발표되어 언론에도 보도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이 문제는 논의조차 진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보적 학자를 중심으로 통합을 반대하는 분들은 ‘근린민주주의’와 ‘마을분권’을 이야기합니다. 이에 반해 통합을 찬성하는 분들은 행정의 효율성을 위한 불가피한선택으로 이야기 합니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사실은 다 맞습니다. 우리 행정이 추구할 일은 효율도 중요하고 민주주의도 중요합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체계에서의 광역화와 제도에서의 민주주의를 택해야 합니다.
광역화라는 것은, 16개 광역시도 체계의 해체를 전제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을 돌려서 하더라도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생활권과 정체성이 많이 다른 지역을 억지로 묶어놓은 현재의 광역행정구역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 졌습니다. 경기도 안성과 포천이 무슨 공동체적 정체성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경기도가 죽을 각오로 반대하고 방해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자치단체가 반대합니다. 자신들이 남에게 흡수된다는 별 의미 없는 걱정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에는 지역의 미래비전보다는 자신들의 자리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냄새가 나기에 그리 맑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은 지역은 상대지역을 강제로 합병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를 자제해야 합니다.
처녀가 대놓고 시집가기 싫다고 떠드는데 그걸 강제로 결혼하자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공정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처녀의 태도가 정말 지역민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한 것인지부터가 중요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처리하는 행정기구가 더 투명하고 더 공정한 잣대로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수원권 개편논의에는 이러한 투명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일이 있습니다. 의혹은 풀어야 신뢰를 쌓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서로에게 책임을 넘기는 자세에서 벗어나 나의 행동이 상대가 오해할 만한 일은 없지 않았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오산과 화성을 분리시켰을 당시는 누구도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권위주의 시절이라 대통령이 결정하면 그것이 곧 법이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허송세월을 보낼 수는 없기에 기준에 부합하는 제도를 만들어 그 제도에 따라 합병과 분할을 결정하면 그만입니다.
선구자들이 대체적으로 당대에서 실패한 데에는 그의 삶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 시대가 수용하기엔 너무 선진적인 사상을 설파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옳은 생각이라도 그 시대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요. 그것 역시도 선구자들이 맞게 되는 여러 개의 삶의 질곡중 하나라고 할 밖에요.
노민호 자치분권연구소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