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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김무성 대표 ‘애증의 10년’>

<박근혜 대통령-김무성 대표 ‘애증의 10년’>

2005년 인연…두차례 대선서 협력불구 미묘한 관계

세종시 이전문제 놓고 이견…완전한 관계회복 안돼

(서울=연합뉴스) 김경희 기자 = 새누리당 신임 대표로 14일 선출된 김무성 의원과 박근혜 대통령은 여러 갈래로 얽힌 인연을 맺어왔다.

김 대표가 이날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당대회 현장을 방문한 박 대통령의 연설 내내 박수 한번 치지 않으면서도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은 모습은 `애증‘으로 써내려온 두 사람의 10년 관계를 웅변한다.

당장 ’친박(친박근혜)‘ 주류인 서청원 의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방문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미묘함이 두 사람의 관계에는 터잡고 있다.

박 대통령이 두 번의 대선 가도를 완주하는 동안 김 신임 대표는 늘 지근거리에서 보좌해 왔다. 그러나 이후에는 늘 미묘하게 관계가 틀어졌다. 

박 대통령이 야당 대표 시절인 2005년 당시 국회 재정경제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 의원을 사무총장으로 발탁한 게 본격적인 인연의 시작이었다.

당시 당내 소장파가 김 대표를 겨냥해 ’인의 장막‘을 쳤다는 비판을 쏟아낼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가까웠다.

이후 2006년 대선후보 경선 캠프 구성 시기를 놓고 서두르자는 김 대표의 건의에 박 대통령이 부정적 입장을 내비치며 첫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김 대표는 박 대통령이 이명박 당시 대통령 후보에게 밀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실무를 총괄했다. 이어지는 2008년 18대 총선 ’보복공천‘ 과정에서 희생됐던 김 대표는 ’친박 무소속‘으로 당선되면서 명실상부한 ’친박좌장‘의 위치에 올랐다.

두 사람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2009년부터다. 

당시 ’친박(친박근혜)‘ 계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박 대통령은 ’로키‘ 행보를 이어가겠다고 했지만, 김 대표는 “할 말은 하겠다”며 계파색을 드러내겠다며 치고 나갔다. 박 대통령이 이에 대해 “개인 입장”이라고 선을 긋자 김 대표가 상당히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게다가 ’김무성 원내대표설‘이 비슷한 시기에 회자됐으나, 박 대통령의 반대로 김 대표는 결국 뜻을 접어야 했다. 

무엇보다 세종시 이전 규모를 놓고 원안을 고수한 박 대통령과 달리 김 대표가 ’7개 독립기관 이전‘을 골자로 한 수정안을 내놓고, 박 대통령이 이에 대해 “친박에는 좌장이 없다”고 일갈하며 애증의 골은 더 깊어졌다.

김 대표는 이후 친이계의 추대로 2010년 원내대표 자리에 오르면서 친박계와 소원해졌고, 2012년 사실상 친박계가 주도한 제19대 총선 공천에서는 또다시 낙천했다.


이어진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 대통령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접전을 벌이면서, 김 대표가 당시 선대위 총광선대본부장을 맡아 백의종군하면서 양측은 다시 ’공존공생‘ 모드로 돌아섰다.

김 대표는 이후 사실상 박 대통령의 암묵적 동의 하에 지난해 부산 영도 재선거에 출마해 5선고지를 달성했고, 최근 세월호 참사 이후 정홍원 국무총리의 후임을 찾는 과정에서 후임 총리 물망에 오르며 ’박근혜 리스트‘에서 아주 벗어난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번 전당대회 과정에서는 경쟁자였던 서청원 최고위원에게 사실상 ’박심‘을 실리는 듯한 모양새가 되면서 두 사람은 다시 불편한 사이로 ’한클릭‘ 이동한 셈이 됐다.

현재의 권력인 박 대통령과 ’미래의 권력‘, 즉 대망론을 품고 있는 김무성 대표의 `애증사’는 바야흐로 새로운 챕터에 진입했다.

yjkim84@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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