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성지 북수동성당 | ||
[경기일보 2008-6-18] | ||
정조대왕이 1800년 49세에 의문사하자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사교로 몰아 이듬해 1801년 천주교 4대 박해 중의 첫 번째인 신유박해를 일으키게 된다. 이때부터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 이전까지 90여년에 걸친 혹독한 천주교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다산 정약용(세례자 요한)은 이때 첫번째 유배지인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당하게 되고 다산이 설계한 수원화성 전체가 순교지로 변하게 된다. 경기도 및 서울 이남, 그리고 충청도 일대에서 체포된 천주교도들은 북수동성당 남쪽의 토포청에서 취조를 당했다. 당시는 양반, 천민 계급차별이 극심한 때였으므로 천주교인들 중에 양반 천주교인들은 종로사거리 앞의 화성행궁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고, 평민이나 천민들은 북수동성당 길 건너 서쪽편에 위치한 이아(화청관)에서 따로 심문을 받았다. 화성행궁은 정조대왕께서 수원능행 때 8일 동안 머무셨던 곳인데 최근 ‘대장금’과 ‘왕의 남자’ 촬영지로 외국관광객들에게 더 유명해진 곳이다. 그리고 이아(화청관)는 수원유수부의 차석 목민관이 행정업무를 보던 곳이다. 이아에서 천주교인의 목을 걸어 처형한 돌로 추정되는 형구가 발견되어 현재 수원성지 순례자들에게 전시되고 있다. 행궁과 이아에서 심문을 받고 토포청으로 돌아온 천주교인 중에 일부는 즉결로 백지사형과 교수형이 처해졌다. 백지사형은 얼굴에 창호지를 발라 숨을 못쉬게 해 숨지게 한 형벌이며, 교수형은 토포청에 많이 심어져 있었던 미루나무에 목을 걸어 숨지게 한 형벌이다. 나머지 천주교인들은 팔달문 서편의 6칸으로 된 형옥(감옥)에 수감되어 아사형(굶김)으로 순교했다. 팔부자 후손들의 말에 의하면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이면 토포청에서 “배교하라. 못- 하- 오-. 으 으 윽” 이런 소리가 귀에 더 또렷히 들려왔다고 한다. 나경환 북수동성당 신부 뽈리화랑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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