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재단과 어깨동부의 추억

글쓴이 : 팔공

사람은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1960년대 대구 인근의 팔공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하자 우리집은 그곳에서 여관겸 식당을 하게 되었다.

장사는 꽤 잘 되는듯했고, 나도 초등학교 3학년때, 대구에서 그곳의 인근 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아름다운 시골의 작은 학교였다. 그곳에서의 그야말로 '물장구치고, 다람쥐 쫒던' 3~4년간의 기억은 언제나 내게는 고향처럼 포근하게 남아있다.

당시는 도시와 시골의 편차가 컸던때라, 그때까지 그곳 친구들은 검정 고무신에 가방 대신 보자기에 책을 사서 다니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 보자기 가방을 남자애들은 어깨에서 가로질러 매었고, 여자애들은 허리에 둘러 매었는데 도시락의 김칫국물이 흘러 책을 버리기 일쑤였었다.

나는 대부분 머리를 박박깍았던 그곳 친구들과는 다르게 머리모양과 옷차림같은것들이 달랐던터라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그들에게는 생소한 서부활극, 중국무협영화 이야기를 쉬는 시간마다 해주었으므로 인기가 좋았고, 4학년때부터는 반장이 되었다.

5학년때로 기억되는 어느날, 선생님께서 부르셔서 교무실에 갔더니 웬 책을 두권주시면서 영부인께서 무료로 주시는 책이니까, 골고루 돌려보되 잘 간수하라는 것이었다.

그 책이 바로 어깨동무였다. 사실, 대구에 또래의 사촌들과 친구들이 많았고, 가끔식 래왕하며 영화도보고, 만화, 새소년같은 잡지를 늘, 접할수있었던 내게는 별일이 아니었으나,

그때까지 tv는 물론이고, 이렇다할 문화적인 접근이 쉽지않았던 그곳의 친구들에게는 어깨동무야말로 학교과정이외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수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특히, 남학생보다도 여학생들이 서로 빨리 볼려고 다투곤했는데 가끔식은 책이 없어져 곤욕을 치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나의 관점으로는 어깨동무는 참 재미없는 책이었다. 새소년같은 잡지들은 만화가 대부분이었는데, 어깨동무는 만화는 두편정도밖에 없었고, 주로 역사가 아니면 플루타크 영웅전, 세종대왕, 이순신등 위인들에 관한이야기, 또는 발명, 과학같은 딱딱한 내용들로 이루어졌었다.

그런데 그곳 친구들은 참 재미있어하는 것이었으며 나도 가끔씩 무료할때 보곤했는데, 그때 접한 과학적 상식, 동서양역사에 관한것들이 나도 모르게 쌓여 있슴을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느끼곤 하는 것이다.

특히, 외국영화같은것을 볼때 굳이 의식을 하지않더라도 어느나라, 어느시대, 어떤사건을 배경으로 제작된것인지 저절로 연결되는것이다. 이른바 내공인 셈이다.


그런 경험탓인지 요즘 나는 무슨 석사니, 박사니, 전문가니하면서도 한문은 물론이고, 기초적인 상식부문에 터무니없이 약한 요즘의 내 자식, 조카들을 포함한 20, 30대의 젊은이들을 보면 "컴퓨터 그만하고, 책좀 봐라, 책좀봐"라고 하는것이 입 버릇처럼 되어있다.

그리고, 초등학생들까지 '보리밟기' '퇴비증산' '산림녹화'에 동원되었던 그 어려운 시절, 비록 만화는 적었지만 다양한 읽을거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어깨동무를 시골 어린이들에게 보내준 육여사님의 마음이 이런것일까? 하고 가끔씩 생각해보는 것이다.

요즘, 육영재단이 그 운영권을 둘러싸고 소송이 벌어지는등 삐걱거리고 있다.

이해당사자및 관련자 입장에서는 각자 자신의 입장에 맞는 주의주장을 할수는있겠으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1. 전임 이사장이었던 박근령씨가 방만한운영과 편법운영등 갖은 잡음과 교육청 감사거부등의 사유로 감독기관으로부터 이사장 승인취소 처분을 받음.

2. 이에 박근령측 이의소송을 제기했으나 2007년 5월 대법원에 의해 이사장 취소처분 최종확정됨

3. 설립자의 다른 유족인 박지만씨의 추천으로 2008년 동부지법에 의해 이원우 신임 이사장및 신임이사선임

4. 사무국직원및 일부직원들 고용승계등을 요구하며 집단반발및 신임이사들의 출근저지등 실력행사.

5. 한편, 법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전 이사장 박근령, 사무국장 직함으로 출근투쟁, 이에 일부 노조원이 가세함으로서 정상적인 업무 사실상 마비됨.

6. 이후, 쌍방간 서로 물리력을 동원, 다툼으로서 일부 폭행사태까지 야기됨.

7. 박근령씨측은 이사장 선임취소를 모측의 육영재단강탈을 위한 음모에서 비롯된것이라 주장하고 그 배후로 박지만씨를 지목하기에 이르름.

8. 그리고, 이를 이슈화하기위해 최근 그의 부군인 신모씨와 함께 언니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모 지지자단체 모임에 참석, 조속한 사태 해결을 위해 박전대표의 개입과 중재를 골자로하는 취지의 협조를 요청함.

9. 이에 몇몇 자칭, 박지지자란들이 동조, 진실을 알리고, 원만한 사태수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마치 박지만씨측이 멀쩡한 육영재단을 탈취하기위해 친누님을 쫒아낸것처럼 주장하기 시작.

10. 이어, 사태해결을 위해 박 전대표의 개입을 적극 주장하는가하면, 집안의 화합도 이루지못하면서 어떻게 대권을 도모할수있나라는 취지의 주장까지하며, 박 전대표를 압박하기에 이르름.

11. 급기야 어저께는 박근령씨가 박지만씨를 주동자라 칭하며 기자회견까지하는 사태까지 벌어짐.

이상이 대충 살펴본 사건의 개요이다.

사실, 육영재단은 육여사님 사후 박 전대표가 이사장직을 승계했으나 박근령씨의 요구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박근령씨가 운영해왔었다.

그러나, 주지하시다시피, 방만한 운영과 편법운영등 관리미숙으로 재단의 재정은 날로 악화되기 시작했고, 특히, 지금의 남편인 신모 교수가 재단의 일에 관여하면서

전횡을 일삼아 일부 직원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고, 재단의 일부시설을 불법 임대함으로서 감독기관으로부터 이사장 취소처분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한편, 감독기관인 해당구청으로서는 재단을 정상화하고, 설립자의 취지를 받들기위해 다른 유족인 박지만씨와 상의할수밖에 없었고, 박지만씨 역시 어머니의 유지가 깃든 육영재단을 나 몰라라할수없었기에 그 정상화를 위해 적극 개입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비이락이랄까, 최근 재단소속의 일부 땅들이 개발로 인해 땅값이 상승될것으로 알려지자, 일부의 주장처럼 마치 그 재산이 탐이나 누이를 쫒아낸것처럼 비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핵심요지는 단 두가지로 압축된다.

박근령씨측의 주장처럼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감독기관과 박지만씨측이 짜고 자신을 쫒아낸것이냐, 아니면, 정당한 절차와 법에 의해 이사장 승인이 취소되었고, 그

조속한 정상화를 위해 관계기관으로서는 설립자의 다른 유족인 박지만씨와 상의했고, 박지만씨 역시 남다른 애착심에 의해 적극 개입할수밖에 없었느냐이다.

이른바, 박지만씨의 행위가 선의이냐 악의이냐인 것이다.

그 객관적 사실 판단을 위해 박근령씨와 박지만씨의 최근의 행보를 한번 살펴보자.

박근령씨는 오래전부터 사사건건 언니인 박 전대표와 마찰을 빚어왔다. 그 사례를 몇가지 살펴보면,

"어머니의 피 묻은 옷을 빨며 한없이 울었다" 라는 박 전대표의 말에 박근령씨가 "언니가 아니고 내가 빨았다"라고 반박한 일이 있었다. 누가한 행위던 통상, 집안의 일은 대외적으로는 '내가'라는 표현을 쓴다.

누구의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발언의 요지는 어디까지나 육여사의 죽음으로 한없이 슬펐다는 것을 강조한것임을 감안할때, 박근령씨의 발언은 일반의 상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또, 박 전대표가 MB측의 친박거세공천으로 정치적위기에 몰려 있을때, 그의 남편인 신모교수가 한나라당에 공천을 신청하는가하면, 그 스스로는 한나라당의 충북 선대위 공동 위원장을 맡아 그의 언니를 고사시키려는자들의 편을 든것에서 알수있듯이

그 이유야 어떻던 보통의 상식으로 보더라도 박근령씨는 정상적인 사고의 소유자가 할수없는 일을 버젓이 하는 사람인 것이다.

반면, 박지만씨는 주지하시다시피, 오랜기간의 방황을 끝내고 좋은 베필을 만나 결혼하여 잘살고있으며, 박 전대표는 물론이고 친인척등 주위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사업도 순조롭게 이어가고 있는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느 집안이던 배우자를 잘못만나거나, 사업실패등 스스로의 관리 미숙으로 형제들과 등지거나 누를 끼치는 사람들이 꼭 있다.

형제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모교수와 기어이 결혼한것에서도 보듯 안타깝게도 박근령씨가 그 같은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여지며, 형제들로서는 괴롭지만, 당장은 냉정한 결단을 내릴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위의 예에서보듯, 정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자주하며 그 형제들은 물론이고 그 부모님에게까지 자칫 누를 끼칠수있는 박근령씨와 그의 남편에게 형제로서 할수있는 것은 거리를 두는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혹자들은 형제 운운하며, 화해를 촉구하지만, 온 국민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형제들이 결혼식까지 참여를 마다할 정도라면 그 속사정인들 오죽하겠는가?

따라서, 이번일들은 어디까지나 박근령씨와 그의 부군인 신모씨의 방만한운영, 편법운영이 말썽이되어 관계기관으로부터 이사장 승인 취소처분을 받음으로서 빚어진 일이며, 운영을 제대로 했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일이라는 것이며, 박지만씨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굳이 잘못이 있다면, 부모의 유지를 받들어 자식의 도리로서 재단의 조속한 정상화를 위해 노력한것 뿐이며, 그 과정에서 상대의 물리력에 대항해 일부 물리력을 행사한것뿐인 것이다.

지금도, 신모교수는 박전대표의 개입과 중재를 압박하기 위해 박지지자들을 포함한 곳곳에 전화를 해대며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해줄것을 하소연하는것으로 듣고있다.

박근령씨와 신모교수는 진정 부모의 유지가 깃던 육영재단을 위하고, 정도원칙의 정치로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있는 박 전대표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당장, 그 같은 작태를 멈추고, 자신들의 잘못부터 되돌아 보기를 바란다.

육영재단에 의해 발간된 어깨동무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반듯한 국가관은 물론이고,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고, 독서습관을 기른 그 산골벽촌의 어린이들이 어느덧, 50이 훌쩍넘어 그때의 육여사님의 간절한 마음처럼 젊은이들을 걱정하는 나이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어깨동무를 보고자란 세대의 한사람으로서, 속히, 육영재단이 정상화되어 일찌기, 나라의 미래를 위해 그토록 애썼던 설립자의 숭고한 뜻이 계속 이어지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