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부인과 함께 방한을 해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공항에 나가 영접을 했다. 두 나라 대통령 내외가 나란히 환영대 위에 서고 네명의 어린이가 올라와 꽃다발을 바쳤다. 그러자 뤼브케 대통령이 호주머니에서 5마르크 은화 한닢씩을 꺼내 어린이들에게 주었다.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인자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육영수 여사는 1967년 3월에 방한했던 뤼브케 대통령의 그 모습을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하며 ‘신사 할아버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린이들과 악수를 하고 의례적인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닌, 평소와 다름없는 자세가 진솔한 공감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부산의 어깨동무 합창단이 청와대를 찾았을 때 한 어린이가 어느 학교 아무개라고 자기 소개를 하고는 “우리 교장 선생님은 새마을운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계십니다”라고 외친 일이 있었다.
육 여사는 어린이들을 인솔해온 송재관 어린이회관 전무―그는 육 여사 고모의 아들이다―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교장 선생님이 저렇게 외워 보내면 무슨 교육이 되겠어.”
그러나 곧 밝은 표정으로 어린이 앞에 가서는 “돌아가거든 교장 선생님께 나한테 말씀드렸다고 꼭 전해요. 알았지요”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어린이를 실망시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1972년 8월의 일이다.
육영수 여사는 사랑과 봉사를 가장 두드러지게 실천한 대통령 부인으로 꼽힌다.
나환자와 상이용사들을 돌보고, 낙도와 산간벽지의 어린이들을 청와대에 초청하고, 양지회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어 어린이 문화시설이 부족한 곳곳에 아동문고를 보내고 도서실을 지어주는 일들을 했다.
| ◇ 1965년 5월 18일 미국방문 중에 입양아 안아주는 모습. ⓒ 대한민국 정책포털 e영상역사관 캡처 |
일선장병과 파월장병 위문을 위한 봉사작업, 적십자활동 돕기 등등 갖가지 일들을 많이 해서 어찌 보면 특별한 사랑, 특별한 봉사라기보다 직업 같은 일상의 평범한 활동에 가까웠다.
외로운 곳을 외롭지 않게 하고, 사랑이 부족한 곳에 사랑을 채우고, 어렵고 힘든 삶의 현장에 용기를 불어넣는 것은 그들을 평범한 대한국민의 구성원으로 동참시키고자 하는 ‘평범한 사랑의 나눔’이었던 것이다.
육 여사는 대통령 남편을 따라 외국을 방문하면 으레 어린이 보육시설을 돌아보았다.
1964년 서독에 가서는 본 근교의 고아원을, 66년 동남아 순방길에서는 자유중국 화흥육아원을, 68년 호주에서는 메미리드육아원을 시찰했다.
대통령 부인의 공식행사이기는 했지만, 잘사는 나라들의 복지정책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고자 하는 현장학습이었다.
외국에서의 가장 가슴 아픈 일은 65년 미국에 가서 가난한 조국에서 보낸 입양아를 안아주었을 때였을 것이다. 입양아를 품에 안고 밝게 웃었지만, 가슴속의 격한 감정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외국에 나가 보면 국가의 가난을 더욱 통감하게 마련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은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전에는 외국방문을 하지 않겠노라 결심하고, 대한항공을 출범시키고도 70년대에 태극 마크가 달린 국적기를 한번도 타지 않았다. 그의 외국방문은 외국 비행기를 빌려 타고다닌 60년대에 아홉 차례뿐이었다.
대통령과 혁명의 주체들이 “우리가 무엇 때문에 혁명을 했는가?”라는 화두에 매달려 “나라 한번 살려 보려고” “5천년 배고픔의 한을 풀어 보려고”라고 입버릇처럼 자문자답하던 60년대에 육영수 여사는 혁명의 동반 책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남편, 혁명가의 아내라는 자의식은 육 여사의 온화한 웃음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지만, 생사를 함께 한다는 각오만큼이나 혁명의 성공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 ◇ 1973년 10월 2일 소록도 어린이들과 만남. ⓒ 국가기록원 |
육 여사가 남편이 대통령으로서 실망스러워 보일 때 하는 말이 있다.
“그러시려고 혁명하셨어요?”
이 말이 아마 대통령의 가장 아픈 데를 찌르는 ‘바가지’ 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육 여사의 사회활동은 이를테면 대통령 남편과의 역할분담 같은 것이었다.
육영수 여사의 비서실인 청와대 제2부속실에는 별에별 민원 편지가 쇄도했고, 발송 우편물도 그만큼 많았다.
우편물 배달이 많았던 지난날의 우체국은 소위 대통령 얼굴도 망치로 때리는 곳이라 했다. 우표에 소인 찍는 행위를 농으로 일컫는 말이다. 우체국 직원들은 그런 농담을 하다가도 진짜 청와대 발송 우편물을 다룰 때는 물론 실수가 없도록 임무 수행에 철저를 기했을 것이다.
청와대 우편물이 배 편도 드문 먼 낙도나 우체부가 자전거를 끌고 첩첩산중을 힘겹게 올라가야 하는 산간벽지로 보내지는 것이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낙도와 산간벽지에 우편물이 온다는 것부터가 그곳 사람들에게는 화제거리였던 시절이었다.
청와대 직원들은 처신을 조심하느라고 청와대 명함을 쓰지 못한 적도 있었다고 하지만, 육 여사는 낙도와 산간벽지, 그리고 나환자촌 등 소외된 지역에 우편물을 보낼 때는 반드시 청와대 글씨가 인쇄된 봉투를 사용했다.
특별한 봉투이지만, 외롭고 힘든 삶에 용기를 주어 국가사회의 평범한 일원이라는 생각을 갖기 바라는 특별하지 않은 사랑, 특별하지 않은 배려였다.
그 효과는 즉각 나타나 나환자촌에 청와대 편지가 온다고 알려지면서 나환자를 멸시하던 인근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평생토록 서울 구경 한번 가기가 어려웠던 낙도와 산간벽지에서 어린이들이 육 여사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는 일도 굉장한 뉴스거리였다.
그 시절에는 눈병과 머리 부스럼이 난 어린이들이 많아 청와대 의무실 의사를 불러 그 자리에서 치료토록 하고, 어린이들이 돌아갈 때는 학용품, 책들과 함께 꼭 의약품을 싸서 보냈다.
특별한 보살핌이라기보다 코 흘리는 아이들 코를 닦아주는 것처럼 육 여사에겐 그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나환자촌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대통령 부인이 찾아 주어 그지없이 고마운데, 흙감탱이 아이의 코를 닦아주는 것을 보고 그 어머니가 주저앉아 울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모든 일이 당시로서는 사회통념을 깨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런 부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나서 한 비서관에게 이렇게 술회했다고 전해진다.
“지만이 엄마는 나보다 더한 개혁주의자였어.”
육 여사의 사회활동은 대통령 부인으로서의 의례적인 봉사의 범위를 넘어 소외된 곳의 어린이들, 나환자들의 인권운동이며 대중을 향한 일종의 의식개혁 운동이랄 수 있었다.
인간 육영수에겐 대통령 부인 외에 또다른 사회적 신분의 명칭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사회운동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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