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쿠데타 반세기를 맞아 언론 사이에서 5·16과 박정희 시대를 각색하고 명백한 사실조차 노골적으로 흔드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각종 궤변도 등장했다. 박정희의 딸이자 차기 유력 대선 후보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대선 가도를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배경도 의심되고 있다.

▷JP 통해 무덤에서 박정희 불러온 조선·중앙일보=5·16과 박정희의 재평가 작업에 불을 당긴 것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였다. 조선일보는 무덤에 있는 박정희를, 그의 ‘5·16 분신’인 김종필 전 총리(JP)를 통해 깨워냈다. 조선일보는 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세차례에 걸쳐 김 전 총리의 인터뷰를 연재했다. JP 인터뷰만으로 기획된 5·16 특집이었다. 곧바로 중앙일보가 뒤따랐다. 중앙은 JP 인터뷰를 13∼14일 두차례에 걸쳐 실었다.

문제는 인터뷰 내용이었다. 철저히 JP의 5·16 거사 시점과 박정희에 대한 회고, JP와 박정희의 관계에 대한 추억담으로 일관돼있다. 조선·중앙의 JP 인터뷰엔 거사의 준비부터 돌입까지의 과정이 JP 입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돼있다.

조선일보 5월14일자 4면.

“박정희 소장을 혁명군 핵심지도자로 소개하자 장교들이 ‘와’하고 소리를 지르며 반겼다”(조선 12일자), “5·16 당일 장도영 참모총장이 그만두라고 야단했는데, 박 대통령은 장 총장에게 단호한 의지로 ‘우린 행동 개시했습니다’라고 밝혔지”(중앙 13일자), “장교들에 내가 ‘혁명한다, 장면 정부는 안된다. 같이할래?’ 하니 내 손을 꼭 잡고 ‘나를 빼면 되니’ 하는 거야. 장교들의 열정이 내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았어”(조선 14일자). 거사 자체를 숭고하게 미화하기도 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불사르고자 했다”(조선 14일자).

▷“가장 드라마틱한 반전” “혁명 구상한 장교들”=조선 중앙일보는 5·16에 대해 명시적으로는 5·16으로만 썼다. 하지만 JP의 육성과 그 사이에 들어간 기자의 질문엔 곳곳에서 ‘혁명’이라는 말이 묻어있다. 낯 뜨거운 대목도 등장한다. 중앙은 13일자 1면 기사에서 5·16에 대해 “한국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반전”이라며 “건국의 사명을 완수한 이승만 시대의 바통이 박정희 시대로 넘어가는 장면”이라고 추앙했다. 중앙의 이 표현엔 이승만과 박정희가 한국사의 대세일 뿐 4·19혁명은 찾아볼 수 없다.

조선일보 5월14일자 6면.

중앙은 인터뷰 때 만난 박정희의 분신 JP에 대해 “역사의 무게가 쌓여도 ‘혁명가의 시선’은 그때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중앙은 JP에게 “지금도 젊어 보이시는데 그 때가 30대였죠”, “그 나이에 어떻게 역사의 변화를 기획했는지”, “혁명을 구상한 장교들은 박정희의 어떤 점에 반했을까요”라고 질문했다.

JP 인터뷰의 문제는 역사적 사실을 쿠데타 주도세력의 관점에서만 서술했다는 점에 있다. 중앙은 13일자에 “5·16은 서민이 지지한 혁명…상층에 있던 사람들은 반대했어. 일반 서민들이 은연중에 세상의 변화를 원하고 있었지”라는 JP 말을 실었다. 이는 쿠데타 세력의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역사해석이자, 왜곡에 가깝다. 실제 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윤보선은 15만6000여 표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JP의 서민은 대체 누구인가.

또한 쿠데타 당일 방송국을 접수하고 아나운서로 하여금 원고를 읽게 한 행위를 극적으로 묘사한 대목도 있다. 쿠데타 세력이 5·16 당일 남산 KBS(중앙방송국)를 접수한 것에 대해 중앙일보는 “혁명은 선전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JP는 꿰뚫고 있었다”고 미화했다. JP는 인터뷰에서 “(박 아나운서가) 처음엔 조심스럽더니 읽어 내려가면서 점차 흥분을 하는 거 같더라고, 허허”라고 말했다.

▷5·16 성격 규정이 안됐다니…=조선 중앙일보의 JP 인터뷰에 이어 이번엔 다른 신문들이 나섰다. 이들은 더 대담했다. 언론사에서 5·16을 뭐라 부를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국민일보는 16일자 5면 기사 제목을 “오늘 5·16 50주년…평가는 아직도 논쟁 중 혁명이냐 쿠데타냐”라고 뽑았다. 이어 “50년 세월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는 5·16에 대한 성격 규정에도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며 “‘쿠데타’와 ‘혁명’이 여전히 맞부딪친다”고 주장했다. 세계일보도 같은 날 기사에서 “5·16에 대한 명칭부터 엇갈린다”라며 “여론의 대세는 쿠데타이나, ‘혁명’을 고집하는 보수 일각의 목소리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5·16은 투표로 선출한 정부를 총칼로 전복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한 쿠데타’라는 것은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이며, 실제로 이들은 무장한 채 청사와 주요기관을 접수했다. 이걸 ‘혁명’이라 할지 ‘쿠데타’라 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고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오른쪽)와 장도영에 대해 합동통신이 당시 촬영한 사진.
@연합뉴스

▷”박정희는 민주주의 건설자… 애국독재…” 춤추는 궤변들=5·16 성격을 다시 규정하겠다고 사실 자체를 흔드는 것 외에도 언론엔 각종 궤변이 등장했다. 중앙일보의 자매지 중앙데일리는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와 김호기 연세대 교수의 대담을 실었다. 조 대표는 5·16과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박정희가 주도하고
기업인과 과학자가 따라와 산업화가 됐고, 그걸 통해 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된 것…민주주의 파괴자가 아닌 건설자…”, “박정희는 중산층을 많이 만들었는데 부마사태도 그들이 일으켰고, 그런 시위가 김재규에게 영향을 줘 박정희는 피살됐다”, “박정희는 자기 성공의 희생자였다”.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도 16일자
칼럼에서 “박정희 개발독재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시초였다”며 “박정희는 청렴했으며 그의 독재는 공동체를 위한 개발독재였고 나라를 지킨 애국독재였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우상화에 가까운 일련의 모습은 결국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대선 길닦기라는 지적을 살 만하다. 총선은 1년도 채 남지 않았고, 대선은 1년 반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