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5/3 업데이트)_ 경향신문
뉴스 인물 따라잡기 2011/05/19 15:40
2011
5월
4월 재보선이 끝난후 한나라당내 구도가 3파로 나뉘었습니다. 재보선 실패의 책임을 떠안은 친이계의 세는 약해지고, 소장파&비주류계와 친박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친박 중진 홍사덕 의원은“분당이 강요되고 불가피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승부하는 거고, 그 경우에도 나는 (대선에서) 이길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 특사로 유럽을 방문중인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지난 5일 그리스 아테네 현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뢰와 원칙이라는 무형의 인프라를 구축하지 않으면 절대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 “저를 가리켜 ‘답답하다. 왜 그렇게 고집이 세냐’고 하고 ‘원칙공주’라는 얘기도 듣는다. 원칙과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키려는 것을 ‘손해도 많이 볼 텐데 왜 저럴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며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갈등들이 상식적으로 조정돼야 한다. 갈등이 안 풀리면 나라가 제대로 발전하겠는가”라며 “상식적으로 갈등이 잘 조정되려면 정치권에서 원칙과 신뢰를 잘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표가 특사방문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그의 행보에 시선이 쏠렸습니다만, 여전히 그의 화법은 신중합니다.
친박계 의원들은 목소리를 높이면 계파싸움으로 비치거나, 당내 권력 장악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일까봐 우려하면서도 소장파들의 쇄신움직임을 측면지원하고, 친이계의 반격에 일침을 놓으며 당내세력 재편에 일사불란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표가 유럽방문중 '사회적 자본'을 선진국 진입의 핵심조건으로 제안했는데요.건국대 최배근 교수(경제학)가 <'박근혜표' 사회적 자본>에 대해서 짚었네요.
5/13 [경제와 세상] ‘박근혜표’ 사회적 자본
박근혜 전 대표가 소망하는 신뢰와 사회적 자본의 구축 그리고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려면 역설적으로 자기 뿌리를 부정해야만 가능한 이유다. 사실, 사회적 자본의 함양과 고(高) 신뢰사회의 구축은 이명박 정부가 선진화 달성을 위해 5대 국정지표의 하나로 제시한 목표다.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나라가 선진국가로 한 단계 발전하려면 사회 곳곳에 있는 불공정을 공정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지만 지금 그 결과는 얼마나 공허한가? 박정희와 박근혜를 분리할 수 없다 해서 연좌제를 적용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 특권구조의 혁파에 대한 청사진이 보이지 않는 한 ‘박근혜표’ 사회적 자본 역시 허망한 구호로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MB-박근혜 언제 만나나' 주중·월말說이 분분한 가운데, 지난 16일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입지가 최종 선정되고 난 뒤, 또 다시 박근혜 전 대표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지역분열 회오리에 휘말릴라 '침묵 모드'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4월
27일 재보선을 앞두고 박근혜의 지원사격을 바라는 후보들이 줄을 섰지만, 박근혜는 "재보선에 개입 않는다"며 거부했습니다.
결과는 한나라당의 참패였습니다. 여당 내에서 박근혜의 입지가 다시 올라갑니다.
재보선에 진 여당은 박근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유럽을 방문하는 박근혜를 취재하기 위해 무려 24개 언론사가 동행하는 진풍경이 벌어집니다.
3월
영남권 신공항 문제로 다시 정국이 뜨거워졌습니다. 박근혜의 지지기반인 영남권이 걸린 문제입니다.
모두 박근혜의 입만 쳐다봅니다.세종시에 이어 또다시 이명박-박근혜 사이에 대립선이 그어집니다.
[신율의 시사난타] 신공항, 재보선, 그리고 대선구도
이대통령은 국익을 내세워 '백지화' 방침을 발표했고, 박근혜는 "계속 추진해야 한다"고 날을 세웠습니다.
2월
'박근혜표 복지'에 대한 이야기가 무성합니다. 박근혜의 '한국형 복지'가 노무현 정부의 복지노선과 닮았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물, 저출산과 관련된 이른바 '박근혜 테마주'가 급등하는 현상까지 일어납니다.
박근혜는 복지논쟁 와중에 "왜 복지를 꼭 돈으로만 보냐"며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를 질타합니다.
"구제역 2차 오염도 큰 걱정거리"라며, 전국을 강타한 구제역 피해를 경시하는 듯한 정부를 에둘러 비판합니다.
그러자 이재오 특임장관은 박근혜가 "대통령 다 된 듯이 군다"고 비난합니다.
1월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구시당 여성당원들 행사에서 "토끼는 남이 낸 길보다 자신이 만든 길로만 다닌다"고 했습니다.
MB와 갈라져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의중을 비친건지, 해석이 분분했습니다.
홍준표 최고위원은 이번에도 "박근혜 시대가 얼마나 오래갈지 보겠다"며 어깃장을 놨습니다.
이재오 특임장관은 또다시 '군사정권의 폐해'를 강조하며 박근혜를 겨냥하는 듯한 발언을 했습니다.
연초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박근혜는 40%대 지지율을 기록했습니다. '대세론'이 강해집니다.
[이택광의 왜] 박근혜 대세론
"정치가 국민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곧고 바른 정치에 온 힘을 다하겠다"
박근혜의 신년화두는 "곧고 바른 정치"인 모양입니다.
2010
접기
12월
한나라당 예산안 날치기 파동이 정국을 뒤흔들었습니다.그러나'날치기 정국' 동안, 원칙주의자라던 박근혜는 침묵했습니다.
[사설] 막판 종편잡음과 박근혜의 침묵
[강병한의 '여의도 정치탐험']박근혜 '침묵정치'의 이면
박지원 민주당 전 대표는"유리할 때만 고개를 쳐든다"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여론도 "박근혜는 날치기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는 쪽이 압도적입니다.
박근혜는 아랑곳 없이자신만의 '복지' 노선을 내걸고 대권행보를 가속화합니다.
박근혜 '한국형 복지구상' 공개
박근혜 싱크탱크 '미래복지연' 27일 출범
[강병한의 '여의도 정치탐험']박근혜의 싱크탱크 김광두 원장
[시론] '박근혜표 복지'가 박수 받으려면
홍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친박계의 '박근혜 우상화'가 지나치다고 일갈했습니다.
11월
박근혜가 G20 정상회의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만나 '통일'에 대한 덕담을 주고받았습니다.
한나라당 안팎에서 '감세'를 지속할 것이냐 철회할 것이냐를 두고 거센 논란이 일었습니다. 박근혜는 철회론을 펼쳤습니다.
10월
1일 청와대 회동에서 MB와 박근혜가 만났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정부의 성공을 위해 건배"하자는 박근혜의 건배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정치드라마 <대물>이 인기를 끌면서 박근혜에 다시 세간의 이목이 쏠립니다.
박근혜의 비키니사진까지 화제가 됩니다. 박근혜는 모교의 지면광고 모델로도 등장합니다.
9월
친이계 의원들과도 회동을 갖는 등 대권 행보에 다시 시동을 겁니다.
국회에선 이재오 의원의 '90도 인사'가 화제가 됐죠.
7월~8월
여성 아나운서를 모독한 성희롱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강용석 한나라당 의원이 박근혜 전대표를 가리켜 "애도 안 낳은 날씬한..."이라며 원색적으로 표현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박근혜는 '여름나기 인증샷' 등의 트윗을 통해 인기 트위터러로 자리매김합니다.
초선의 이학재 의원이 박근혜 비서실장이 됐습니다.
박근혜는 8월 15일 육영수 여사 추도식에서 "공동체 마음, 약자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다"며 우회적으로 MB를 비판합니다.
6월
2일 지방선거가 치러졌습니다. 한나라당의 참패였습니다.
정몽준 대표는 당내 입지가 추락한 반면,한나라당이 패배한 선거 때마다 그랬듯이박근혜는 위상이 올라갑니다.
하지만 박근혜 지역구인 대구.달성에서도 한나라당 후보가 패했기 때문에 손익계산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습니다.
세종시 수정안은 다시 '원위치' 됐습니다. 이것은 박근혜의 승리로 기록됐습니다.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되자 박근혜 지지율은 곧바로 올라갔습니다.
박근혜는 "정부가 국민화합을 위한 배려에 소홀했다"면서MB정부의 실정에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30일 박근혜는 트위터를 시작하면서, '트위터 정치, 소통정치'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3~5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박근혜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습니다. '침묵대응'이 길어지자 해석만 분분합니다.
드디어 입을 연 박근혜는 다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합니다.
정운찬 총리는 "잘못된 약속도 지키려는 '여자'가 있다"며 박근혜를 비판했다가 거센 역공을 받습니다.
박근혜 지지율은 한때 30%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30%선을 회복합니다.
정작 박근혜는 '복지가 중요하다'면서도 지방선거 최대 화두로 떠오른 무상급식 이슈에 대해선 묵묵부답입니다.
"선거는 당 지도부 중심으로 치러야 한다"며 당과도 거리를 둡니다.
1월~2월
해가 바뀌었어도 세종시 갈등은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세종시 수정안에 박근혜가 정면 반발하고 나오면서,MB와 박근혜의 대립은 극으로치닫습니다.
한나라당정두언 의원은 박근혜가 "제왕적 총재보다 더하다"고 비판합니다.
박근혜가세종시 정국을 승부수로 삼았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왜...]박근혜 '절박한 약속'의 의미는?
정몽준 대표가 박근혜를 비판하면서, 갈등구도는 '박-정'으로 확산됩니다.
[왜...]당정 핵심들 동시다발 박근혜 때리기
이명박 대통령은박근혜를 겨냥한 '강도론'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킵니다.
박근혜는"강도가 집안사람이라면"이라며 반박합니다.
그 사이이명박-박근혜 지지율은 동반하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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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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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월
세종시 갈등은 점입가경으로 치닫습니다. 박근혜는 '원안 플러스 알파'라는 입장을 고집합니다.
이-박, 물러설 수 없는 '세종시 충돌'
한나라 "박근혜를 어쩌나" 속앓이
“세종시 묻지 마세요”…박근혜‘원안+α’ 고수 의지 재확인
김장 담그는 박근혜/ 우철훈 기자
[인물로 본 2009 정치] 박근혜
10월
재보선을 앞두고 '세종시 논란'에 불이 붙었습니다. 박근혜는 재차 '원칙주의'를 내세워 이대통령을 공박합니다.
뜨거운 세종시... 박근혜 발언 파장
26일, 박정희 전대통령 30주기를 맞아 국립현충원을 찾은 박근혜가 직접 유족인사에 나서 '복지국가론'을 설파합니다.
이어진 28일 재보선은 역시 한나라당 참패. 다시 드러난 박근혜의 힘....
[세상속으로] 박근혜와 메르켈
6월~8월
'제2의 촛불정국'이라 할 '추모정국'이 계속되는 가운데, 6월 30일 박근혜는 몽골로 떠나버립니다.
[경향의 눈] 박근혜의 침묵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 내에선 단골메뉴처럼 다시 '박근혜 역할론'이 부상합니다.
미디어법 총대를 멘 한나라당 의원들은 '박근혜 변수'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보수우익이 보수파의 좌장 격인 박근혜를 향해 "미디어법에 반대하려면 탈당하라"고 비난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그러나 이 '미디어법 파동'에서 박근혜마저 날치기 통과에 가담함으로써,박근혜의 원칙주의는 다시한번 무너집니다.
10월 재보선을 앞두고 당내에선 다시 박근혜가 부상하지만, 대중적인 지지율은 하락합니다. '박근혜 거품론'이 나옵니다.
5월
재보선 참패 후폭풍으로 한나라당 내에선 '쇄신론'이 힘을 얻습니다. 키워드는 '박근혜'입니다.
"쇄신, 실천이 중요" 박근혜 불쾌감
이후에도 그렇지만, 이 시기 박근혜의 존재감은, 야당을 잊혀지게 만들 정도로 컸습니다.
[이대근 칼럼] 박근혜를 잡는 법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5일 미국 출국에 앞서환송나온 맹형규 청와대 정무수석과 악수하고 있다. /우철훈기자
박전대표, 어린시절 사진 19장 공개
이달 21일 한나라당 원내대표 선거에서 친박계가 낙선하자 박근혜 측은 친이계와 더 냉랭해집니다.
그리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라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MB지지율이 떨어지는 가운데, 박근혜는 정국의 책임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있다며 거리를 둡니다.
4월
29일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은 참패를 합니다. 친이계는 책임론에 직면했습니다. 이번에도 최대 승자는 박근혜입니다.
박근혜는 여전히 "드릴 말이 없다"며 '조용한 행보'를 이어갑니다.
3월
박근혜의 '원칙주의'가 구겨졌습니다. '문제법안'들 처리에서 국민과의 공감대가 중요하다던 그는, 이번엔 한나라당 내 강경론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최대 쟁점은 MB와 여당의 언론장악을 위한 미디어법이었습니다. 국민적 공감대라는 원칙을 포기한 대신, 박근혜는 의회 내에서 '힘'을 과시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2월
박근혜는 "쟁점법안일수록 국민의 공감대가 중요하다"며 MB를 재차 비판합니다.
그리고 박근혜의 '이미지 정치'는 계속됩니다.
어릴적 스케이트를 신고 있는 사진. 박근혜가 공개한 겁니다.
하지만 '정책보다 이미지'를 내세운 박근혜식 정치에 대해선 비판론도 만만찮습니다.
[정동칼럼] 위험한 '박근혜 현상'
1월
박근혜는 "문제가 있는 법안들이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고 한나라당 친이계와 이명박 정부를 질타합니다.
연초부터 터져나온 발언에 친이계는 들끓습니다.
접기
2008
접기
12월
이명박 집권 첫해... 박근혜와의 갈등은 깊을대로 깊어졌습니다. 연말정국도 냉랭합니다.
진정성 없는 이대통령의 언행에 박근혜의 분노 지수가 몹시 높아진 거죠. 당내에서도 이대통령을 향한 불만이 솟구칩니다.
[이대근 칼럼] 이명박의 '박근혜 딜레마'
대선 승리 1년... '친박' 빠진 반쪽 기념식
11월
침묵을 깬 박근혜는 경제정책을 들어 이명박 정부를 맹공격합니다.
수도권 규제완화 정책에서도 정부를 정면 비판합니다.
여당 일각에선 박근혜 중용론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10월
박근혜의 인기는 여전히 상종가입니다.
박근혜 미니홈피 방문자 800만명 돌파
하지만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당 지도부의 지원 요청에 박근혜는 묵묵부답입니다.
9월
이명박계의 압박, 정몽준의 부상 속에 박근혜는 예의 '신비주의 행보'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물밑에서 '소리소문 없이' 보폭을 넓혀갑니다.
7월
한나라당 지도부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마침내 친박계 복당을 허용합니다. 박근혜의 힘겨운 승리입니다.
5월
그리고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허용을 계기로 '촛불 정국'이 시작됩니다.
박근혜 "미 쇠고기 수입, 국민불안 풀려면 재협상해야"
박근혜, 이번엔 미국에 "광우병 발생시 수입 중단토록 허용하라"
[사설] 박근혜조차 질타한 '쇠고기 색깔론'
4월
9일 총선은 여당인 한나라당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거기엔 '박근혜의 힘'이 컸습니다. 역시 '선거의 여왕'이었습니다.
영남권 '非한나라 친박' 매서운 돌풍
누구도 못 막은 박근혜의 힘... 한나라 '키' 잡나
박근혜는 총선 공천파동으로 탈당한 친박계의 '복당'을 요구하고, 한나라당 친이계 지도부는 이를 거부하면서 갈등이 이어집니다.
박근혜 "친박 복당시키면 7월 전당대회에서 대표직 출마않겠다"
3월
이른바 '친박연대'가 공고해지면서, TK권 '친박 정서'에 한나라 친이계는 불안해합니다.
'친박연대' 당명놓고 한나라와 신경전
공천 싸움에 빈정상해 칩거에 들어갔던 박근혜는 다시 정치활동에 나서며 이명박 측을 압박합니다.
친이-친박의 싸움으로 시작된 공천 갈등은 친이계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비화하면서 균열로 치닫습니다.
박근혜 "당분간 미니홈피에 글 못 올릴 것 같다"
박근혜 비방댓글 달며 여론조작한 한나라 당원 기소
'박근혜 총선'? 총선앞두고 박근혜 인기 상한가
한나라당 박찬숙 의원(가운데) 등 수도권 및 영남권 총선 공천자들이 23일 여의도 당사에서
이상득 의원의 용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문석기자>
1월
11일 이명박 당선인과 박근혜가 만났습니다. 대선 후보경선에서부터 '본선'에 이르는 기나긴 과정에서 쌓인 앙금이 남은 듯, '어색한 만남'이었습니다.
이 만남 뒤에도 총선 공천을 둘러싼 친이계-친박계 갈등은 더욱 심해지기만 합니다.
박근혜 "지켜보고 있다" 이명박측 압박
돌아온 박근혜... 한나라 공천 싸움 고비
한나라 '공천게임' 한 달... 박근혜의 득실은?
접기
2007
접기
12월
6일 유세에서 박근혜는 "BBK 문제는 검찰 조사로 끝났다"며 본격적으로 이명박을 돕습니다.
10일에는 첫 'TK 유세'를 하며 이명박 지지를 호소합니다.
이회창은 "당선되면 박근혜와 공동정부를 구성하겠다"며 박근혜 자택을 잇달아 방문하지만 한나라당 전 대표로서 이명박을 지원하기로 한 박근혜의 '원칙'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한번 입장을 정한 박근혜는 '대선 이후'를 내다보며 입지 굳히기에 들어갑니다.
마침내 19일 대선에서 이명박이 당선됐습니다. 박근혜는 고비때마다 이명박을 구해준 1등공신으로 꼽혔습니다.
경향신문은 이 해의 인물로 박근혜를 선정했습니다.
11월
이회창이 다시 대권도전을 선언합니다. 박근혜가 이명박을 떠나 이회창 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까, 이 경우 어떻게 될까 추측이 분분합니다. 한나라당 안에선 박근혜를 화나게 한 이재오의 거취를 놓고 분란이 일어납니다.
박근혜는 '칩거'를 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이재오는 결국 최고위원에서 사퇴합니다.
'칩거' 뒤 생각을 정리하고 나온 박근혜는 "이회창 출마는 정도가 아니다"라고 못박습니다.
30일 전남 무안, 해남을 방문한 박근혜는 '이명박'을 두 차례 거론하며 첫 지원유세를 합니다.
10월
이명박 측의 끈질긴 설득 끝에선대위 고문직을 수락하며 '백의종군'에 나서지만 거리가 쉽게 좁혀지진 않는군요.
특히 이명박의 최측근인 이재오가 박근혜의 산행을 가리켜 '경선이 끝나지 않은 듯이 군다'는 발언을 해, 박근혜 쪽의 분노를 샀습니다. 며칠 뒤 이재오의 사과로 일단락되긴 했지만 이 갈등은 이명박 집권기간 내내 계속됩니다.
9월
경선 후유증은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21일 추석 연휴, 박전대표는 '집에서 조용히'보내며 이명박측 대선캠페인과 거리를 둡니다.
대구를 찾아가서는 "더 나은 정치로 보답하겠다"며 자신만의 행보를 이어갑니다.
8월
이-박 과열경쟁은 당내경선 '돈선거' 파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열띤 경쟁 끝에 치러진 20일 경선에서 이명박이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확정됐습니다.
패배한 박근혜는 '깨끗한 승복'으로 경선전의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7월
한나라 대권후보 경쟁 속, 유력후보들의 공약도 속속 심판대에 오릅니다. 이명박 측은 '대운하 공약'이 가장 거센 도전을 받았습니다. 박근혜 측은 성장우선론을 답습한 채 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과소평가한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또 박근혜식 감세론은 이명박 공약 못잖게 '가진자들에게만 유리한 감세정책'이라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박근혜의 사람들 "같이 살고 같이 죽는다"
박근혜는 "검증을 못해서 대선에 패하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며 이명박의 도덕성을 계속 공격합니다.
이명박 일가가 가진 땅의 시가총액이 2300억원대라고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박근혜의 입'이라 불리던 전여옥의원은 공개적으로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고 옮겨갔습니다.
박근혜는 유신체제 피해자들에게 사과해놓고도 "5.16은 구국혁명이고 유신체제는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습니다. "전두환이 6억원을 주기에 생활비로 받았다"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공개했습니다.
6월
당내 경선이 실시되는 6월이 되자 이-박 싸움은 점입가경으로 치닫습니다.
이명박 'BBK 의혹'이 터져나오고, 박 측은 공세를 강화합니다.
朴 “BBK 연루 확인” 李 “정치공작 법적대응”
11일 양측은 당내 경선에 후보로 공식 등록하고 '퇴로없는 전쟁'을 시작합니다.
같은 날 박근혜는 "아버지 시대에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사과한다"며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간의 화해'에 나섰습니다.
28일 박근혜측은 "이명박은 전과 14범"이라는 유명한(?) 주장을 펼칩니다.
5월
이-박 갈등은 터지기 직전 간신히 봉합됩니다. 대놓고 싸웠다간 모두 손해라는 인식이 컸던 거겠죠.
[사설] 한나라 내분, 봉합은 됐다지만...
그러나 경선에서 '여론조사 결과'도 반영할 지 등을 둘러싼 갈등은 쉽게 가라앉지 않은채 골이 깊어갑니다.
강재섭 대표가 중재안을 내놨지만 박근혜 측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박근혜 탈당론'까지 거론됩니다. 결국 이명박 측이 한발 양보합니다.
그랬더니 이번엔 '검증위원장 영입'을 놓고 양측이 다시 맞붙습니다.
박근혜 측은 '6조원 감세' 계획안을 내놓습니다. 이-박 양측 모두 세금을 줄이겠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4월
미국 방문 때 대북 포용정책을 얘기했던 박전대표는 4일 "북한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초강경 자세를 보입니다. 그러면서 박전대표는 '3단계 통일론'이라는 걸 내놨습니다.
증권사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주가 3000시대도 가능하다"며 이명박 못잖은 낙관론을 펼칩니다. 또 "규제는 모두 풀겠다"며 경제공약들을 줄줄이 내놓습니다.
하지만 25일 재보선에서는 한나라당이 참패하면서 박근혜, 이명박 모두 낯이 깎였습니다.
이후 한나라당에선 이명박계 전여옥의원 등이 강재섭 대표의 사퇴를 주장하면서 권력투쟁이 가시화됩니다. 핵심은 결국 대선후보를 결정하는 룰에 대한 것이었죠.
3월
연초부터 계속된 이-박 양측의 '검증공방'은 갈수록 강도를 더해갑니다. 박전대표는 이명박 전 시장의 '도덕성'을 문제삼아 검증을 해야한다는 입장인 반면, 이 전 시장측은 "내분만 가중시키는 것"이라며 반발한 거죠. 박전대표는 "후보의 재산, 병역, 사생활도 검증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양측은 당내 후보경선 룰을 정하는 과정에서도 공방을 이어갑니다.
논란 와중에도 이명박 우위는 계속됩니다.
대권구도에 불만을 가져온 손학규 의원은 한나라당에서 탈당합니다.
2월
13일 미국 하버드대를 방문한 박전대표가 대북관에 대한 연설을 합니다. 집권하면 북핵문제를 최우선에 둘 것이며, '원칙 있는 포용정책'을 펼치겠다는 겁니다.
박전대표의 '이념적 편향'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집니다.
이명박은 중도, 박근혜는 가장 보수적
박근혜 "나는 중도다"
어찌 됐든 박전대표의 대선 행보는 계속됩니다.
박근혜의 용인술은 '믿음과 원칙'
박근혜 지지모임 '한강포럼 8일 출범
박전대표는 5일 "집권하면 7% 경제성장을 달성하겠다"며 '경제대통령'을 내세운이명박 전 시장에 맞섭니다.
인혁당 사건이 새삼 도마에 오릅니다. 당시의 긴급조치 판결에 관여한 판사들의 명단이 공개된 것입니다. 그러자 박전대표는 "나를 겨냥한 탄압"이라고 주장했고, 반면 박정희 독재에 맞서 싸웠던 김근태 의원 등은 "그것이 어떻게 탄압이냐"고 반박했습니다.
1월
노무현 대통령이 '4년 중임제' 개헌안을 들고나오자 박전대표는 "지금은 개헌을 얘기할 때가 아니다", "참 나쁜 대통령"이라며 직설적으로 비난했습니다.
[대선주자 인터뷰]박근혜 “개헌공방은 소모적…민생구출 급해” 1월 11일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하지만 인터뷰에 나타난 박전대표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는사회통합 유연성과 포용력이 부족하다는부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았습니다.
3일 박 전대표는 "한국의 대처가 되겠다"며 대권 도전 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명박 시장보다는 박전대표 쪽이 대권가도 초반에는 더 보폭을 빨리 하는 양상이었습니다. 우먼타임스 등의 여론조사에서는 '한국의 파워우먼 1위'로 선정됐습니다.
이 시기의 박전대표는 헤어스타일 하나만 달라져도 뉴스가 될 정도로 초미의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생 근령씨가 이사장으로 있던 육영재단이 이사진 사임 등의 내부파동을 겪으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김민아 칼럼] 박근혜와 '강한여성론'
1월 말이 되자, 이명박-박근혜 간 '후보검증'을 둘러싸고 공방에 날이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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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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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시간이 갈수록 '이명박 대세론'이 굳어집니다. 당 대의원들 사이에서도 박전대표는 이명박에 밀리는 양상입니다.
이명박 지지율 41%· 한나라도 50% 넘어
7월
11일 한나라 당대표 경선에서 강재섭 의원이 당선됐습니다. 일단은 박근혜의 승리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치열한 '이-박 대리전'이 벌어졌고, 이는 당의 극심한 균열을 불러옵니다.
차기 대권후보로는 이명박 시장이 박전대표를 누르고 점점 부상합니다. 박전대표는 '노무현 심판론'을 내세우며 대여 공세를 강화합니다.
6월
지방선거 승리 뒤 한나라당 내에선 이명박-박근혜 간 차기 대권 경쟁이 가열됩니다.
박근혜는 16일 대표최고위원직에서 물러나지만, 한나라당 내에선 '선거의 여왕'으로 자리를 굳히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이명박 시장은 "목표는 정권교체"라며 시장 퇴임 뒤 대권도전 뜻을 숨기지 않습니다.
한나라 당권 뒤에 대권…‘전쟁’ 은 시작됐다
5월
지방선거 유세에 나섰던 박대표가 20일 괴한에 피습됩니다. 한나라당은 '조직된 테러'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범인 지모씨는 조직적 배경이 없는, 전과자로 드러났습니다.
테러의 배경, 역대 정치인 테러 사례, 주요 정치인들에 대한 경호 문제 등이 도마에 올랐습니다.
피습 당시의 박대표의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은 유권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반면 여당은 가뜩이나 판세가 불리한 와중에 '야당대표 피습'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치명타를 맞게 되고, 자중지란마저 벌어집니다. 60여바늘이나 꿰멘 박대표는 병실에서 선거판을 챙기는 '병상정치'로 저력을 과시합니다.
지방선거 결과는 '박근혜의 승리'였습니다. 박대표는 날개를 단 반면,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의장은 입지가 좁아졌습니다.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던 강금실 전 장관은 고배를 마셨고, 민심은 이미 노무현 정권을 떠났다는 진단이 나옵니다.
한나라당 지지율은 연일 상승세입니다.
4월
박대표의 한나라당 개혁 계획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공천장사' 사실이 드러나면서 좌초됩니다. 열린우리당과 민노당 등으로부터는 '차떼기당'이라는 비판이 쏟아집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공천장사에 대해 엄정 수사할 것"을 검찰에 독려하자, 노대통령과 박대표 사이에 날선 공방이 벌어집니다.
대선 전초전인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곳곳에서 박대표에게 지원요청이 쇄도하면서, 박대표의 주가는 치솟습니다.
하지만 이면에선 이명박 서울시장이 차기 당권을 노리고 박대표에게 공공연히 도전합니다.
3월
열린우리당 한명숙 의원이 여성 총리로 지명됩니다. 우리당은 서울시장 후보로도 강금실 전 법무장관을 내세웠습니다. 제1야당 대표(박근혜)-여성총리 후보(한의원)-서울시장 후보(강금실)가 상승 효과를 일으키며, '여성정치의 시대'가 잠시 열리는 듯했습니다.
여러 흥밋거리 조사에서는 박대표가 '여성대통령 1순위'로 꼽혔습니다.
1월
1월 12일 '반 박근혜'로 분류되던 이재오 의원이 한나라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신임 원내대표로 선출됩니다.
한나라당 내 '친박계'와 '친이명박계'의 대립이 가시화되면서, 이후 야당 내 대권후보 구도에 큰 변화가 오게 되죠.
한나라당 새 원내대표로 선출된 이재오 의원이 12일 의원총회에서 박근혜 대표의 축하를 받고 있다. /이상훈기자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사학법 개정안을 밀어붙이자 박 대표는 '사학법 반대투쟁'에 사활을 겁니다.
하지만 사학법 반대투쟁에 '올인'하는 박대표의 모습에 대해서는 한나라당 안에서도 논란이 일었습니다.
野 사학법투쟁 갈등 심상찮다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은 박대표의 사학법 투쟁을 '이념병'이라 비판했고, 고진화 의원은 "백합같던 박대표가 잡초가 됐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박대표는 "전교조는 한국에 태어난 것을 재수없다고 가르치는 집단"이라며 이념공세를 계속합니다.
박대표의 '대북관'에 대해서도 정치권 안팎에선 '북한의 고립과 붕괴를 노리자는 것이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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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박 대표는 22일 당 상임운영위 회의에서 “박근혜가 누구의 딸이라는 것을 잊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친의 과거사 문제로 당에 부담이 된다면 당 대표직에서 물러날 용의가 있음도 시사하며 대담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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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자택에 기자들을 초대한 박 대표는 선물로 받은 꽃을 두고 “강남에서 산 꽃이면 대통령이 싫어하는 꽃이겠네요”라고 노 전 대통령을 비꼬았습니다.
10월
국보법 폐지, 과거사법, 신문법, 사립학교법 등 4대법안이 현안으로 부상하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듯한 모든 정책과 법안”이라며 즉각 중단을 촉구했습니다.
9월
박 대표는 국가보안법 폐지 저지에 대표직을 겁니다. 승부수를 던지는 면모를 보입니다.
당내에서 ‘리더십이 없다’는 비판을 받자,“얼굴마담을 할 수는 없다”고 직접 화법을 사용해 반발했습니다.
8월
국가정체성 논란과 더불어 노 전 대통령과 여당이 지적한 박정희 전 대통령·유신 논란에 정면대응하는 강경한 모습도 보입니다.
朴대표 “바늘허리에 실을 궤어 못 쓴다”
열린우리당이 박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는 정수장학회에 대한 진상조사에 나서자 박 대표가 정면돌파에 나섰습니다.
朴 “검증 할테면 해보라”
그러면서도12일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해 “아버지 시절 여러가지로 피해를 입으시고 고생한 데 대해딸로서 사과말씀 드린다”고 사과했습니다.
7월
박 대표의 대여 공세 수위는 점차 높아졌습니다. 노무현 정부를 신랄하게 공격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신’ 공격에 양 진영의 갈등은 극에 치닫았습니다.
朴대표, “국가정체성 흔들면 전면전”
6월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를 어떻게 끌어낼 것인지 정부가 먼저 답을 해야 한다”며 신중한 비판을 제기했습니다. 신뢰와 원칙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가 이때부터 드러나는군요.
4월
보수진영의 금기사항이다시피 한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와 관련해 “지금 상황에서는 철폐는 안되지만, 보완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말해 화제에 올랐습니다.
3월
경향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강력한 견제세력을 자임했습니다.
“盧대통령 10분의1발언 취소하거나 책임져야”
우선 대표 자리에 오른 전당대회에서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다’는 충무공의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며 이 자리에 섰다”면서 탁핵사태로 역풍을 맞은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서의 각오를 다졌습니다. (동아일보)
또 이 자리에서 “전세로 당사를 마련하기 어려우면 천막이라도 쳐서 들어갈 것”(경향신문)이라고 발언해 천막당사 시대를 열고 한나라당의 재도약의 밑거름을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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