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언론인 |
그는 아버지의 정치적 과오를
손톱만큼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긍정하는 딸이기에…
오는 12월 대통령선거에서 극보수 새누리당이 다시 집권하든 민주통합당과 안철수를 아우른 중도세력이 정권을 되찾아오든, 민중 생활에 커다란 변화는 없을 것이다. 어려운 사람들의 기대와 환호 속에서 태어난 노무현 정권 아래서 사회양극화가 되레 심해졌다는 사실은 이런 예측을 슬며시 정당화한다. 남북관계가 더 나빠지지도 않을 것이고, 외교가 미국에 더 종속적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새누리당 정권이라 해서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 한 남북관계를 지금보다 더 악화시키지는 않을 테고, 유권자들의 자연스런 민족주의 감정을 거스르려 작정하지 않는 한 지금보다 더 친미적인 스탠스를 취하기는 어려울 테다. 다만 중도세력이 집권하면 이명박 정권이 크게 훼손한 시민적 정치적 자유를 제자리에 되돌려놓으리라는 예측은 가능하다. 이런 예측을 바탕에 두고, 좌파 정치권 한켠에서는 정권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계급투쟁이 중요하다고 힘줘 말한다. 한정된 정치적 도덕적 열정을 정권교체 같은 허깨비에 쏟을 게 아니라, 민중 생활 개선을 위해 쓰자는 얘기다. 일리가 없지 않다. 나 역시 지난번 대선 땐 그런 생각으로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다르다. 왜? 새누리당 후보로 나올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이가 박근혜이기 때문이다. 왜 박근혜는 다른 새누리당 후보들과 다른가? 그가 박정희의 딸이기 때문이다. 낡아빠진, 위헌적인 연좌제라고? 결코 그렇지 않다. 박근혜가 아버지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딸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정치적 과오를 손톱만큼도 인정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불법으로 빼앗아 지금 그가 움켜쥐고 있는 엄청난 재산을 본디 주인에게 되돌려줄 생각도, 나라에 헌납할 생각도 없다. 따라서 박근혜와 박정희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온 겨레가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적 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던 시절,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일본 관동군 장교로 복무했던 사람이다. 그는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의 ‘국군’에 들어가기 위해 “만주국과 조국(일본-인용자)을 위해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겠다’”는 혈서를 쓴 사람이다. 그가 관동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조선인 항일투사들에게 총 한 발 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민족을 배신한 사람이다. 민족반역자라는 말도 걸맞지 않을지 모른다. 스스로 썼듯, 그의 조국은 일본이었으니까.
박정희는 누구인가? 해방 뒤 좌익 세상이 이내 올 듯하자, 군대 안의 남로당 세포들을 거느리고 대한민국의 전복을 꾀하던 사람이다. 그 일이 발각돼 군법회의에서 제게 사형이 구형되자, 군 수사당국에 동료들을 모조리 밀고하고 제 한 목숨 건진 사람이다. 동료들을 배신한 거야 박정희의 개인윤리 문제니 그렇다 치자.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군부 내 남로당 프락치로 암약하며 제 새로운 조국을, 대한민국을 배신했다는 사실이다. 요즘 ‘종북’, ‘종북’ 하지만, 박정희야말로 원조 정통 종북이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학생과 시민들의 피로 이룩한 저 빛나는 제2공화국을 군사반란으로 무너뜨리고 18년간 이 나라를 철권으로 옥죄었던 사람이다. 그 시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애매하게 빨갱이로 몰려서 죽고 다치고 갇히고 망가졌다. 그 당사자들과 유족들은 지금도 따돌림과 가위눌림 속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 시민들이 누려야 할 복지는 꼭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정신적 복지가 외려 더 소중할 때도 있다. 그 정신적 복지 가운데 으뜸가는 것이 긍지일 테다. 민족을 배신하고 조국을 배신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한 사람의 딸이, 더구나 아버지가 한 짓은 뭐든 잘한 일이라고 우겨대는 딸이 공화국 대통령이 된다면, 대한민국 시민들의 긍지는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밥 세끼 입에 들어간다고 공동체의 긍지를 포기한다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를 게 뭔가? 그것이 박근혜가 다음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이유들 가운데 하나다.
고종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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