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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시장, 해남 윤문의 실용정신이 바탕이 되다

수원의 시장, 해남 윤문의 실용정신이 바탕이 되다
[팔달문시장 기획연재] '선비상인, 유상의 뿌리를 찾아서' ④·끝
2012년 01월 10일 (화) 편집부 suwon@suwon.com

본 연재기획은 중소기업청 시장경영진흥원의 2011년 수원 팔달문시장 문화관광형시장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왕이 만든 시장’ 수원 팔달문 시장의 유래를 찾아보는 역사 기획물이다. 본 편에서는 필자 김준혁 교수(문학박사, 수원·정조 역사연구 전문가)가 지난해 12월 20일 전남 해남 녹우당을 방문해, 해남 윤문(海南尹門)의 종손 윤형식 선생을 만나 정조대 수원으로 이전해온 해남 윤씨 선조들의 족적을 추적하였다. <편집자 주>

▲ 종손 윤형식 어르신과 김준혁 박사

수원신도시에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었다. 장안문과 팔달문을 연결하는 남북대로에 거대한 기와집이 들어서면서 시전이 형성된 것이다. 정조는 남북대로의 시전은 반드시 기와집으로 하라고 지시하였다. 다른 그 어떤 시장보다 규모와 위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왕이 만든 시장은 일반 도시에 만들어진 5일장, 7일장의 정기시장과는 다른 시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많은 논의 속에서 수원상인과 한양의 상인 그리고 각 지역의 상인들을 모집하였다. 이들 부상들은 단순히 조선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이 아니라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거대한 상업체계를 꾸리고 기존의 상업패턴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고자 하였다. 이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양반상인론었고, 정조는 마침내 영조대 유수원부터 내려오던 양반상인론을 책임질 가문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집안이 바로 고산 윤선도의 후예인 해남 윤문(海南 尹門)이었다.

윤선도는 효종의 사부로서 수원에 거주하면서 남인을 주도하였다. 모든 근거지가 해남에 있지만 관직 생활을 해야 하는 처지에서 해남에 머물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한양 도성 안과 수원에 집을 두고 있었다. 효종이 그의 풍모와 국가에 대한 공헌을 인정하여 수원에 국왕의 특별지시에 의해 집을 지어주었으니 효종과 윤선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효종 사후 정치적으로 몰락하여 정조대까지 해남 윤씨들은 정치적으로 중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영특한 재질을 가지고 있어도 윤선도의 후손들은 과거에 합격을 하여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윤지범은 외교를 담당하는 승문원에 임명을 하려고 하였지만 윤선도의 후예라는 이유로 노론의 배척으로 끝내 승문원에 나갈 수 없었다. 윤지범 뒤로 해남윤씨 가문에서 과거에 합격한 이가 윤지눌이다. 정조는 윤지눌이 과거에 합격하는 날 “무슨 벼슬인들 못하겠는가!”라며 극찬을 하였다. 즉 윤지눌의 천재성을 인정한 것이고 해남윤씨 세력들을 통하여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남인들의 중심 세력인 해남윤씨 가문은 정조와 함께 백성을 위한 개혁정치를 하고자 하였다. 해남 윤씨들은 노론 세력들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윤지눌은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어 정조와 다산, 이가환 채제공 등과 함께 조선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사촌형 윤지범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난 이듬해인 1790년(정조 14) 초에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령과 병조좌랑으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것만 보아도 정조가 이들을 얼마나 총애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윤지범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돕기 위하여 해남 윤문의 일가들을 수원으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하였다.

▲ 고산 윤선도 초상. 해남 윤씨는 조선조 내 거부의 가문으로 성장하였고 '삼개옥문적선지가'라고 불릴만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정조실록』 14년 12월 8일(1790. 12. 8)의 기록을 보면 해남에서 윤지운, 윤지섬, 윤지홍, 윤지익, 윤지식, 윤지상, 윤지민 등이 해남에서 수원으로 올라와 정착을 하고 과거 시험을 보아 정조가 기뻐한 내용이 나온다. 족보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수원에 올라온 것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윤지범은 같은 항렬의 집안 형제들에게 수원으로 올라오기를 요구하였고, 이들은 그의 의견을 수용한 것이다. 정조는 이때 해남윤씨의 일가들이 수원으로 올라온 것에 대해 너무도 기뻐하여 조정의 비용 1천 냥을 무상으로 지원하여 이들이 집을 짓고 하나의 마을을 이루게 하였다. 당시 초가 5칸의 집이 20냥 하던 시절이니 1천 냥이라는 비용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상상할 수 없다. 이만큼 정조는 해남 윤씨들이 고향을 떠나 수원으로 온 것에 대해 감격한 것이다. 윤지범 역시 수원으로 이사하였다. 다산이 쓴 윤지범의 묘지명을 보면 그는 정조가 해남윤씨를 위해 만들어준 수원의 집으로 1795년(정조 19)에 아예 이주를 하여 신읍인 성곽 안에서 살 정도였다.

그렇다면 정조가 왜 이렇게 감격하였을까? 그것은 이들을 통해 자신의 원하는 통상 즉 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장사’를 명문가가 중심이 되어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앞서의 내용처럼 서울의 부상(富商)과 수원의 부상들이 수원에 시전을 형성하고 새로운 상업을 추진하기로 하였지만 이들의 능력만으로는 모자란 것이 존재하였다. 이들이 해상을 통한 통상을 해보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고산 윤선도로부터 시작된 해남 윤씨들의 해상 경영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들은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해남 일대의 섬에서 어업행위를 크게 하고, 이 해산물을 유통하였다. 더불어 이들은 바닷가의 갯벌을 지역민을 참여시켜 간척사업을 하여 농토를 넓히고 둔전을 개발하였다. 해남윤씨 가문의 종손인 윤형식 선생은 가문의 실용정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고, 자신들의 선조들이 수원으로 이주하여 정조와 더불어 새로운 상업개혁에 참여한 것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해남 윤씨들의 상업과 농업의 개혁적 방식은 150여 년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능력(knowhow)는 탁월한 것이었다. 따라서 정조는 이들의 능력이 수원의 새로운 상업개혁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특별 지원을 한 것이었다. 해남 윤문의 실용정신이 그대로 수원에 와서 꽃을 피운 것이다. 이로 인하여 수원의 시장은 양반과 평민 그리고 부상(富商)과 소상(小商)이 어우러진 전국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글=김준혁(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문학박사)
기획=(주)브랜드스토리, 팔달문상인회, 수원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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