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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06)] 숙지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106)] 숙지공원 이야기-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3.03.06 05:50

2022년 6월 숙지공원 항공사진. 숙지산을 공원으로 지정해서 임야가 대부분이다. 2003년과 2009년 농지에 축구장과 다목적체육관, 야외공연장, 산책로, 휴게시설, 주차장이 조성됐다.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1967년 7월 3일 수립한 수원도시계획에서 숙지산 일원 27만3669㎡가 숙지공원으로 지정됐다.

 

숙지산(熟知山)은 수원화성 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789년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을 길지인 수원부의 화산으로 옮기기 위해 구읍을 오늘날의 수원으로 이전했다. 이후 정조는 신하들의 건의로 화성축성을 추진하게 된다. 화성축성에 대한 논의가 한창 진행되던 1793년(정조17) 12월 6일 정조는 화성유수 조심태를 불러 물었다.

“돌 뜨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인데 돌 뜨는 곳이 고을 소재지에서 몇 리나 되는 거리에 있는가?”

하니, 조심태가 아뢰기를, “바로 3리나 7리 정도의 지점인데 길이 평탄하여 운반하기가 쉽습니다”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팔달산(八達山) 건너편의 지역은 읍과의 거리가 3리에 지나지 않고 석재(石材)가 많으면서도 좋아서 무진장하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그곳의 지명이 바로 공석면(空石面)이기에 신은 항상 신명이 이를 감춰두었다가 오늘을 기다린 것은 모두가 전하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숙지산 부석소(浮石所)돌 뜬 흔적. (사진=김충영 필자)

‘화성성역의궤-권수’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돌 캐는 곳은 다섯 군데였는데, 숙지산에 두 군데, 여기산에 두 군데, 권동에 한 군데가 있다. 성을 쌓는 작업을 시작할 무렵까지는, 이 지방에서 돌이 나지 않았으므로 혹은 벽돌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토성을 쌓는 편이 낫다고 하여 의논이 여러 갈래로 갈려 일치되지 않았다.

수원부의 서쪽 5리쯤에 공석면(空石面)이 있고 여기에 숙지산이 있으며, 또 그 서쪽으로 5리쯤에는 여기산이 있다. 처음에는 이 두 산이 모두 흙으로 덮여서 조막만한 돌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러다가 돌맥을 찾아서, 이 맥을 따라 파 들어갔다. 그리하여 가로세로 시렁처럼 층층으로 파내자 좋은 돌맥이 나타났다. 이 뒤에 권동에서도 돌맥을 찾았는데, 두 산에 버금가는 좋은 돌맥을 찾아냈다. 서성의 터 닦던 날에 팔달산의 왼쪽 등성이에서 남으로 용도에 이르기까지 600~700보나 되는 거리가 모두 돌맥으로 꽉 차 있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서성 일면은 모두 이 돌산에서 캐내어 사용했다.

대체로 숙지산의 돌은 강하면서도 결이 곱고, 여기산의 돌은 부드러우면서도 결은 거칠었다. 권동의 돌은 여기산 돌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곱고, 팔달산의 돌은 숙지산의 돌에 비해 더 강하고, 여기산 것보다 더 거칠었다.

여러 곳에서 떠낸 돌을 통틀어 계산하면 숙지산 돌이 약 8만1100여 덩어리, 여기산 돌이 약 6만2400덩어리, 권동에서 3만200덩어리, 팔달산에서 1만3900덩어리였다‘

화성을 축조하는데 전체 18만7600덩어리가 사용됐다. 숙지산에서 떠낸 돌은 화성축성에 들어간 돌의 43.2%의 돌을 떠낸 셈이다.

정조는 1796년(정조20) 1월 24일 현륭원을 참배하고 대유평을 지나 만석거에 이르러 화성에 쓰인 돌에 대해 말했다.

“면 이름을 공석(空石)이라 하고 산의 이름을 숙지(熟知)라 하였으니, 이른바 옛부터 돌이 없는 땅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오늘날 갑자기 셀 수 없이 단단한 돌을 내어 성 쌓는 용도가 됨으로써 돌이 비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 하고 감탄했다.

1966년 11월 숙지산 항공사진. 북쪽 길옆에 하얀 부분이 연초제초창 앞 채석장이다. 남쪽 하얀 부분이 화성아파트가 있던 채석장이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서비스)

숙지산에서 돌 뜨기는 화성축성 당시 시작돼 197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채석장은 2곳이 있었는데 가장 많이 돌을 뜬 곳은 숙지산의 남쪽 부분이다. 이곳은 돌을 많이 떠서 숙지산 정상부분 남쪽에 벼랑이 만들어 지기까지 했다. 숙지산은 후방에서 적을 살피는 척후돈대(斥候墩臺)가 있어 화성과는 밀접한 관계였다.

1975년으로 기억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쌀 3천만 석 달성을 독려하기 위해 해마다 농촌진흥청을 방문했다. 필자는 당시 수원 1번 버스가 유일했던 시절 농촌진흥청으로 출근하기 위해서 수원극장 앞에서 버스를 탔다. 하루는 버스타고 출근을 하다가 숙지산을 바라보니 채석장이 푸른색으로 변한 것이 보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박 대통령이 농촌진흥청을 방문하기 때문에 숙지산 석산이 흉해서 시청에서 푸른 그물을 씌웠다는 것이다. 숙지산 석산은 1970년대 말 주공아파트 단지가 건설됐다.

1974년 8월 숙지산 항공사진. 1966년에 비해 채석장이 몇십배 확장된 모습이다. (사진=수원시 항공사진 서비스)

숙지산 두번째 석산은 연초제조창 앞에 있었다. 이곳 역시 1970년대까지 석산이 운영됐다. 이곳은 돌을 많이 채취해 석산이 도로보다 깊이 파이게 되면서 흉지로 변했다. 당시 수원시는 쓰레기처리장이 없어 쓰레기를 버릴 곳이 없게 되자 이곳에 쓰레기를 메우는 우를 범했다.

숙지산은 공원으로 지정됐다. 수원 도심의 근린공원은 대부분 1967년과 1969년 잘 가꾸어진 임야와 저수지를 지정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6.25전쟁 이후라서 공원 지정만 한 채 방치한 상태였다.

수원에서 제일 먼저 공원을 조성한 곳은 장안공원이다. 장안공원은 1975~1979년 화성복원사업을 기념하기 위해 관문공원으로 조성했다. 이후 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확보된 공원부지에 놀이기구와 수목을 적당히 심어 그늘을 만들어주는 정도였다.

1981년으로 기억된다. 수원시 도시과에는 도시행정계, 도시계획계, 구획정리계가 있었다. 당시 도시행정계장으로 정 모 계장이 근무했다. 정 계장은 가끔 필자에게 숙지산 공원에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산과 전답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후 20여년이 지나 필자가 도시계획과장을 하던 2000년경에 찾아 오셨다.

“세상에, 공원으로 지정한지 30년

이 지났는데 보상을 안해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주변은 모두 주거지역이 돼 땅값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고 자녀들이 성장해서 집도 마련해주고 해야 한다고 했다. 본인은 집에서 가장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고 시청에 그리 오래 다녔으면서 그것도 하나 해결하지 못한다고 항의한다는 것이다. 보상을 안해주려면 해제해 달라고 했다.

2003년 11월 8일 숙지공원 조성공사 기공식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숙지공원의 변화라면 1987년 수원시는 북서부지역 상수도 공급을 위해 정상부분 9846㎡의 부지에 1만 톤 규모의 상수도 배수지가 설치됐을 뿐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민들의 끈질긴 요구로 일부 농경지를 보상하게 되자 2003년부터 공원 조성이 시작됐다. 2000년 11월 8일 숙지공원 조성공사가 시작됐다. 당시 공원조성은 이미 보상이 완료된 농지에 운동장과 편의시설을 만드는 정도의 사업이었다.

2009년 7월 10일 숙지공원다목적체육관 개관식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이후 2008년 8월 25일이 되어서 숙지다목적체육관 건립공사가 추진됐다. 체육관은 철골조 샌드위치 판넬 1277㎡(386평)로 배드민턴 6면, 농구 1면, 배구 1면, 관람석 336석과 관리동의 체육관을 28억8640만원의 예산을 들여 건립했다.

여기산 공원 조성계획도. 1967년 공원이 지정 후 56년 진행 중인 여기산 공원이다.

숙지산은 현재 '孰'자와 '知'를 쓴다. 예전엔 '熟(익힐 숙)'자를 썼다. 그러니까 '익히 알았다'는 뜻이다.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 지 익히 알았다(熟知)는 뜻이다.

수원은 어디를 가나 화성과 관련된 유적이 있다. 정조대왕의 일화가 있는 도시임을 긍지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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