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9월의 어느 날. 한가롭던 충남 예산역에 기차가 들어섰습니다. 플랫폼 주변의 코스모스가 가을의 시작을 알릴 때였지요. 스물둘, 벽안의 젊은 여성이 긴장한 표정으로 기차에서 내립니다. 자기 몸보다 큰 이민 가방을 두 개나 끌고 있네요. 33년 뒤 조국인 미국의 대표로 한국 대사에 부임하게 될 캐슬린 스티븐스(한국명 심은경)가 한국에 첫발을 내딛는 모습입니다. 평화봉사단원이던 그는 이후 2년간 예산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칩니다.
#1975년 9월 11일. 1년 전 광복절 행사에서 어머니(고
육영수 여사)를 잃은 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던 스물셋의 영애(令愛)
박근혜(한나라당 전 대표)가 충북 청주를 찾습니다. 그는 성심양로원과 청주 맹학교를 잇따라 방문합니다. 맹학교 학생들에게 그는 “어려움을 극복하면 결실이 반드시 온다”고 격려합니다.
스티븐스 대사와 박 전 대표가 지난 6일 미 대사관저에서 만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스티븐스 대사가 9월 공식 부임한 뒤 첫 오찬 회동입니다. 미 대사관 관계자는 “스티븐스 대사는 부임 후 여러 한국 정치인과 만나 한·미 관계에 대해 얘기했다. 이번 모임도 그중 하나”라고 설명했습니다. “부임 전에도 두 사람이 세 차례가량 만났다. 특별한 의미는 부여하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33년 전 충청도 어딘가에 20대 삶의 흔적을 남긴 이들의 만남을 평범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한 살 차이 첫 여성 주한 미 대사와 한국의 대표적 여성 정치인의 만남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둘은 다양한 주제로 두 시간가량 얘기를 나눴습니다.
75년 얘기를 먼저 꺼낸 건 대사였다고 합니다.
▶스티븐스 대사=“예산중 교사 시절 박 전 대표를 보고 감명 받았습니다. 내 또래의 젊은 여성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한 나라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해내는 것에 깜짝 놀랐어요.”
▶박 전 대표=“한국을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분이 대사로 오셔서 국민들이 상당히 좋아합니다. 앞으로 한·미 관계가 더욱 좋아질 것 같아요,”
▶스티븐스 대사=“한국에 온 뒤 순두부 가게에 갔는데 손님들이 알아봐서 참 신기했습니다.(웃음)”
이어 둘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의 한·미 관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북핵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 것으로 전해집니다. 스티븐스 대사는 최근 끝난 미 대선의 결과를 박 전 대표에게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득표 현황 표도 보여줬다고 합니다. 박 전 대표는 최근 이뤄진 한·미 통화 스와프와 관련, “매우 시의적절한 대처였다”며 사실상 ‘감사’의 뜻도 표했습니다.
두 사람은 어떤 언어로 대화했을까요. 스티븐스 대사는 한국어로, 박 전 대표는 영어로 말했다고 합니다. 상대에 대한 예우였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정치적 사안은 꼭 모국어로 말하고 통역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네요.
▶박 전 대표=“어쩜 그리 한국어를 잘 하십니까. 완벽하시네요. 어디서 배우셨어요.”
▶스티븐스 대사=“제 한국어보다 박 전 대표의 영어가 훨씬 낫습니다.”
박 전 대표의 영어 실력과 관련해선, 퍼스트레이디 시절 방한한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을 직접 설득해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을 막아낸 일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참, 이날 모임에선 대사관저에 걸린 고지도 한 장이 화제가 됐습니다. 과거 서울의 모습을 그린 지도라고 합니다. 미국인인 스티븐스 대사가 서울시민인 박 전 대표에게 지도 내용을 상세히 설명해줬다는 겁니다.
예영준·이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