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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blog이전(+)됨:약7십만접속/-기존_자료2 종합(박근혜 前 대통령관련)

펌/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의 리더가 된 요인

펌/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의 리더가 된 요인
반딧불이 2009/05/17 15:58:05 [조회 : 316]

-우연히 발견한 글이다. 남의 글을 퍼 나르는 것은 익숙하지 않지만 같이 읽어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인용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박근혜 전대표의 리더십은 결코 그냥 만들어 진 것은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식들에게 유언 하나 없이 갔지만 그는 그가 남긴 발자취로 박근혜 전대표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을 남기고 갔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요인 때문에, 어떤 과정을 거쳐 혁명의 리더가 되었던 것일까? 포괄적인 자료를 확보하기 어렵지만 제한적인 자료를 근거로 군지휘관 시절 박정희의 리더십을 평가해 보면 다음과 같은 요소로 나타난다.


첫째, 박정희 리더십은 정치적 요인이 아니라 실무적인 업적에서 나왔다. 박정희는 군지휘관 시절 자신이 상관에게 아첨을 하거나, 결코 의도적으로 추종자 집단을 모으지 않았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과묵했으며, 오히려 패거리 짓는 것을 싫어했다. 또한 시류에 편승하거나 영합할 줄 모르며 사교에도 능하지 못했다. 당시 군 장성들은 미군 장교들과 골프와 파티를 즐기는 미국적인 생활양식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런 생활은 출세의 지름길이기도 했다. 박정희 역시 6개월간의 미국 연수를 받았지만, 그는 그런 활동을 즐길 줄도 몰랐고 여러 정황으로 보아 내심 그런 생활태도를 경멸하고 있었다. 5.16 혁명이 발발했을 당시 미군사령부나 대사관에서는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없다는 사실에 당황했는데, 이는 바로 위와 같은 생활태도에서 생겨난 일이었다. 또한 박정희는 이종찬, 이용문과 같은 몇몇 지도자를 제외하면 상관들에게 대해서도 사교적이지 못했으며 때로는 적대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육사 5기와 8기를 중심으로 하는 후배 그룹의 추종자 집단을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후배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의미인데, 그 요인은 a)뛰어난 능력, b)계몽적 태도, c)목표달성과 관련한 합리적 행동방식 d)공평 및 청렴 등의 요소였다.

둘째, 박정희는 시종일관 계몽적 태도 또는 개혁적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의 권위적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태도가 더 효율적이었다. 이와 같은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은 그는 선생님과 같은 입장에 섰을 때 효율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1954년 10월부터 약 8개월 반 동안 광주포병학교장을 지냈는데, 이는 그가 준장으로 진급한 이후 맡은 실질적인 지휘관 자리였기 때문인지 의욕적으로 일을 했고, 그 시절 부하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광주포병학교 시절 부하로 있던 사람들 중에는 5.16에 가담한 사람이 여러 명 있다는 것은 그가 교장과 같은 입장에 섰을 때 효율적이며 자애로운 리더십을 발휘햇음을 보여 준다. 행정처 보좌관 이낙선, 항공대장 이완엽, 학생대장 홍종철, 부교장 정인완, 교관 구자춘 등이 그들이다.

셋째, 박정희는 목표설정을 확실하게 하고, 목표의 달성과 관련하여 현장을 확인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그의 부하 생활을 오래 동안 한 오정석 예비역 장군은 박정희가 “명령은 5%이고, 확인과 감독이 95%라고 거듭 강조했는데, 이는 군지휘관 생활 동안 오정석의 지침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 박정희는 군 지휘관 생활을 나름의 지도자 철학을 정립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목표달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또한 공사 관계가 분명해서 사적인 이익이나 편의를 공식적인 업무관계에 끌어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친한 후배일수록 업무관계는 분명히 하고, 은혜를 입은 상관에 대해서도 업무 관계에 있어서는 거침없이 대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육영수는 말 못할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적인 관계를 벗어나면 부하들과 동료처럼 어울리곤 했으며 때로는 무분별할 정도로 소탈하게 지냈다. 박정희는 술을 좋아했는데, 그 술의 상당부분이 부하들과 마신 술이었다.


넷째, 박정희는 매우 청렴했다. 아직 대통령이 되기 전 박정희는 공적인 업무를 계기로 사적인 용도의 금전을 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의 군대는 장교 월급도 턱없이 부족했고 후생사업이라고 하여 부대마다 자체사업을 벌여 돈을 마련하는 등 부정부패가 심했다. 박정희가 속한 부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렇게 생긴 돈을 독식하지 않고, 전체 액수를 공개한 후 부하들과 공평하게 나누거나 가난한 장교들을 위해 더 많이 분배했다. 박정희는 금전문제에 있어 자신이 상관이라는 이유로 결코 유리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리한 경우를 말없이 감수했다.

그러나 이처럼 금전 문제에 있어 공평한 태도가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켰던 것 같지는 않다. 박정희가 부정부패를 금기시하다 보니, 부하들과 육영수는 경제적 고통을 많이 받아야 했다. 일부 장교들은 다른 부대로의 전출을 희망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가난은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였다. 장도영에 따르면, 1954년 2군단장 시절 하루는 군단 휼병 참모가 찾아와 “박 장군은 청빈한 것이 지나쳐 가족들이 아직 셋방살이를 하며 생계가 어려운 때도 있다”고 하며, “아무리 전쟁에 피해가 많고 모든 국민이 빈한한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장군이 있을 집 한 칸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면서 선처를 호소할 정도였다. 장도영이 박정희에게 근거없이 유리한 증언을 하지 않는 사람임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일 것이다.

다섯째, 박정희는 당시의 군대에서 경력상 최고의 인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엘리트 중의 엘리트 였다. 당시 한국 군부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및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출신 등 극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움직여졌으며, 이승만에 의해 백선엽으로 대표되는 평안도파와 정일권으로 대표되는 함경도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모두 졸업하여 이들과 친밀했다. 박정희는 군부내 요직인 6관구사령관과 군수기지사령관을 맡을 정도로 인정받는 장성이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기 전, 박정희가 보여 준 인간적인 모습과 훌륭함에 대한 여러 가지 증언이 많지만, 그것들은 대개 위의 다섯 가지 범주에 드는 행동들이었다.


바로 이런 요소들은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상하관계가 너무 엄격했던 1950년대의 군대 속에서 박정희를 여러 사람들이 추종하는 리더로 만들었다. 결국, 박정희는 1960년 이후의 정국혼란 상황에서 혁명의 리더로 등장한다. 그것은 그가 강하게 원하던 것이었지만, 후배들의 뒷받침과 상황적 요인이 결합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960년 7월 조선경비학교 8기생이 주축이 된 개혁적 청년장교들은 “박정희 소장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하여 군내의 개혁을 단행하라!” 는 요구를 내각과 군지도부에 공공연하게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는 명백한 하극상이었지만, 이처럼 직위나 업무상의 명령계통과 상관없이 박정희가 추종자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정치 리더십 탄생의 명백한 징후였다.


(발췌 - 서울대학교 논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