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재·보궐 선거 참패는 한나라당의 근본적인 ‘판 갈이’를 요구하고 있다. 인물 인지도만 높으면(엄기영 강원도지사 후보) 무조건 당선되던 시절은 갔다. 여론조사 후리기로 민심을 낚으려던 전략도 투표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 변화로 한물간 아이템이 됐다. 지역에 뿌리를 둔(분당 을) 고정 지지층이 당선을 보장해주던 것도 옛말이 됐다. 이번 재보선은 2012 총선·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정치흐름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이런 새 정치 질서의 출현을 목격하고도 한나라당의 대응은 여전히 구식이다. 대부분의 계파는 치열한 당내 토론이나 여론수렴도 없이 박근혜 전 대표를 애타게 찾고 있다. 이에 여당 일각에서는 “‘재보선 패배-박근혜 역할론-박근혜 조기부상’으로 이어지는 안일한 대응은 총선·대선 참패의 외길 수순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단 살고보자”는 즉자적인 대응이 오히려 유력한 대권후보를 조기에 죽여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얘기다. 4·27 재보선 참패의 충격에 빠져 있는 한나라당의 위기 탈출 시나리오를 따져봤다. “박근혜를 ‘상수’가 아니고 ‘변수’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그를 대선까지 안전하게 보호해가며 경쟁력 있는 후보로 만드는 유일한 전략이다.” 한나라당에서 중진급 의원들과 오랫동안 교류하며 수십 년째 대선 전략 관계자로 활동해온 A 씨는 최근 당내에서 일고 있는 ‘박근혜 역할론’에 적극 반기를 들고 있다. 여권 주류에서 주장하는 ‘박근혜 역할론’은 조기부상에 따른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오히려 박 전 대표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분석이다. 박 전 대표를 ‘상수’로 두고 그를 중심으로 당 권력을 재편하자는 위기 탈출 전략은 한나라당이 가지고 있는 비장의 무기를 남발해버려 총선·대선에서 패배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친이-친박계에서 각기 다른 배경으로 나오고 있다. 먼저 친 이재오계에서는 박 전 대표의 포지셔닝을 ‘변수’로 두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이재오 특임장관이 대권 도전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이상 박 전 대표의 조기 부상은 그 기회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은 당헌·당규를 개정해 대권주자의 당권을 허용하자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공천권을 포함한 당권과 대권을 박 전 대표에게 그냥 헌납하라는 얘긴데 그럴 수 있겠느냐. 박 전 대표를 그런 식으로 일찍 옹립하는 것은 박 전 대표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친 이재오계는 박 전 대표를 대권주자의 ‘원 오브 뎀’의 변수로 두고 계속 경쟁을 시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용태 의원은 이에 대해 “어차피 새로운 당의 동력을 만들려면 잠재적 대선 후보들이 전면에 나서 지독하게 경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과정 속에서 박 전 대표의 약점이 노출돼 친이계 대권주자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는 희망 섞인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친이계에서는 박 전 대표가 현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나선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게 없다고 본다. 친이계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대선주자가 없어서 선거에 진 게 아니다. 박 전 대표가 나선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또 한편에서는 “재보선 때 돕지 않았던 박 전 대표가 지금 무슨 역할을 하겠느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이런 친 이재오계의 시각은 모두 박 전 대표에게 당권·대권을 헌납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친 이재오계의 한 핵심 의원은 이에 대해 “선거에서 패배하기만 하면 무서워서 박근혜 치마 속으로 기어들어갈 생각부터 하고 있다. 사나이답게 떳떳하게 맞설 생각을 해야지, 여자 치마 밑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게 부끄럽지도 않느냐”라며 최근 ‘박근혜 역할론’이 일고 있는 당내 기류에 직격탄을 날렸다. 사실 재보선에 참패하기가 무섭게 한나라당에서는 ‘박근혜 열병’을 앓고 있다. 내년 총선 패배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대부분의 의원들이 “이제 때가 됐다”며 박 전 대표의 조기부상을 애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재오 장관 측의 반응은 의외로 강경한 편이다. 최근 이재오 특임장관도 재보선 패배와 관련, “선거에 지고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잘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걸 생각하는 것이 더 급하다”라고 언급했다. 이를 두고 한 친이계 초선 의원은 “선거 패배에 따른 박근혜 역할론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선거에서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냉정하게 따져보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박근혜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재오 장관의 또 다른 핵심 측근도 “어떻게 혼자 당을 좌지우지하라고 다 맡길 수 있느냐. 친이계와 친박계가 당을 공동으로 끌고 가거나 박근혜 전 대표가 당 대표를 맡고 이재오 장관이나 정몽준 의원 등이 최고위원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박근혜-이재오 공동 역할론’을 내세우며 박근혜 역할론이라는 대세에 저항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친박 측에서도 최근 일고 있는 ‘박근혜 역할론’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선거 패배 직후 들불처럼 역할론이 불붙고 있지만, 상황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백가쟁명식의 위기탈출론이 나와 해법의 초점이 박근혜에게로만 모아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이는 친박 측이 여전히 박 전 대표의 조기부상에 따른 조기낙마 가능성을 상당히 높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몽준 전 대표 등 박 전 대표의 대권 라이벌들이 이구동성으로 역할론을 주장하고 나선 데는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 낙마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도 깔려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친박계의 한 핵심의원은 이에 대해 “대선이 1년 6개월이나 남은 시점에 당내 정치를 직접 재개하기는 부담이 크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너무 몸을 사린다”는 비판이 거세지게 될 경우 방어벽을 쳐둘 요량이다. 박 전 대표 측은 내년 총선 전까지 박 전 대표가 당직을 맡지 않으면서 당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들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정책 개발과 국민 통합 등을 위해 박 전 대표가 역할을 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을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아니면 12월쯤 총선 선대위원장을 맡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당 참여를 유보한다는 대응책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모두 현재의 박근혜 역할론을 최대한 늦추고 극적인 부상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 고심의 흔적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아직도 전면에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분위기가 더 무르익어야 한다는 얘기다. 현재 당내의 대체적 기류는 박 전 대표가 당장 역할론에 동화돼 전면에 나설 가능성을 낮게 본다. 친박계가 “전면에 나서기 위해선 당의 쇄신과 개혁이라는 사전 정지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라는 이유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유승민 의원은 이에 대해 “당이 이대로 가선 안 되겠다고 변화를 모색할지, 아니면 모든 게 자기들 권한이라 생각하고 지금처럼 갈지는 전적으로 친이계 주류 측에 달린 것”이라고 말했다. 친이계 추대 없이 전면 부상은 어렵다는 얘기다. 친박계는 “당헌·당규상 대선주자인 박 전 대표가 대표를 맡는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본인도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대선이 1년 8개월이나 남은 상황에서 대표를 맡아 상처를 입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소 연대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현재의 당 권력구도 흐름이 ‘이상득-박근혜-소장파’ 대 ‘이재오’ 단일계로 양분되는 과정이라고 볼 때, 박 전 대표가 직접 당 전면에 나서지 않는 데 대한 책임론을 피하면서 소장파 대표를 내세워 당을 수습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친박계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당내의 새로운 정치흐름을 친박계가 주도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사실 4·27 재·보궐 선거에 참패한 한나라당 내에는 새로운 정치질서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는 움직임도 있다. 이념과 정체성이 달라 대립과 반목을 보이던 박근혜 전 대표와 소장파가 ‘박-소 연대’로 새로운 정치흐름을 주도할 경우 친 이재오계를 압박하며 당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물론 새 정치 질서의 흐름 앞에는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친박 내부에서는 “지난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밑도 끝도 없이 흔들어대던 소장파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강경한 목소리가 더 높다. 소장파 일각에서도 “박 전 대표에 ‘올인’하다가 오히려 모두 망할 수 있다”라며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박-소 연대’가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박 전 대표의 ‘결심’이 필수적이다. 그가 내년 총선 및 대선을 ‘비 이명박’ 전략으로 이끌 것인지, 아니면 전략적 연대를 통해 돌파할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과 한 배를 타고 총선·대선을 맞이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나라당 텃밭인 분당 을이 무너진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반 이명박’ 정서가 여권 지지층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박 전 대표도 이상득 의원으로 대표되는 구세력 청산과 소장파와의 연대를 통한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내야 하는 필요성이 있다. 앞서의 친박계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당권에 무혈입성하게 되어도 그 자체로 끝난 게 아니다. 새로운 집권 모멘텀을 만들어내야 한다. 비전을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선택과 집중을 통한 구세력 청산과 신진세력 구축을 해내야 국민들에게 집권 동기를 설명해낼 수 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분당 을 승리를 통해 대권 도전에 대한 명분을 쌓았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당내의 추인만 받았을 뿐 아직 국민들의 검증을 받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수도권의 한 초선 의원은 이에 대해 “과연 내년 총선에 누가 서울에서 지원 유세를 나서면 먹힐 수 있을까. 없다. 박근혜 전 대표가 될까? 서울에서는 검증된 적이 없기 때문에 아직 그의 경쟁력을 알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수도권 도전의 한계를 ‘박-소 연대’를 통해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한나라당은 재보선 패배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충분히 토론되지 않는 백가쟁명식 아이디어만 속출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언제나 박근혜가 있다. 당이 가지고 있는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이자 경쟁력 최고의 빅 카드를 지역선거 2개 뺏기고 섣불리 꺼내들려고 하고 있다. 이에 박 전 대표도 당권 조기접수라는 미끼에 현혹돼 그 카드를 덥석 물려고 하고 있다. 지금 한나라당은 지난 1997년,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외에 어떤 대안도 찾지 않고 대세론에 안주해 2연패했던 그 필패의 외통수로 점점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일오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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