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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후보 검증② 박근혜] 대한민국 18대 대통령 박근혜?

[대선후보 검증② 박근혜] 대한민국 18대 대통령 박근혜?
성장기·10.26 이후 절망의 시간부터 정치인 박근혜로 거듭나기까지
[폴리뉴스 이명식 편집주간 기자]기사입력시간 : 2011-05-04 17:24:24

< 본 글은 월간 폴리피플 2011년 5월호(22호) ‘COVER STORY’에 게재되었습니다. >



박근혜는 2001년 외신기자들과 회견 과정에서 자신의 영어 이니셜인 GH를 ‘GREAT HARMONY’(대화합)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박근혜가 생각하는 대화합은 지역간, 계층간 갈등의 해소,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동아시아의 지역협력 증진 등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차기는 박근혜(?)

3김 씨가 정치일선에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기를 지나고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정치인 중 한 사람으로 박근혜를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박근혜는 1998년 4.2 대구 달성군 재보선에서 승리하여 15대 국회에 진출한 이후 다소간의 부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고정 지지층을 가진 유력 대권주자의 지위를 잃은 적이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정계에 몸담은 이후 역대 선거에서 박근혜 만큼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인을 찾기는 힘들다. 1997년 대선에서 실패한 충격을 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치러진 1998년 4.2재보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예상을 깨고 승리를 거두어 한나라당을 침몰의 위기에서 구원했다. 2002년 한나라당이 대선에 실패한 이후에도 박근혜는 ‘차떼기 당’이란 오명으로 좌초의 위기에 직면한 당을 진두지휘, 2004년 총선에서 대패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차지하는 저력을 보였고 이후 4번의 선거에서 모두 승리하면서 ‘선거의 여왕’이란 타이틀을 획득했다.

3김 씨의 경우 자신의 근거지에서는 위력을 발휘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오히려 역작용을 불러일으켰던 반면에 박근혜의 경우는 호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이 발휘했다는 점에서 가히 경이적이라 할 것이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했지만 깨끗이 승복했고 이후 18대 총선에서 친박계 공천 학살이라는 시련과 친이계의 집중 견제를 견뎌내며 확실한 차기 대권 주자로 자리매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2년 대선까지 아직 짧지 않는 시간이 남아 있고 예측하기 어려운 여러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2012년 대선은 박근혜인가 아닌가로 판가름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미 정치권 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 다수도 차기 대통령으로 박근혜를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고 ‘대세론’이라 불릴 만큼 여타 후보와의 경쟁에서 멀찌감치 앞서가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박근혜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1952년 생으로 대선이 치러지는 2012년이면 환갑을 맞이하는 인간 박근혜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 힘의 근원을 짚어보고 정치인 박근혜의 행적을 통해 앞날을 점쳐보려 한다.

인간 박근혜의 성장기

(ⓒ폴리뉴스)
박근혜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대구에서 출생했다. 영관급 군인이었던 아버지와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현모양처형의 어머니 밑에서 평범하게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직업이 군인이었기에 이사를 자주했고 전쟁 직후의 생활도 일반적인 가정과 마찬가지로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서전에 남긴 성장기 기록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교육과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에 대한 기억만을 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인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킨 시기가 박근혜가 10살 무렵인 것을 감안한다면 맏딸로 조숙한 편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5.16쿠데타 하루 전날인 1961년 5월 15일 밤 10시경, 박정희 장군은 거사를 위해 작업복에 점퍼차림으로 집을 나서면서 육영수 여사에게 “여보, 그 가방에 권총 있지. 꺼내줘요. 다녀올게” 육 여사는 순간 “근혜 숙제 좀 봐주고 나가세요” 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안방으로 가서 그때까지 책상 앞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던 근혜를 보고 나서 집을 나섰다고 한다.

성심여중에 진학하고부터 청와대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비교적 활달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고 공부도 잘하는 편에 속했다고 한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대통령으로서의 아버지와 영부인으로서의 어머니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스스로 인생관과 가치관을 확립해 나갔으리라 짐작된다. 애국심과 투철한 국가관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가치관이라면 의연한 기품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자질이라 할 것이다.

박근혜가 대학을 진학하는 과정에서 육 여사는 인문계에 진학하기를 바랐지만 ‘산업역군이 되어 나라에 기여하겠다’는 포부를 아버지에게 밝히고 서강대 전자공학과입학했다. 대학생활 과정에서는 홍일점으로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지만 어머니를 대신해 해외 무대에 나서는 일이 잦았으며 그 과정에서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껴 어학공부를 열심히 했고 후일 영어, 불어, 스페인어 등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1972년에 유신이 선포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대학을 다녔던 박근혜가 대학사회의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남자 동기생이 ‘근혜 씨, 나 데모하러 갑니다’하고 말을 건네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부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밝히고 있지 않다.

대학시절을 회상하는 대목에서는 동료들과 즐겁게 어울리고 열심히 공부했던 추억들은 드러나 있지만 치열하게 정치? 사회적 문제고민했던 기록은 볼 수가 없었다. 가슴 속에 갈등이 있었다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학에 수석으로 졸업하여 기쁘게 해드린 것에 대해 어머니 생전에 마지막으로 한 효도라고 기억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박근혜는 프랑스로 유학길에 올랐다. 짧았던 유학생활은 박근혜에게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아름다운 도전의 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과 퍼스트레이디 생활

박근혜는 프랑스 유학생활 중 육영수 여사가 서거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장례를 치르고 슬픔에 잠길 시간도 없이 스물두 살의 나이에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인간 박근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4년부터 1979년 10.26에 이르기까지의 퍼스트레이디 생활이 대단히 중요하다. 단순히 대통령의 딸이었던 것과 퍼스트레이디로 역할을 경험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전혀 다를 뿐 아니라 퍼스트레이디 경험이 박근혜가 정치를 하게 된 계기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 지 불과 엿새 뒤에 개최된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퍼스트레이디 자격으로 참석하여 장내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 ‘지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안계시지만 여러분들은 어머니가 계실 때보다 더 훌륭한 경기를 보여주십시오’ 라며 끝까지 울음을 참고 의연하게 인사말을 했다고 한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을 듣고 그 후 모든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박근혜는 아버지를 도우면서 열심히 생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를 수행하는 ‘승용차 대화’를 통해서도 틈틈이 수업을 받았고 아버지의 식사를 돕는 ‘식탁 대화’에서도 중요한 정치수업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특히 아침식사 시간에는 신문을 읽어드리면서 각종 국정현안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을 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는 우리 현대사에서 제왕적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고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 지켜본 박근혜에게는 아버지가 엄청난 신화적 존재로 각인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70년대 후반 유신통치 하에서는 퍼스트레이디가 ‘국모’라 불리던 시절이었고 그 위세 또한 대단했다. 박근혜는 걸스카우트 명예총재와 새마음 봉사단 총재를 지냈는데 특히 새마음 봉사단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버지가 펼친 새마을운동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새마음운동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육영수 여사가 했던 양지회 활동이 소극적인 자선 구호모임이었던데 반해 새마음 봉사단은 전국의 직장인과 중고생들까지 조직하는 등 적극적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시도 단위에서 모임을 한번 개최하면 수천 명이 참석해서 그 열기가 대단했다고 하는데 그런 모임을 수없이 주재했으니 25∼26살의 나이에 대단한 경험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외교무대에서도 퍼스트레이디로 역할하면서 각국의 국가원수세계적인 정치지도자들과 교류하는 경험도 가졌는데 이는 후일 정치인 박근혜의 소중한 자산이 되기도 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백악관 시절을 회상하면서 “퍼스트레이디는 환상적 경험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근혜는 22살에서 27살에 이르기까지 많지 않은 나이에 참으로 환상적인 경험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어머니의 죽음은 박근혜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지만 어머니의 삶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10.26 이후의 절망의 시간

(ⓒ폴리뉴스)
1979년 10월26일은 박근혜의 운명을 또 다시 송두리째 바꾸는 날이었다. 비서실장으로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듣는 순간 박근혜는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라고 하지만 퍼스트레이디로 지내면서 받았던 훈련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기도 하고 어머니를 잃고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 이면에 이때의 슬픔에 대해 자서전에서는 ‘한분도 아니고 부모님 모두 총탄에 피를 흘리고 돌아가신 가혹한 이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핏물이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더 가혹한 시간은 그 다음에 찾아왔다. 박정희대통령을 계승한 신군부 인사들이 정권을 잡았지만 박정희에 대한 매도가 이어졌고 가까운 사람들조차 싸늘하게 변해가면서 박근혜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이후 6년간 아버지에 대해 공개적인 추도식도 하지 못하고 집에서 동생들과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권력의 정점에 있다가 하루아침에 아무도 찾지 않는 유폐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느낀 심정이 어떠했을까. 박근혜는 자서전에서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만큼 흉한 일도 없을 것이다. 상대의 믿음과 신의를 한번 배신하면 그 다음은 배신은 더 쉬워지며, 결국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퍼스트레이디대행으로 있는 동안 나는 나라 전체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권력의 상층부에 있었지만, 아버지 사후에는 밑바닥까지 경험했다. 수많은 매도 속에 몇 년의 시간을 버티며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고 쓰고 있다.

박근혜를 따라다니는 ‘고독한 얼음공주’ 등의 차가운 이미지와 사람을 쉽게 가까이 하지 않는 특성은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리라.

아픔과 분노의 시간이 지나면서 박근혜는 아버지 추모 사업을 통해 서서히 활동을 재개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아버지에게 덧 씌워진 오명을 벗겨드리겠다는 목표언론과의 인터뷰도 하고 추모사업도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박근혜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우리 사회에 잠재되어 있던 박정희시대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움직였다.

그러나 육영재단 등을 둘러싸고 잡음이 생기고 박근혜는 자신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아버지에 대한 추모사업 조차 집안 친척들과의 알력이 생기자 일체 두문불출하고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으며 깊이 자기 속으로 침잠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일에서 손을 놓고 얻은 휴식의 시간을 통해 여행과 사색 그리고 국선도 등의 운동을 통해 한결 사려 깊고 여유 있는 중년의 모습을 찾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27살이었던 박근혜는 18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다음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국민들 앞에 돌아왔다.

그 시간의 의미에 대해 박근혜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지금도 나는 내가 걸어온 18년이라는 세월이 은둔과 칩거로 치부될 때 쓴 웃음이 나온다. 그때도 나는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살고 있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대신했던 5년간의 퍼스트레이디 시절이 외적인 실력을 쌓은 시절이었다면 아버지의 죽음으로 맞이한 18년간의 칩거는 스스로 내공을 다지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2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를 그렇게 보내면서 형성된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각을 제대로 분석하는 것이 박근혜를 이해하는데 너무도 중요하다.

정치인 박근혜로 거듭 나다

(ⓒ폴리뉴스)
박근혜는 자신이 정치에 뛰어든 계기를 IMF 위기에서 찾고 있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처럼 어이없이 무너지나 하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고 ‘나라가 이렇게 흔들리는데 나 혼자만 편하게 산다면 훗날 죽어서 부모님을 떳떳이 뵐 수 있을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정치권에서는 박근혜가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회복 차원에서 결심했다고 보고 있다. IMF로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커지자 대선 패배 위기에 직면한 한나라당이 박근혜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고 박근혜 자신도 절묘한 타이밍에 결심했다.

1997년 12월 10일 대선을 8일 앞둔 시점에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인 이회창 후보 지지선언을 하고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전국을 돌며 지원유세를 하고 TV를 통해 지원연설도 했는데 국민들 반응은 뜨거웠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큰 힘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승패를 뒤집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한나라당은 최초로 야당이 되어 큰 충격에 휩싸였는데 1998년 4월 2일 재보궐 선거는 한나라당 운명에 중요한 고비가 되었다.

과거 아버지가 젊은 시절 교편을 잡았던 문경 예천에서의 출마를 생각했던 박근혜는 한나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대구 달성군에서 당시 여당후보에게 크게 뒤진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달성 출마를 권유하는 당 지도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어려움이클 것이란 예상을 뒤집고 결과는 대승을 거두었다. 존립의 위기에 흔들리던 한나라당도 다시 힘을 얻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2000년 4.13 총선 이후에는 당 지도부 선출과정에서 여성 당연직 부총재직을 거부하고 경선에 출마하여 자력으로 부총재에 당선되었다. 당시 언론사의 여론조사에서는 1위로 꼽혔지만 박근혜의 부상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이회창 총재 측의 견제로 2위에 그쳤다.

이때부터 박근혜 부총재는 당내 비주류로 정치개혁과 정당개혁을 주장하며 이회창 총재 측과 맞서기 시작했다. 결국 2002년 2월 27일 중앙위원회에서 자신이 주장한 당헌개정안를 관철하지 못하자 이튿날 박근혜는 탈당을 단행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을 통해 잃어버린 정권을 되찾기를 바라는 보수진영에서는 박근혜의 탈당에 대해 보수의 분열로 받아들여 마뜩찮은 시선을 보냈고 이때가 박근혜로서는 정치인으로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고 기회를 모색했지만 여의치 않자 박근혜는 한나라당이 자신이 내세운 정당개혁을 받아들인 것을 명분으로 다시 합류하여 이회창의 두 번째 대선 도전을 돕는다. 그 무렵 2002년 5월 11일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하고 금강산댐 공동조사, 이산가족 상설 면회소 설치 등의 합의를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정몽준 후보 측으로부터 연합을 제의 받았으나 그 측근에 김재규를 변호했던 강신옥 전 의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회동 자체를 거부했던 것도 박근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한 단면이라 할 것이다.

2002년 대선 패배 이후, 한나라당은 대선자금 수사로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고 박근혜는 대표경선에 출마하여 위기의 한나라당을 구할 선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잠실학생체육관에서 했던 연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저는 오늘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다‘고 한 충무공의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당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이후 천막당사로 옮겨 배수진을 치고 2004년 4.15 총선에서 전국을 도는 강행군으로 121석을 얻는데 성공하여 한나라당을 다시 위기에서 구했다. 2년 3개월 동안 한나라당 대표를 지내면서 4번의 재보선을 치르고 4번 모두 승리하여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기도 했고 집권당에 맞서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학법 개정을 막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민들에게 지나치게 수구 보수적인 이미지로 각인되기도 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 반면 한나라당 의원 다수가 반대하던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대해서는 16대 국회에서 한나라당 주도로 법안을 통과시켰던 만큼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끝까지 원칙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박근혜가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 할 것이다.

2007년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한 이후 깨끗이 승복하고 대선을 도왔고 이후 한나라당 내에서 다시 비주류의 길을 걸어 왔지만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1위를 한 번도 내주지 않고 고수하고 있다. 세종시 수정안 문제로 격돌했던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는 2010년 8월 21일 회동 이후 잠정적으로 타협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렇지만 2012년으로 가는 동안 여권 내부에서도 어떤 변수들이 나타날지 예측하기 어려우며 야권 또한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어 정치인 박근혜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주목하게 된다.

대화합(GREAT HARMONY)의 정치 가능할까

(ⓒ폴리뉴스)
이제 박근혜는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이다. 신뢰와 원칙, 애국심, 봉사정신, 절제된 언어, 바른 행동양식 등의 덕목들을 이미 갖추었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지지층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공주병, 보수적 권위와 국가주의 이미지, 소통과 포용력 부족, 대안 부재의 리더십, 개혁성 부족 등의 부정적 인식도 만만치 않다. 또한 그로 인해 지지층의 확장성에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박근혜 자신이 내건 바 있는 대화합의 정치가 가능할 것인지가 관건으로 보인다.

박근혜는 2001년 외신기자들과 회견 과정에서 자신의 영어 이니셜인 GH를 ‘GREAT HARMONY’(대화합)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박근혜가 생각하는 대화합은 지역간, 계층간 갈등의 해소,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동아시아의 지역협력 증진 등이라고 설명했는데 이는 김대중, 노무현대통령이 그대로 주장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내용이다.

그런데 박근혜를 둘러싸고 있는 한정된 면면들을 볼 때, 과연 대화합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것이 2012년을 바라보는 박근혜가 풀어 나가야 할 첫 번째 과제라 할 것이다. 또한 정치에 몸담은 이후 내놓은 정책들이 앞에서 말한 대화합의 방향과 일치하는 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지나치게 재벌 등 소수 특권층에게 관대하고 소외되고 가난한 약자들에 대한 배려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고 야당 시절 국가정체성을 내세우는 과정에서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정착과는 거리가 먼 정책들을 내놓았다고 볼 수도 있다. 최근 복지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입장을 개진하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구체성을 가질지 지켜볼 대목이다. 차기 대통령 감으로 국민들로부터 가장 큰 선호를 받고 있는 정치지도자로서 진정으로 대화합의 정치를 펼치고자 한다면 이제부터라도 각종 국정 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가감 없이 개진하고 국민들과 소통해야 할 것이다. 소통이 없이는 결코 화합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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