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자랑 '수원화성'에 관한 비밀.
- 작성자
- 강정우
수원화성의 비밀…34개월 초단기 완공 이유는?
수원화성은 전세계 많은 성들중에서도, 구조가 과학적이며, 실용적이며,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수원화성. 1997년 12월에 전세계 유네스코에 등재되어있는 수원화성 일본 히메이지성의 건축기간이 8년, 중국 자금성의 건축기간이 14년이 걸렸다는데, 우리나라의 수원화성은 34개월만에 엄청나게 빠른속도로 완공되었음. 수원화성의 축조는 1776년에 황위에 오른 조선 22대 황제 '정조 선황제'의 야심찬 꿈이기도 했음. 1794년 수원화성 축조를 명령한 '정조 선황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국방요새로도 사용하기 위하여, 수원화성을 건축하여, 완공시킨 '정조 선황제' 정약용,채제공,조심태 등 당대 최고의 실학자들이 수원화성축조에 참여토록한 '정조 선황제' 이들은 거중기,녹로 등의 신 기재 등을 특수고안하여, 무거운 석재 등을 옮기고. 쌓는데 이용하였음. 1796년에 완공된 수원화성. 성벽 길이만 6km에 달하며, 창룡문,화서문,팔달문,장안문 등 총 4개의 문과 마흔개 이상의 시설물을 갖춘 대규모 성. 건축전문가들에 의하면, 동서양의 축성물이 모두 지략되어 있는 성이라고 평가받음. '화성성역의괘'는 수원화성 축조에 관하여, 건축 당시에 관한 모든 내용을 기록한 책. 수원화성의 최초에 예상된 공사기간은 10년. 그런데 수원화성은 어떻게 34개월만에 완공 되었을까?
또한 '정조 선황제'는 부역을 하는 백성에게 일당을 챙겨주는건 물론, 하루를 채우지 못하고, 반나절만 일한 백성에게도 그에 합당한 인건비를 지급했으며, 부역 도중 부상을 당한 백성에게는 즉시 치료를 받게 했으며, 일당의 50%를 지급했음. '정조 선황제'의 이러한 조치에 부역에 참여하는 백성들은 늘어났으며, 수원화성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음. 당시에 털모자는 정 3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하는 양반 혹은 조선의 황족이 주로 사용했는데, '정조 선황제'는 부역을 하고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도 털모자를 하사했음.
수원화성 축조에 대한 꿈을 이루기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던 '정조 선황제' '정조 선황제'는 당시 부역에 임했던 백성들의 이름을 단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화성성역의괘'에 기록하게 하였음. 또한 '정조 선황제'는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 기존의 백성들 가옥에는 피해를 주지 않기위하여, 백성의 집을 피하여 공사를 하게 하였으며, 그로 인해, 수원화성은 한쪽면이 구불구불한 형태가 되었으며, 전체둘래 또한 처음의 설계보다 늘어났음. |
재위 | 1863년 ~ 190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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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 명성황후 |
부친 | 흥선대원군 |
모친 | 여흥부대부인 |
이전 황제 | 철종 장황제 |
다음 황제 | 융희 황제 순종 황제 |
고종은 경복궁 및 경운궁을 오가면서 경운궁(오늘날 덕수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개조를 명한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 시청 앞 서울광장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광장이 언제,어떻게 그런 모양새가 됐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광장을 만들고 있는 것은 이곳의 도로망이다. 6거리 곧 방사상 도로 체계는 서울에서 이곳 외에 다른데선 찾아 볼 수 없다.
이 도로 체계는 19세기 중반 파리의 개선문 일대에서 처음 등장해 미국 워싱턴 DC로 건너가면서 서양의 큰 도시들이 다투어 도입한 것이다. 서울광장의 6거리 체계도 정연한 형태는 아니지만 외형상 이에 속한다.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준 것으로 알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1882년 4월에 조선과 미국은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1887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과 그 수행원들은 미국 워싱턴 DC에 입성했다.
일행 중 번역관으로 참가한 이채연은 워싱턴 DC의 도시적 특징과 도시 행정을 공부했다.
또 일행 가운데는 월남 이상재도 있었다. 이들이 귀국해 1896년 9월부터 서울 도시개조사업을 폈다. 당시 박정양은 총리대신 겸 내부대신,이상재는 내부 토목국장,이채연은 한성판윤이 돼 이 일을 추진했다.
서울의 궁궐과 종묘는 모두 북쪽 산 아래에 배치돼 있다. 군주는 남쪽을 바라보면서 백성을 다스린다는 설을 따른 것이다. 유일하게 덕수궁만은 도심 가운데로 나와 있다.
경운궁(慶運宮)이 본명이다. 이 궁의 신축은 서울 도시개조사업과 함께 진행되었다. 새 궁이 지어지고 있을 때 주위의 도로 체계를 바꾸는 작업도 진행됐다. 소공로 같은 것은 넓히고,서소문로와 태평로는 새로 내서 방사상 체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워싱턴 DC에서 방사상 도로 체계의 구심점이 되는 곳은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두 곳이다.
서울의 방사상 도로의 구심점에 새로 지어진 경운궁은 곧 워싱턴 DC의 대통령궁(백악관)에 해당한다.
경운궁 내 서양식 건물 가운데 가장 크게 지은 석조전은 미국 백악관과 모양이 닮았다.
트루먼 대통령 때 건물 정면에 둥근 발코니를 새로 붙이기 전까지 그 건물의 외양은 서울의 석조전과 비슷했다.
박정양은 '워싱턴기'라는 글에서 이곳의 도시적 특징으로 도로 체계를 비롯해 기념물,공원,조각상 등을 자세하게 언급했다.
서울에도 기념물로 독립문이 세워지고 그 곁에 독립공원이 만들어졌다.
이어 원각사 자리를 정비해 탑골공원을 만들었다.
종로,남대문로 등 간선도로는 가가(假家)들을 철거해 도로를 확장한 뒤 철궤를 시설해 전차를 달리게 했다.
1899년 5월에 개통한 서울 전차는 도쿄보다 3년이 앞섰다.
개조 사업을 주관한 한성전기회사는 고종 황제와 미국계 콜브란-보스트윅사가 반씩 출자해 만든 회사로서 서울시장이 사장을 겸했다.
당시 ?~독립신문??은 이 모든 변화를 보도하면서 정부를 극찬했다. 1897년 말 독립문 준공 때는 사설을 통해 정부가 개화 의지를 보인 사업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독립신문 주필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을 지었다는 것은 독립신문과 혼동하여 생긴 잘못된 지식이다. 1897년 10월에 출범한 대한제국은 황성 만들기를 통해 근대국가 만들기와 산업근대화의 의지를 다졌다. 서울의 변모는 곧 황제의 개혁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고종황제의 개혁의지로 변모된 서울.
1896년 9월 29일 조칙(내부령 제9호)을 내려 도시 개조 사업을 한성 판윤 이채연·총세무사 맥레비 브라운에게 시행토록 한다. 그에 따라 독립문 건립을 독립협회로 하여금 추진토록 한다.
그리고 종래의 경복궁과 운종가 중심의 도로 체계 대신에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상 도로와 환상 도로 및 그 외접 도로를 새로 개통하였으며, 기존 도로를 정비한다.
또한 경운궁 앞은 백성들이 집회를 열 수 있도록 광장을 마련했는데, 이는 현재의 서울광장 위치이다.
그때에 시민공원 또는 시민광장도 등장했는데, 예컨대 탑골공원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대한제국 시절,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환구단
1898년에 고종 황제의 명령으로 대한제국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노면전차를 운행한다.
이것을 고종이 신문물에 대해 넓은 이해와 포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고종 황제의 어진
고종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을 예견하고, 고종은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였다.
고종은 말년에 덕수궁에서 생활했다.
1912년 5월 딸인 덕혜옹주가 태어나자, 그해 6월 그는 덕혜옹주를 자신의 딸로서 황적에 올리고 싶어하였다.
고종황제는 덕혜옹주를 몹시 사랑했다.
고종황제는 덕혜옹주를 위해 준명당에 유치원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고종황제는 덕혜옹주에게 사인교를 내렸다.
고종황제는 항상 덕혜옹주를 하루종일 눈 앞에 누고 보고 싶어했다.
고종황제는 식사를 할 때에도 덕혜옹주얘기를 항상 하였으며,
커피를 즐겨마실때에도 덕혜옹주를 항상 위하는 말을 하였다.
(고종황제는 커피를 즐겨 마셨던 황제였으며,
매일 아침마다, 상궁이 아침 커피를 준비해
고종황제께 올렸다.)
고종황제는 덕혜옹주만 보면, 항상 용안에 화색이 돌았다.
고종은 성대한 백일 잔치(혹은 돌잔치)를 차려놓고 조선총독부의 고관들과 이왕직 장관실의 관료들, 일본의 일부 지한파 귀족들까지 두루 초청, 단상에서 "이 애가 내 고명딸"이라고 발표했다.
일본에서 온 귀족들까지 이 장면을 목격하였으므로 조선총독부나 이왕직의 관료들 모두 덕혜를 황적에 올리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인의 평가
긍정적인 평가
외국인들의 개인적인 견해
고종 황제를 직접 만나본 외국인들은 대체로 고종의 해박한 지식과 과감한 정치 감각에 호의를 보였다.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는 “고종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극심한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고종이 명성황후 일가에게 끌려 다녔다는 그간의 평가와는 대조를 이룬다.
스워터트는 미국인 데니(O. Denny)가 남긴 평가, 즉 “고종은 위대한 국가의 지배자다운 강건, 낙관 및 인내를 보였다.”라는 평가를 지지하였다.
미국인 데니에게 청나라 이홍장은청나라 정책을 대변하는데 협조하길 기대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고종 황제의 고문이 된 미국인 '데니'는 고종황제의 개군주의 노력에 감동하여 오히려 청나라에 대해 조선을 변호하는 일을 업무로 삼아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특별한 이력은 조선의 평가 자체에 대해 신뢰성을 더해 준다. 그리고 고종이 고빙한 서양인 고문중 한 사람이자 개신교 선교사였던 미국인 헐버트(Homer Hulbert)는 고종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강하게 부정하였다. 그는 황제가 “유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견해는 틀렸다.”면서 고종이 주권 수호에 대한 확고한 의지 아래 사생결단의 조치를 단행했던 것들을 열거하였다.
한편, 고종황제 시절, 미국인 알렌은서울에 근대병원 광혜원을 세웠다. 광혜원은 뒷날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대한제국 전국에서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때 대한제국 국민들 뿐 아니라 미국 선교사들도 적극적으로 대한제국을 도왔다. 미국인 알렌은서울에 근대병원 광혜원을 세웠다. 광혜원은 뒷날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하였다.그리고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는 조선에 미국 스포츠를 전해주었으며,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에 의하여, 조선에 야구와 권투가 전해졌다. 그리고 미국인 '언더우드' 박사가 연희전문 (연세 대학교)을 설립했으며, 미국인 '스크랜턴 대부인'이 이화학당 (이화여대)을 설립하였다. 미국인 '아펜젤라'가 배재학당 (배재 중,고등학교,대학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미국인 헐버트 박사는 1886년 7월 대한제국의 초청을
받아 23세의 나이로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뒤,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출판하는 등 교육자로 활동하며 외교 자문관으로서 고종 황제를 보좌했다. 미국인 헐버트 박사는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코리언 레퍼지터리 잡지의 견해
고종에 대한 서양인의 평가는 1896년 10월에 간행된 《코리언 레퍼지터리》 3권 11책에 실린 〈대한제국의황제 폐하〉(His Majesty, TheEmperor of Korea)의 글이 가장 자세하다.
그 글에서 고종 황제가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것도 서양인들(코리언 레퍼지터리 잡지의 편집자들)의 시점에 따라 씌었기 때문에 객관성이 인정된다. 그들이 특별히 대한제국의 황제에게 아첨을 떨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고종의 교육 수준에 대해 폐하는 한문과 한글에 숙달하여 있다고 하였고,황제 자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나라 안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신하들이 잘 모르고 있는 전통 등에 대해 황제에게 물으며 그가 답해 주기도 한다고 적혀 있다.
황제의 집무에 대해서도 매우 부지런하며,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해낸다고 평을 하였다.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도 호평하여, 진보적이며 또한 다른 동양 나라와는 달리 서양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에 젖어 있지 않으며, 교육적인 일에 아주 관심이 많으며, 그리고 최근 수년 안에 이런 진보적 방향에서 물질적인 진보들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종교 면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관용으로 일관하였다. 황제의 성격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상냥하며 자비롭다고 말하면서 기자는 진실로 그의 나라의 복지와 진보를 열망하고 있다고 적었다.
대한제국 순종
재위 | 1907년 ~ 1910년 8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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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 |
부황 | 고종 |
모후 | 명성황후 |
이전 황제 | 고종 |
순종(純宗, 1874년(고종 11년) 음력 2월 8일(양력 3월 25일)~1926년 양력 4월 25일)은 대한제국의 융희황제(隆熙皇帝: 재위 1907년~1910년)이다.
휘는 척(拓),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정식 시호는 순종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장성한 자녀 중 유일한 적자이다.
대한제국 순종 황제
1874년에 고종과 명성황후의 이남으로 태어났으며 1875년에 황태자로 책봉
1897년에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1907년에 고종 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 하였다. 순종은 자식이 없던 관계로 이복동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봉하였다.
1910년 일제는 순종에게 한일 병합 조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순종은 조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다.
순종 황제는 말년에 창덕궁에 거처하였다.
순종 황제는 1926년 4월 25일 5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으며, 능은 유릉(裕陵)이다. 그의 장례식에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한일 합방이후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으나,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으로, 1963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국적회복하고 1966년 오랫동안 숙원하던 심신장애자 재활원인 자행회,
1967년에는 그의 아호를 빌린 신체장애자 훈련원 명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영친왕은 1970년 74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영친왕이 승하한뒤, 영친왕의 부인 마사코(한국명: 이방자)는 영왕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 교육시설인 자혜학교, 1982년 신체장애아 교육시설인 명혜학교 등을 설립하며 영친왕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한편,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을 도와주었던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장애인 복지사업에도 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 최초의 장애인 재활·복지시설인 정립회관은 박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면 설립이 불가능했다는 게 관련 인사들의 증언이다.
황연대(67)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부회장은 “당시 정부 관료들에게 장애인 복지 얘기를 꺼내면 ‘성한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장애인 복지냐’며 면박을 주던 때였다”며 “청와대의 지원이 없었다면 정립회관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육 여사가 사망한 뒤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도왔다.
1974년 12월 박 대통령은 공사 중단 위기를 맞은 정립회관을 위해 2억원의 ‘하사금’을 내렸는데, 이 돈은 당시 공식적인 대통령 하사금 중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1975년 정립회관 개관식 행사에는 육 여사 대신 박근혜씨가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정립회관의 현판 글씨를 직접 썼다.
우리 역사속의 감동 이야기
예로부터, 나라의 군주 '임금'은 백성의 민심을 살피기 위해,
가끔씩 신분을 감추고, 잠행을 다니곤 했다.
조선시대 임금들도 잠행을 하곤 했는데,
그 중에 잠행을 가장 자주했던 대표적인 군주가
'세종' '성종' '숙종' '정조' 를 꼽을수 있다.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은 잠행을 나왔다가
우연히 억울함에 처한 백성을 보고,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준적이 있으며,
그 백성의 부인이 딸을 출산하자, 백성의 집에 미역과 쌀을
전해주기도 했다.
한편, 충신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사육신'과 '생육신' 이다.
조선 6대 임금 이셨던 '단종' 대왕께 영원히 충성을 바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이개, 유성원.
이 인물들을 사육신 이라고 하며, 이들은 목숨으로서,단종 대왕께
충성했으며, 충절과 기개를 지켰던 인물이다.
한편, 스님이셨던 김시습,
그리고 선비였던 성담수, 이맹전, 원호, 남효온, 조여
이러한 인물들을 생육신 이라고 한다.
생육신 또한 충절을 지키며, 평생을 단종대왕께 충성을 바쳤던
인물들이다.
한편, 단종 대왕께 충성을 바친 인물들이 또 계셨으니,
그 중 한분이 '차성복' 이라는 농민이다.
'차성복'은 단종 대왕이 강원도 영월에 행차하셨을때,
매일 청령포에 있는 '단종' 대왕을 찾아뵙고, 지극정성으로
단종대왕을 모셨다.
뒷날 '단종' 대왕이 승하하신 뒤, 차성복은 상복을 입고,
자신의 집에 빈소를 모시고, '단종' 대왕의 명복을 빌었다.
뒷날 단종 대왕은 차성복의 집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때마다,
꿈속에 나타나, 차성복에게 조언을 해주었으며, 차성복의 집안은 번창 하였다.
또한 단종 대왕께 충성을 바친 인물이 공조판서 '엄흥도'.
'엄흥도'는 단종대왕이 승하하시자, 수의와 관을 마련해
단종 대왕의 장례를 올렸다.
충신 엄흥도의 시호는 '충의공'
또한 새로 부임한 영월부사는 단종 대왕의 묘에 제사를 지내드렸으며,
이 부사의 손자가 바로 조선 중종조 시절 명신으로 알려진 '박충원' 이다.
한편 그 일이 있고 시간이 흐른뒤, 조선 19대 임금 숙종 대왕은 진정한 충신 성삼문 등 사육신을 높이 평가하며, 복권시켜주고, 조선 6대 대왕께'단종' 이라는 묘호를 올려드렸다.
조선 6대 임금이셨던 '단종' 대왕께 '단종' 이라는
묘호를 올려드린 임금이 바로 조선 19대 임금
'숙종' 대왕 이시다.
한편, 조선 19대 임금 숙종 대왕은 소현세자빈
강씨를 복권시켜 민회빈으로 추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 9대 임금 성종
성종은 야밤에 잠행을 나왔다가 광통교 다리 밑에서,
왠 백성과 마주친적이 있다.
성종은 그 백성에게 어디서 왔으며, 누구길래, 광통교 다리 밑에
있느냐고 묻자, 그 백성은 자신은 경상도 에서 올라온
'김희동' 이라는 백성인데, 한양구경을 위해 올라왔다고 하는것이다.
'김희동'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상대가 임금 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김희동'은 성종에게 누구냐고 되물었으며, 성종은 자신을
'이 첨지' 라고 밝혔다.
그런데 '김희동' 이라는 백성이 성종에게 물어오길,
임금님 계신곳을 알려달라고 한다.
'김희동' 은 임금님께 드리고 싶어서, 해삼과 전복을 갖고 왔는데,
어떻게 임금님께 전해드려야 될지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을 들은 성종은 여전히 신분을 숨긴채로, 김희동에게
자신의 아는 사람이 궁궐에 있으니, 해삼과 전복을 자신에게 주면,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을 통해, 임금님께 전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김희동은 해삼과 전복을 성종에게 맡겼다.
당연히 이때까지 김희동은 자신이 임금을 직접 만났으며,
임금에게 전복과 해삼을 직접 전해드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성종은 김희동에게 받은 해삼과 전복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일 뒤, 김희동에게 연락이 왔다.
성종 임금의 어명으로, 김희동에게 '충의' 벼슬을 하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희동'은 한양구경왔다가, '충의' 라는 벼슬을 받게 되었다.
한번은 성종이 또 잠행에 나섰는데, 정릉골목에서, 나무꾼과 마주쳤다.
나무꾼은 과천에서 올라온 나무장수인데, 나무를 팔지 못해 걱정이라고 하자, 성종은 나무꾼이 갖고 있는 나무를 전부 샀다.
성종은 나무꾼에게 나무값을 후하게 주었다.
또 한번 성종은 엄동설한에 잠행을 나와서, 선비들이 많이 사는
남산골로 향했다.
남산골에서, 굶주린 목소리로 글을 읽는 선비를 보고, 성종은
무감에게 명하여, 쌀과 고기를 그 집 마당에 푸짐히 던져주었다.
또 성종은 본인이 아꼈던 신하 중에 한명인 '손순효' 대감에게
'은잔'을 하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임금이 조선 13대 임금 명종.
명종은 일찍이 '이원익' 에게 산삼을 하사 한바 있다.
일찍이 이준경 대감은 명종 임금에게 '이원익' 이라는 젊은이가
유능한 인재라며, 추천했으며, 명종은 이원익에게
산삼 20근을 하사 하였다.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이원익은 청렴한 관리로
국가를 위해 일 했으며, 뒷날 영의정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된다.
이원익 대감은 조선 15대 대왕, 광해군 시절 영의정을 지냈으며,
조선 16대 '인조' 임금 시절에도 영의정을 지냈다.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이원익 대감은 말년에 임금으로부터
'궤장'을 하사 받았다.
'궤장'은 임금이 내린 지팡이를 말하는 것이다.
'궤장'을 하사받은 신하는 임금 앞에서 그 지팡이를 짚어도,
전혀 문제 될게 없다. 그만큼 '궤장'은 진정한 나라의 공신들만 받을수 있는 물건이다.
이렇게 나라를 위하여 큰 공을 세웠던 이원익 대감.
이원익 대감이 돌아가셨을때에는, 임금의 명으로
나라에서, 이원익 대감의 장례비 일체를 대주었다.
한편,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며, 전공을 세운 의병장
'김덕령'
그는 의병장 시절,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궐기하자,
왕세자 '광해군'은 그에게 '호익장군' 이라는 칭호를 내려주며,
그에게 '호익' 이라는 글이 쓰여진 깃발을 하사했으며,
그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조선 14대 임금)은 '김덕령'에게 말 한필을 하사했다.
김덕령 장군은 돌아가신 뒤,
조선 22대 임금 정조 선황제에 의하여,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물리친,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 장군의 참모 중에 '정충신' 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정충신은 어릴적부터 무예가 뛰어나고, 머리가 비상하여,
그의 명성을 선조 임금도 알게 되었으며,
선조 임금은 오성 이항복 대감으로 하여금 '정충신'에게 글을
가르쳐주도록 했다.
정충신은 문무 겸비한 인물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무관으로 벼슬을 살게 되었다.
그 뒤 정충신은 권율 장군의 막내 사위가 되어,
오성 이항복 대감의 동서가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임금이 바로 조선 17대 임금 효종 대왕.
효종의 심복 중 '논학' 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논학'은 충의를 아는 인물이었으며, 매우 강직했다.
효종 대왕은 '논학'에게 벼슬을 주려했으나, '논학'이 벼슬을 계속 사양하자, 효종 대왕은 '논학'에게
효종 본인이 입었던 '돈피'(돼지 가죽) 옷을 하사했다.
'논학'은 임금에게 받은 평생 이 옷을 소중히 간직했다고 한다.
한편, 효종 대왕 시절, 김언겸 이라는 93세된 늙은 내시가 있었는데,
효종 대왕은 항상 가까이두고, 그에게 삼시세끼 '어찬'을 내렸다.
그는 젊은시절부터, 강직하고, 충의를 아는 인물이라,
효종 대왕은 그에게 '어찬'을 내리며, 항상 보살펴 주었던 것이다.
또 잠행을 자주했던 임금이 조선 19대 임금 숙종 대왕
숙종대왕이
수원성 고개 아랫쪽 냇가(지금 수원천 부근)를
지날 무렵 허름한 시골 총각이 관 하나를 옆에
놔두고 슬피 울면서 땅을 파고 있는게 아닌가.
상을 당해 묘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파는 족족 물이 스며 나오는 냇가에 묘자리를
파고 있는 더벅머리 총각의 처량한 모습에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 유분수지 어찌
송장을 물속에 넣으려고 하는지 희한도 하다"
그래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며 다가갔다.
"여보게 총각, 여기 관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님 시신입니다"
"여기는 왜 파고 있는고?"
(짐짓 알면서 딴청으로 묻는다)
"묘를 쓰려고 합니다."
짐작은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숙종이다.
"여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와
절더러 불쌍타 하면서 이리로 데려와
이 자리에 묘를 꼭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지관인데,
저기 저 언덕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총각은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곤혹스런 처지를
처음 보는 양반나리에게 하소연하듯 아뢰었다.
숙종이 가만히 듣자하니
갈처사라는 지관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궁리 끝에
지니고 다니던 지필묵을 꺼내어 몇 자 적었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들이
성문을 가로 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총각은 또 한 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냇가에 묘를 쓰라고 했지
이번에는 왼 선비가
갑자기 나타나 수원부에 서찰을 전하라 하지.
도무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급한 발걸음으로 수원부로 가게 되었다.
서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수원부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총각에게 유명한 지관이 동행되지 않나,
창고의 쌀이 쏟아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 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자기 어머니 시신을 지키고 서 있을
임금을 생각하니, 황송하옵기가 말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편 숙종은
총각이 수원부로 떠난 뒤 단단히 혼을 내 주려고
총각이 가르쳐 준 갈처사가 산다는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단단히 벼르고 올라간 산마루 찌그러져가는
단칸 초막은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
"이리 오너라"
한참 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락없는 꼬질꼬질한 촌 노인네 행색이다.
콧구멍만한 초라한 방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다.
숙종은 그대로 문밖에서 묻는다.
"나는 한양 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처사 맞소?"
"그렇소만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소?"
"오늘 아침 저 아래
상당한 총각더러 냇가에 묘를 쓰라했소?
"그렇소"
"듣자니 당신이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니 당치나 한 일이요?
골탕을 먹이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
숙종의 참았던 감정에 어느새 격해저
목소리가 커졌다. 갈씨 또한 촌노이지만
낮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비란 양반이 개 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터인 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숙종은 기가 막혔다.
(속으로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디
잠시 두고 보자 하고 감정을 억 누르며)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이 양반아 저기는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3백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 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받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시오"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처사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3백가마를 받았으며
명당으로 옮겨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숙종은 갈처사의 대갈일성에 얼마나 놀랬던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공손해 진다.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등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 않고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 이 양반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을 것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숙종은 이제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저 아래 것들은 남 속이고 도둑질이나 해 가지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 가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도 여기는 바로 임금이 찾아올 자리여.
지금 비록 초라하지만
나랏님이 찾아올 명당이란 말일세"
숙종은 그만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이런 신통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다.
꿈속을 해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왕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 오시네.
잠시 기다려 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면서 방 귀퉁이 보자기를 풀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보더니......
그만 대경실색을 한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다.
임금을 알아본 것이다.
"여보게.... 갈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뭍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오"
"대왕님의 덕이 높으신데 제가 신하로서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어느 분의 하명이신데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처사가 잡아준 숙종의 왕릉이 지금
서울의 서북쪽의 서오릉에 자리한 "명릉"이다.
그 후 숙종대왕은 갈처사에게
3천냥을 하사하였으나, 노자로 30냥만 받아들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
*
신묘 하도다 갈처사여
냇가에 묘를 쓰고 산마루 언덕에 초막을 지으니
음택 명당이 냇가에 있고
양택 명당은 산마루에도 있구나.
임금을 호통 치면서도 죄가 되지 않으니
풍수의 조화는 국법도 넘어가네.
볼품없는 초라한 몸이라도
가난한 이웃에게 적선하고
나랏님께 충성하노니
그 이름 역사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이 얘기가 바로 유명한 조선 19대 임금 이셨던 숙종 대왕과
'풍수 갈처사' 에 관한 일화 입니다.
숙종 대왕은 경제발전과 국방력 강화를 비롯하여, 여러 업적을 남기신 업적 이십니다.
숙종 대왕은 백성의 민심을 살펴보기 위하여, 신분을 숨기고
잠행을 자주 하셨던 임금 중 한분 이십니다.
숙종 대왕의 잠행 얘기 중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숙종 대왕이 엄동설한 겨울에 잠행을 나와,
선비들이 많이 사는 남산골에 갔을때,
한 초가집에서, 몹시 굶주린 듯한 사람이 글을 읽는소리를 듣고는
숙종 대왕이 그 초가집에 보자기를 하나 던져주고 갔습니다.
밖에서 난 소리를 듣고, 마당에 나온 선비는 보자기를 발견하고
풀어보자, 보자기 안에는 따뜻한 약밥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선비는 그 약밥을 먹고, 기운을 차려 계속 공부를 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비가 약밥을 먹고, 보자기 안을 보니, 보자기 안에는
'마제은' 이 또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말 모양의 은으로 된 장신구 말입니다.
'마제은'을 시장에 내다팔면, 상당한 돈이 될수 있습니다.
숙종 대왕은 선비를 돕고자, 보자기에 ' 따뜻한 약밥'과 '마제은'을
집어넣어, 선비의 집에 전해주고 간 것 이었습니다.
한편, 숙종의 도움으로 약밥을 먹고 기운을 차린 선비는
공부를 계속하여, 그 이듬해, 과거에 급제하여
숙종을 보필하게 됩니다.
그 선비가 바로 청렴한 관리로 알려진 '이서우' 입니다.
그런데 '이서우'는 보자기에 들어있던 '마제은'은 팔지 않고
계속 집에 보관을 해 두었습니다.
'마제은'이 누구의 것인지 몰라, '이서우'는 마제은을 팔지 않고,
집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7년 뒤, 숙종이 대보름날 신하들과
대보름 잔치를 베풀고, 즐기는데,
이 자리에서 숙종이 갑자기 남산골 선비가 생각난듯,
신하들 앞에서 잠행 나갔을때의 얘기를 하자,
'이서우'는 깜짝 놀라며, 숙종에게 엎드려 절하며,
그때 선비는 바로, '이서우' 본인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자 숙종은 매일 마주하는 신하가 그때 선비라는게 믿기지
않았는지, '이서우'에게 보자기 안에 또 다른것은 없었냐고 물었으며, '이서우'는 보자기 안에서 '마제은'을 발견했다고 말을 합니다.
'이서우'의 청렴함에 감동한 숙종은 '이서우'의 벼슬을 올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21대 임금, 영조 대왕.
영조 대왕의 사주는 4술갑생이다.
즉 갑술년, 갑술월,갑술일,갑술시에 태어났다는 소리다.
자고로 4갑술생은 제왕이 될 운명이라고 하자, 영조는 어명을 내려,
4갑술생 백성을 찾아오라고 한다.
영조의 명으로 강원도 농부가 한양에 올라왔다.
강원도 농부 역시 4갑술생 이었던 것이다.
영조는 농부에게 왜 그대는 4갑술생이면서, 농부냐고 묻자,
농부는 영조에게 본인도 제왕 부럽지 않다고 말을 한다.
농부의 자식들이 8형제 이니, 조선 8도와 같으며,
농부가 벌통 360통을 키우니, 조선 전체 군,읍 (360개의 고을) 수와
똑같으며, 농부가 키우는 벌이 7백만 마리이니, 당시 조선 인구와 똑같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영조는 크게 웃으며, 농부에게 많은 재물을 하사하고,
명예로운 벼슬도 하사했다.
한편, 조선시대, 잠행을 자주 나갔던 임금 중 한분이
조선 22대 임금 정조선황제 이었다.
정조선황제는 신분을 감추고 남산골로 잠행을 나갔다.
남산골에 잠행을 나간 정조 선황제는 왠 선비가 나무둥지 위에 올라가
까치 울음소리를 내는것을 보았다.
정조 선황제가 선비에게 연유를 물으니,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점쟁이 말을 듣고, 그렇게 행동한다고 했다.
정조 선황제가 선비와 대화를 나눠보니, 선비의 학식이 보통이 아니었다.
정조 선황제는 그 뒤에 과거 시험을 실시할때, 과거 시제를
(남쪽 까치둥지에 사람이 둥지를 틀었다.) 라는 내용을 문제로
내었으며, 과거 시험장에서 이 문제에 접한 선비는
그제서야, 자신과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 정조 선황제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조 선황제의 배려 덕분에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받을수있었다.
한편, 정조선황제는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을 높이 평가했다.
학식이 뛰어나며, 안목이 깊은 박지원이 벼슬자리에 없다는것을
안 정조 선황제는 '박지원'에게 벼슬을 내렸으며,
이 덕에 자유분방한 '박지원'은
'면천군수', '양양부사'를 지내게 되었다.
한편, 정조선황제시절, '왕한상' 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왕한상'은 어린시절, 주막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틈만나면, 품속에서 책을 꺼내 읽으며,
길을 갈때에도 글을 계속 읽었다.
'왕한상'이 하도 글에 몰두하니, 주모는 감탄해
매일 저녁 초 한자루씩을 주었으며,
'왕한상'은 이 초에 촛불을 켜고, 글을 읽었다.
그러다 그는 궁궐에 취직이되어,
창덕궁 금호문 지기가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왕한상이 밤에 근무를 하며, 시를 읊었는데,
지나가는 윤행임 대감이 이 시를 듣더니, 탄복하여, 그를 임금
앞으로 데려갔다.
정조선황제는 '왕한상'에게 시를 지어보라고 한뒤,
시를 보고 감탄하여, 임시군졸이었던
'왕한상'에게 정식군졸을 임명하여,
'왕한상'은 정식으로 녹봉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정조선황제는 '왕한상'을 '중학'에 나가 공부할수 있도록
배려했다. (중학은 조선시대 5부 학당 중 중앙에 위치한 학당으로,
성균관에서 이를 관리했다.)
그 뒤에 '왕한상'은 정조 임금 덕에 무과에 급제하여,
문경새재를 지키는 별장이 되었다.
그는 평생을 시를 즐기며, 편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24대임금헌종 성황제
헌종성황제 시절, '허련' 이라는 그림솜씨가 아주 뛰어난 화가가 있었다.
'허련'의 호는 소치
'소치 허련'의 가장 큰 후원자 중에 한 분이 바로 헌종 성황제.
소치 허련은 헌종 임금의 배려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받고, 궁궐에 출입할수 있었다.
헌종성황제는 '소치 허련'에게 과객비로 300금 (약 1천만원)을 하사하기도 했으며, (필홍),(어장),(시법입문)(4권) 같은 서적을 하사하기도 했다.
책을 보관하는 오동나무 상자에 헌종성황제가 직접 '시법입문' 이라고 쓴 글이 써있다.
지금 (시법입문)은 전남 진도의 양천 허씨 운림산방에서
그러니까 허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25대 황제 철종 장황제.
'철종 장황제'는 빈민 구제책이나 이재민 구휼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임금이다.
'철종 장황제'는 민생을 돌보는 데 남다른 애정과 성의를 보였다.
1853년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 냥을 민간에 대여해주도록 하였고, 또 그 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이를 안타까이 여겨 이재민 구재와 함께 왕실재정절약에 힘썼다.
1856년 봄에 화재를 입은 1천호의 민가에 은전과 약재를 내려
구휼하게 하였으며, 함흥의 화전민에게도 3천냥을 지급하였다.
그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천냥, 단목 2천근,
호초 2백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 구제에 성의를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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