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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옛 모습 ‘꿈엔들 잊힐리야’

수원의 옛 모습 ‘꿈엔들 잊힐리야’
[수원사람] 향토화가 윤한흠 선생, 수원ㆍ화성행궁 옛 모습 화폭에 담아
2007년 01월 22일 (월) 박장희 기자 jjang362@suwon.com

▲ 윤한흠 선생이 자신의 작품 24점이 수록된 ‘되살아난 수원의 옛 모습’을 보며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박장희 기자 jjang362@suwon.com

‘영화동 만석거의 연꽃이 만들어 냈던 장관, 7살 어린 시절 개구리 헤엄치며 놀던 수원천의 임시 수영장, 술래잡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던 장안동 연자방앗간, 중동 네거리 근처의 거북산…’

대부분의 수원 시민에겐 생소할 수 있는, 한국 전쟁 이후 급격한 도시화로 사라진 수원과 화성행궁의 옛 모습이다.

자칫 기억의 조각으로 사라질 뻔한 수원의 옛 풍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한 것은 향토화가 윤한흠 (85) 선생의 8년에 걸친 집념과 노력 덕분이었다.

1923년 남창동에서 출생한 윤 선생은 유달리 손재주와 기억력이 탁월했다. 윤 선생은 화가수업을 받지 않았음에도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시절 그림을 그렸다 하면 학급 게시판에 게시될 정도였으며, 청년기엔 기계 설계도를 직접 그릴 정도로 솜씨가 빼어났다.

이후 동서기, 양화점, 식품 장사 등 생업에 몰두하면서도 연필과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윤 선생이 수원과 화성행궁의 옛 모습을 화폭에 담게 된 계기는 죽마고우의 권유에서 비롯됐다.

장안동에 살며 윤 선생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 홍사악(전 서울대 약대 교수, 1989년 작고)으로부터 “너(윤한흠 선생)는 기억력이 좋고 손재주가 많으니 수원의 옛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보는게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게 된다.

▲ 1999년 12월 29일 자신의 작품을 모아 마련된 특별전시회에서 당시 수원시장이었던 심재덕 의원으로부터 수여한 감사패 앞에서의 윤한흠 선생. ⓒ박장희 기자 jjang362@suwon.com

1972년(수원시 자료기준, 윤한흠 선생은 1976년으로 기억)부터 윤 선생은 ‘화성성역의궤’의 화성전도와 제보자의 고증, 일제 시대 지적도를 자료삼아 수원과 화성행궁 곳곳을 누비며 옛 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다.

이로써 윤 선생의 손끝에서 다시 살아난 수원의 옛 모습은 화홍문과 주변의 방화수류정과 육지송, 동장대, 거북산, 대유평 거송숲길, 대황교, 매향교, 화서동과 세류동 서낭당, 영화정과 만석거 등 옛 풍경은 물론 당시 생활상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또, 팔순의 고령이지만 윤한흠 선생이 풀어낸 화성행궁 안 옛 시설물에 대한 기억들을 또렷하기만 했다.

시신이 드나들었다는 일명 시구문(屍軀門ㆍ남암문), 성안의 감옥자리인 옥거리였던 화성학원(수원고교의 전신), 장마 홍수로 유실된 9간 수문, 남수문 뿐만 아니라 현재 선생이 거주하고 있는 다세대 주택이 일제시대 수원재판소 자리였다는 사실까지.

1990년 들어 윤한흠 선생의 24점의 작품은 양종천 전 수원시의회 의원이 당시 도시계획과장이었던 김충영 화성사업소장에게 그림의 존재를 알리면서 빛을 보게 됐다. 마침대 1999년 12월 29일 만석공원내 수원미술전시관에서 특별전시회를 통해 선생의 작품이 세상에 드러났다.

눈을 감으면 다시 보고 싶은 만석거, 주위에 참외밭이 많았던 대유평 거송 숲길, 거북산, 죽무고우와 고기잡기했던 화홍문 주변 등이 영상처럼 떠오른다는 윤 선생.

다리가 불편해 제대로 앉지 못할 정도로 연로해졌지만, 손수 기록해 온 ‘나의 한 평생’이란 공책과 함께 옛 기억과 추억을 떠올리는 윤한흠 선생의 모습은 정지용 시인의 ‘향수’에 나오는 구절처럼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말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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