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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윤한흠 선생 별세, 화성을 사랑한 수원토박이… 과거를 선물하다/ [2]수원의 옛 모습 ‘꿈엔들 잊힐리야’ - (1990년 들어 윤한흠 선생의 24점의 작품은 양종천 전 수원시의회 의원이 당시 도..

[1]윤한흠 선생 별세, 화성을 사랑한 수원토박이… 과거를 선물하다/ [2]수원의 옛 모습 ‘꿈엔들 잊힐리야’ - (1990년 들어 윤한흠 선생의 24점의 작품은 양종천 전 수원시의회 의원이 당시 도시계획과장이었던 김충영 화성사업소장에게 그림의 존재를 알리면서 빛을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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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윤한흠 선생 별세, 화성을 사랑한 수원토박이… 과거를 선물하다/

[2]수원의 옛 모습 ‘꿈엔들 잊힐리야’ - (1990년 들어 윤한흠 선생의 24점의 작품은 양종천 전 수원시의회 의원이 당시 도시계획과장이었던 김충영 화성사업소장에게 그림의 존재를 알리면서 빛을 보게 됐다.)

[3]게재되었던 과거 사이트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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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한흠 선생 별세, 화성을 사랑한 수원토박이… 과거를 선물하다

신병근 bgs@joongboo.com 2016년 08월 25일 목요일

 

 

수원화성 옛모습 그렸던 윤한흠 선생 별세… 향년 93세
전쟁 후 변하는 모습 아쉬워
증언·기억 토대로 그림 남겨…복원사업 추진에 큰 기여
▲ 24일 수원고에서 열린 故 윤한흠 선생 장례식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왼쪽)이 유종에게 감사장을 헌정하고 있다. 사진=수원시청
자신의 기억과 토박이 어르신들의 증언을 토대로 수원화성(華城)의 과거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윤한흠(尹漢欽) 선생이 지난 22일 향년 93세로 별세했다.

윤 선생은 1923년 수원 남창동에서 태어났다. 평생을 수원에서 보낸 그는 50이 넘어 전쟁과 개발로 변해가는 수원화성 일대 모습이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는 붓을 들기 시작한 동기다.

윤 선생은 그림으로 당시의 정서와 감정, 열정을 생생히 담았다. 자신의 기억과 지역 어른들의 증언은 그림의 토대가 됐다. 변형되기 이전 수원화성의 모습은 이렇게 남겼졌다. 작품마다 울창한 소나무가 등장하는 것이 윤 선생 그림의 특징이다. 이는 솔씨 이만섬을 내려 수원화성 곳곳을 푸르게 만들려고 했던 정조(正祖)의 뜻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된다.

윤 선생은 1990년대 후반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거북산과 대황교를 비롯해 수원화성의 옛 모습을 담은 그림 23점을 수원시에 기증했다. 1999년 수원미술전시관에서 윤 선생의 그림을 모아 ‘되살아난 수원의 옛 모습’을 개최한 데 이어 2012년 2월 23일부터 4월 1일까지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수원화성그림전 ‘용을 품은 도시 수원화성’을 열었다.

윤 선생은 1938년 화성학원(현 수원중·고등학교의 전신)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해방되던 해에 귀국해 수원역 앞에서 양화점을 경영했다. 이어 1957년 영동시장에서 천덕상회를 운영하고 1981년부터는 종로사거리에서 화홍예식장을 운영하면서 작품활동을 병행했다. 그는 2002년 자신의 모교인 수원고등학교에 장학금 5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윤 선생의 장례식은 24일 오후 수원고에서 재학생과 동문 등 500여명 참석한 가운데 총동문회장으로 거행됐다. 이 자리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이 감사장과 도록을 유족에게 헌정했다.

염 시장은 감사장에서 “윤 선생님께서는 화성을 사랑하는 남다른 열정으로 그림으로 남겨 우리가 보지 못했던 한국전쟁 이전 수원화성의 아름다운 화성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줬고, 그분의 작품 덕분에 화성 복원사업이 온전하게 추진됐다”면서 “참다운 수원사람이셨던 윤 선생님의 영전에 감사를 드린다”고 추모했다.

신병근기자/bgs@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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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원의 옛 모습 ‘꿈엔들 잊힐리야’ - (1990년 들어 윤한흠 선생의 24점의 작품은 양종천 전 수원시의회 의원이 당시 도시계획과장이었던 김충영 화성사업소장에게 그림의 존재를 알리면서 빛을 보게 됐다.)

 

 

[수원사람] 향토화가 윤한흠 선생, 수원ㆍ화성행궁 옛 모습 화폭에 담아
2007년 01월 22일 (월) 박장희 기자 jjang362@suwon.com
   
 
  ▲ 윤한흠 선생이 자신의 작품 24점이 수록된 ‘되살아난 수원의 옛 모습’을 보며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박장희 기자 jjang362@suwon.com  
 

‘영화동 만석거의 연꽃이 만들어 냈던 장관, 7살 어린 시절 개구리 헤엄치며 놀던 수원천의 임시 수영장, 술래잡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던 장안동 연자방앗간, 중동 네거리 근처의 거북산…’

대부분의 수원 시민에겐 생소할 수 있는, 한국 전쟁 이후 급격한 도시화로 사라진 수원과 화성행궁의 옛 모습이다.

자칫 기억의 조각으로 사라질 뻔한 수원의 옛 풍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한 것은 향토화가 윤한흠 (85) 선생의 8년에 걸친 집념과 노력 덕분이었다.

1923년 남창동에서 출생한 윤 선생은 유달리 손재주와 기억력이 탁월했다. 윤 선생은 화가수업을 받지 않았음에도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시절 그림을 그렸다 하면 학급 게시판에 게시될 정도였으며, 청년기엔 기계 설계도를 직접 그릴 정도로 솜씨가 빼어났다.

이후 동서기, 양화점, 식품 장사 등 생업에 몰두하면서도 연필과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윤 선생이 수원과 화성행궁의 옛 모습을 화폭에 담게 된 계기는 죽마고우의 권유에서 비롯됐다.

장안동에 살며 윤 선생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 홍사악(전 서울대 약대 교수, 1989년 작고)으로부터 “너(윤한흠 선생)는 기억력이 좋고 손재주가 많으니 수원의 옛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보는게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게 된다.

   
 
  ▲ 1999년 12월 29일 자신의 작품을 모아 마련된 특별전시회에서 당시 수원시장이었던 심재덕 의원으로부터 수여한 감사패 앞에서의 윤한흠 선생. ⓒ박장희 기자 jjang362@suwon.com  
 

1972년(수원시 자료기준, 윤한흠 선생은 1976년으로 기억)부터 윤 선생은 ‘화성성역의궤’의 화성전도와 제보자의 고증, 일제 시대 지적도를 자료삼아 수원과 화성행궁 곳곳을 누비며 옛 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다.

이로써 윤 선생의 손끝에서 다시 살아난 수원의 옛 모습은 화홍문과 주변의 방화수류정과 육지송, 동장대, 거북산, 대유평 거송숲길, 대황교, 매향교, 화서동과 세류동 서낭당, 영화정과 만석거 등 옛 풍경은 물론 당시 생활상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또, 팔순의 고령이지만 윤한흠 선생이 풀어낸 화성행궁 안 옛 시설물에 대한 기억들을 또렷하기만 했다.

시신이 드나들었다는 일명 시구문(屍軀門ㆍ남암문), 성안의 감옥자리인 옥거리였던 화성학원(수원고교의 전신), 장마 홍수로 유실된 9간 수문, 남수문 뿐만 아니라 현재 선생이 거주하고 있는 다세대 주택이 일제시대 수원재판소 자리였다는 사실까지.

1990년 들어 윤한흠 선생의 24점의 작품은 양종천 전 수원시의회 의원이 당시 도시계획과장이었던 김충영 화성사업소장에게 그림의 존재를 알리면서 빛을 보게 됐다. 마침대 1999년 12월 29일 만석공원내 수원미술전시관에서 특별전시회를 통해 선생의 작품이 세상에 드러났다.

눈을 감으면 다시 보고 싶은 만석거, 주위에 참외밭이 많았던 대유평 거송 숲길, 거북산, 죽무고우와 고기잡기했던 화홍문 주변 등이 영상처럼 떠오른다는 윤 선생.

다리가 불편해 제대로 앉지 못할 정도로 연로해졌지만, 손수 기록해 온 ‘나의 한 평생’이란 공책과 함께 옛 기억과 추억을 떠올리는 윤한흠 선생의 모습은 정지용 시인의 ‘향수’에 나오는 구절처럼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말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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