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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인물탐구 | 정치인의 기질과 운명론] 김문수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 - “한반도 분단은 세계적 리더 배출할 어마어마한 에너지원 될 것”

[조용헌의 인물탐구 | 정치인의 기질과 운명론] 김문수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 - “한반도 분단은 세계적 리더 배출할 어마어마한 에너지원 될 것”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선비가문 유전자 각인 … 고생 타고난 팔자를 강한 의지와 현실감각 키우는 도량으로 삼아

조용헌 원광대 불교학 박사
김문수는 시야가 넓다. 좌와 우, 노와 사, 동과 서, 남과 북을 모두 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원칙을 세우고 약자를 돌봐야 하는 시점에는 김문수 같은 청렴하고 신념형의 지도자가 부상한다. 그러나 너른 시야와 올곧은 신념만으론 안 된다. 실천의 방략이 있어야 한다. 그는 과연 어떤 지혜와 실력으로 새로운 국가경영을 모색하고 있는가?

▎김문수는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신기독(愼其獨)’을 꼽는다. “남이 보지 않는 혼자 있는 시간에 자기를 점검하고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김문수를 만나보니 산양(山羊)의 관상이었다. 턱에 비해 이마가 넓은 편이고, 눈은 맑다. 서재에 틀어박혀 오랫동안 고서를 탐독한 사람의 눈을 갖고 있다. 산양을 한국에서는 염소라고 부른다. 자세히 분류하면 약간 틀리기도 하지만 크게 보면 산양과 염소는 같은 과다. 보통 털 깎는 양은 평지의 목장에서 키우지만, 산양은 산에서 서식한다. 산에서 사는 양이 산양인 것이다. 산양은 험한 바위 절벽에도 잘 올라간다.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낭떠러지 같은 곳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는 습성을 지닌 동물이 염소다. 평지의 평탄한 곳에서 사는 동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염소는 왜 낭떠러지 절벽으로 가는가? 다른 육식 동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공격을 차단할 수 있다. 어찌되었건 간에 산양은 절벽 험한 바위를 옮겨 다니며 풀을 뜯는 습성이 있어서 고생을 타고난 팔자라고 볼 수 있다. 김문수의 인생도 지나고 보니까 절벽에서 풀을 뜯는 산양의 인생을 살았다. 염소는 고기를 먹지 않고 풀을 먹는다. 채식이다. 김문수의 삶을 보니까 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육식을 못 하니까 돈도 못 먹는다. 염소는 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습성이 있다. 관점이 높다. 이걸 고소(高所)의 사상이라 부를 수 있다. 높은 데로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봐야 사상이 형성된다. 저소(低所)에서 살면 사상 형성이 어렵다. 같은 물에서만 놀다 보면 관점이 생기기 어렵다.

그러나 높은 절벽 올라가기가 그리 쉬운가? 손에 피를 흘리면서 올라가야 한다. 물을 바꾸기가 그리 쉽던가? 같은 물이 편하지. 물을 바꿔 먹으면 배탈이 난다. 그래서 높은 데 못 가고, 물 바꾸기 힘든 것이다. 김문수는 시야가 넓었다. 좌와 우, 노와 사, 동과 서, 남과 북을 모두 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절벽 위에 자주 올라갔기 때문에 넓은 시야를 갖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산양의 관상을 가진 인물은 정치로 가기보다는 학계로 가서 학자로 사는 것이 더 맞다.

“청렴하면 영생, 부패하면 즉사”


▎김문수(왼쪽)와의 대담은 4월 8일 한강 유람선 안에서 이뤄졌다. 그는 “돈이 들지 않는 정치구조는 선출직의 국민경선제 실현이 그 첫걸음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생이 최선의 카드만 뽑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찌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되던가? 차선도 뽑아야 하고, 삼선책도 택해야 하는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시대 따라, 자기가 태어난 환경 따라서 선택이 달라진다. 1970년대 독재정권의 시대에 성장한 염소가 정치라고 하는 이종격투기 장으로 들어간 것이다. 육식동물이 우글거리는 이종격투기 장으로 채식동물인 염소가 입장한 셈이다. 채식이라고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벼슬도 했다. 국회의원 세 번, 도지사 두 번 했으니까 육식동물 못지 않은 관록을 쌓았다.

그동안 경기지사를 두 번 했다. 경기지사 시절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우호적이다. 전체 공무원조직이 청렴해졌고, 기업도 경기도에 많이 유치한 공이 있다고 들었다.

“경기지사를 2006년에서 2014년까지 8년 했다. 조선조의 경기관찰사부터 따진다면 내가 689대 관찰사다. 관찰사들이 평균 1년을 넘지 못했다. 8년 한 것은 조선조 이래 최장수 경기관찰사를 한 셈이다. 중점을 둔 일 중의 하나가 공무원들의 ‘청렴’문제였다. ‘청렴영생 부패즉사’라고 새긴 문구를 경기도 청사 내의 화장실에 써 붙여놓거나, 공무원들 명함에도 새겨 넣도록 했다. 청렴하면 영원히 살지만, 부패하면 즉사한다는 내용이다. 공무원들이 화장실에서 오줌 누다가 이 문구를 보면 오줌이 잘 안 나온다는 우스갯소리를 듣기도 했다. 맞는 말이지만 너무 부담된다는 말이다. 2014년에 중국에 초청 강연이 갈 일이 있었다. 중국 공산당 간부 중에서도 감사 업무를 주관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강연이었다. 여기서도 ‘淸廉永生 腐敗卽死’라는 한자가 새겨진 한국 부채를 나눠주었다. 공산당 간부들 부담이 많이 되었을 것이다.”

경기도가 청렴을 특별히 강조해야 하는 어떤 맥락이 있는 것인가?

“맥락이 있다. 내가 부임하기 전 전국 지자체 가운데 청렴도가 16등이었다. 16등이면 청렴도가 전국 꼴찌 수준이다. 우선 경기도는 인구가 많다. 1250만 명이다. 다른 도에 비해서 인구가 아주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수는 서울의 3분의 1밖에 안 됐다. 공무원 수가 적으니까 그만큼 권한이 강해진다. 공무원이 인허가를 결정하는 자리 아닌가. 인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가 적으니까 입김이 세질 수밖에 없다. 법정사무(法定事務)만 해도 8600여 가지나 된다. 이걸 공무원이 관여하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경기도에는 군 비행장도 많다. 오산, 수원, 포천을 비롯해서 비행장이 무려 34개나 된다. 이게 다른 도에 없는 특수상황이다. 군부대도 많다. 615개다. 경기도는 휴전선을 끼고 있다. 군사시설 주변에는 규제가 엄청나게 많다. 이 규제를 둘러싸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군사시설 보호구역 내에서는 화장실 하나 고치더라도 군 사단장의 허가를 받아야 고칠 수 있다. 그린벨트 규제도 많다. 팔당댐 상수원이 경기도 관내다. 서울의 상수원 아닌가. 팔당호 주변에도 규제가 많다. 농업도 많다. 결국 주민들은 규제를 어길 수밖에 없고, 규제를 어기게 되면 공무원에게 돈을 집어줄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경기도가 다른 도에 없는 특수상황이고 거기에 따른 규제가 많다 보니 공무원의 부패가 많았다. 내가 도지사 하면서 이거 고치는데 주력했다. ‘청렴영생 부패즉사’가 그래서 나온 것이다. 경기도가 청렴도 16등 하다가 1등으로 올라선 계기다.”

고문의 트라우마 아직도 남아


▎김문수는 “좌파는 현실과 경험을, 우파는 미래와 근본을 살펴봐야 한다”면서 현실과 이상을 통합한 유연한 정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문수는 돈 붙는 관상이 아니다. 부상(富相)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랫볼이 홀쭉하고 턱이 두툼한 관상이 아니다. 돈이 붙으려면 아무래도 살이 좀 붙어 있는 얼굴이어야만 하지만, 김문수는 아래턱 쪽이 깡마른 인상이다. 동양에서 전통적인 지도자 상은 두툼한 턱에 돼지 쓸개를 엎어놓은 듯한 모습의 코를 가지고 있는 얼굴이다. 돼지쓸개 코는 돈 붙는 코다. 입도 좀 커야 한다. 그래야 식성이 좋다. 식성이 좋아야 아무거나 먹는다. 그러나 김문수는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깡마른 듯한 인상의 선비 얼굴이다. 깨끗하고 정직한 눈을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을 속여 먹거나 음흉하게 이중 플레이 할 눈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김문수는 정치 지도자로서 여러 가지 조건을 갖췄지만 지지율이 크게 오르지 않는다. 대중적인 이미지가 형성이 안 되었다고나 할까. 뭔가 대중에게 친숙한 이미지가 아닌 것이다. 상대방에게 유머감각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너무 진지하면서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선비 인상의 얼굴인 것이다. 사람의 역할도 시운(時運) 따라 다르다. 돈을 벌어야 되는 시기에는 부자관상의 넉넉한 지도자가 맞고, 원칙을 세우고 약자를 돌봐야 하는 시점에는 김문수 같은 청렴하고 신념형 지도자가 맞다.

종래의 지도자 관상이 사람을 압도하는 ‘압인지상(壓人之相)’이 많았다면 21세기의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시민을 위로해주는 ‘위민지상(慰民之相)’이 맞는지도 모른다. 김문수는 ‘압인지상’이 아니라 ‘위민지상’에 해당한다. 한국의 시운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느냐에 따라 시대가 요구하는 관상이 달라진다고 본다. 그렇다면 청렴과 신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아무나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살면서 형성되는 것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타고 났다 하더라도 살면서 수업료는 내야 한다. 수업료 없이 되는 일 없다. 그 수업료는 세 가지 액체, 피·땀·눈물이다. 이거 많이 흘린 사람은 수업료 많이 낸 셈이고, 확실히 삶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그동안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인가?

“고문당할 때였다. 힘들고 무서웠다. 남영동 대공분실, 장안동 분실, 남산의 중앙정보부, 안기부 남산, 서빙고 보안대, 남한산성 밑의 장지동 분실에서 고문을 당했다. 고문실을 전전했다고 보아야 한다. 야구방망이로 어깨, 등, 몸을 강타당해서 지금도 어깨 쪽은 담이 결린다. 날씨가 안 좋으면 더 결린다. 그래도 불구가 안 된 것이 다행이다. 전기고문은 무섭다. 온 몸을 발가벗겨 놓고 커다란 철제 의자에 포승줄로 몸을 묶는다. 손목도 묶고 온몸을 묶으면 피가 통하지 않는다. 엄청 힘들다. 그리고 구리선을 양쪽 엄지 손가락에 연결한다. 그리고 수동으로 전기동력 장치를 돌린다. 점차 전압이 올라가면 그 쇼크로 몸이 펄쩍펄쩍 튀어 오른다. 그때 밧줄로 묶여 있는 부분의 근육에서 피가 흐르고, 정신을 잃는다. 나중에는 피 오줌이 나온다. 그러면 고문관이 물을 머리 위에 퍼붓는다. 그 물은 발 밑으로 잘 빠지게 구조가 되어 있어서 아무리 물을 많이 부어도 물은 고이지 않는다. 전기 고문하는 장소도 괴기스럽다. 지하실의 적막하고 음산한 곳에서 전기 고문을 당하다 보면 엄청난 공포가 밀려온다. 서울구치소에는 1980년과 86년에 들어갔는데 이때 몽둥이로 많이 맞았다. 안양교도소에서도 고문 많이 당했다. 여기는 면회도 안되는 곳이다. 단식투쟁 한다고 많이 당한 것 같다. 목포·광주교도소에서도 1년씩 살았다. 광주교도소에서는 5·18 때 전남대 학생회장을 하다가 교도소에서 죽은 박관현이 있던 바로 그 방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북은 이보다 훨씬 심하게 반대파를 다뤘던 것 같다. 나는 크게 몸이 망가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점에서 이북보다는 약하게 고문을 당한 것 같다.”

노동운동에 뛰어든 시기는 언제쯤인가?

“대학(서울대 상대)을 다니다가 2학년 때 제적당했다. 그때가 1971년이다. 박정희, 김대중이 대선에서 맞붙었던 시절이다. 김대중 떨어지고 교련반대 부정부패 반대 데모를 했고, 민청 학련 사건 때 결국 제적당했다. 유인태랑 전국 조직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청계천에 들어갔다. 분신한 전태일 집에 들락거렸다. 청계노조 간부들에게 창동 전태일의 판잣집이 일종의 학교였다. 판잣집이 노동자들의 교육장이고 상담소였다. 여기에서 노동자들에게 한문과 일반상식을 가르쳤다. 그때는 근로기준법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노동자들이 읽기가 힘들었다. 한문을 가르쳤다. 나중에는 한문으로 된 근로기준법을 한글로 번역하게 되었다. 읽기 쉽도록. 전국 최초로 한글 근로기준법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탄생하게 됐다. 이런 교육 파트 일을 하다가 노동 현장에 직접 뛰어들기로 했다. 옷감을 자르고 펴는 재단보조로 들어갔다. 재단보조는 잡일을 하는 것이다. 그때가 23∼4세 때다. 아침부터 밤 11시 넘게까지 힘들게 일했는데, 일을 잘 못한다고 욕만 먹었다. 여기에 오는 사람들은 대개 초등학교 졸업하고 들어온 숙련공들이라 손놀림이 빨랐다. 나는 손이 느려 욕을 먹었다. ‘당신 그래가지고 뭘 하겠느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자격증’을 하나 땄다. 보일러 취급 자격증이었다. 이 자격증을 가지고 공장에 취직하니까 대접이 달라졌다. 잡일하는 보조에서 기능공으로 대접이 바뀐 것이다. 청계천에서는 월급을 1만원 받았는데, 기능공으로 다시 취직하니까 5만원을 받았다. 당시에 이 금액은 엄청난 차이로 느껴졌다.”

전남 순천 출신 부인과 동지적 결합


▎1. 2007년 5월 초 경기도지사 시절의 김문수·설난영 부부가 관사 근처의 작은 동산에서 봄꽃이 만개한 풍광을 즐기고 있다. / 2. 1970년 서울대 상대(경영학과)에 합격한 김문수(오른쪽). 그해 3월 입학식에서 둘째 형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기능공 자격증이 많은가? 어떤 자격증을 땄나?

“1975년에 도루코에 입사했다. 80년에 해고되었으니까 5년을 여기에서 근무한 셈이다. 도루코에는 처음에 보일러공으로 들어갔다. 보일러공은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원동기 취급기능사 1급, 열관리 기능사 2급, 위험물 취급 기능사 1급, 2급이다. 이것은 도루코에 입사할 무렵에 이미 따놓고 있던 자격증이었다. 회사 들어가서 전기안전기사 2급, 전기 기기 기능사 2급을 땄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환경관리 기사 2급에 합격했던 일이다. 그때 나는 고졸로 위장 취업한 상태였다. 보일러실에서 3교대 하는 보일러공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환경관리 기사 2급 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다. 당시 이 자격증은 따기가 매우 어려웠다. 합격률도 낮았다. 도루코에 다니던 한양공대 출신 기사 5명이 이 시험에 도전했다. 회사에서는 시험 공부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이 5명에게 특별 휴가를 주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한양 공대 출신 5명은 모두 떨어지고, 고졸 보일러공으로 있던 내가 합격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회사에서 모두 놀랬다. ‘어떻게 대졸도 떨어지는데 고졸인 쟤가 합격을 했지?’ 이 자격증을 따고 나서 안전계장으로 승진됐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 자격증 있는 사람을 외부에서 채용하려면 돈이 많이 들었다. 채용이 힘들었다. 그러나 내부 사람이 자격증을 따면 여러 가지로 편리했다. 그래서 내가 3계단을 특진해서 계장이 됐던 것이다. 합격한 뒤로 회사에서 다 주목하는 존재가 되었다. 지나고 보니 나는 시험에 별로 안 떨어진 것 같다. 계장이 되고 난 다음에 일어난 변화가 노조간부가 된 일이었다. 노조가 세대교체 되면서 새파란 나이에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전국 금속노조 영등포지역지부 한일공업 노조분회장’이 그 정식명칭이다. 명칭이 길지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직책(?)이다.”

부인도 노조 분회장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집사람 이름이 설난영이다. 전라도 순천 출신이다. 도루코 분회장은 아니었다. 같은 영등포 지역지부 노조의 분회장이었다. 세진전자라고 하는 회사의 노조위원장이었다. 다른 회사지만 같은 지역구의 노조 간부였기 때문에 서로 친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고 나는 삼청교육대의 교육대상으로 지목되었다. 당시에 남민전 사건이 있었고, 수사기관이 볼 때 내가 속했던 그룹은 남민전과 비슷한 모임이라고 여겨져 구속이 시작되었다. 약 70명이 잡혀 들어갔다. 그때 나도 잡혀 들어갔다. 1980년 2월에 들어가서 4월에 간신히 나올 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또다시 삼청교육대에서 잡아들인다고 하니 숨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숨느냐?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살벌하던 시절에 수배 대상자를 숨겨준다는 것도 보통의 결단이 아니다. 숨겨주다 발각되면 자신도 신세 망친다. 그 위험을 감수해야만 수배자를 숨겨줄 수 있다. 설난영의 동생이 하는 빵집이 마포에 있었다. 빵집 안에는 생활공간이 있었다. 여기에서 3남매가 살았다. 처남, 처제도 함께 살았다. 그 방 위에 2층 다락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여기에 숨어 있었다. 다락방에 4개월 있었다. 설난영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셈이다. 그리고 결혼했다. ‘왜 하필 전라도 여자하고 하느냐?’고 집안의 반대도 있었지만 결혼했다. 보시다시피 지금도 잘 살고 있다”.

좌에서 우로 방향을 바꾼 계기는 무엇인가? 左는 공(工)자가 들어 있어서 공부하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둔다. 좌파는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한자에 들어 있다. 右는 입 구(口)가 들어 있다. 우파는 먹는 문제에 우선순위를 둔다는 의미라고 해석된다. 밥 굶고 공부만 하면서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머리에 든 것은 없이 무조건 먹자판에만 골몰하고 살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이다. 잘 들여다보면 우리의 일상 생활에 이 두 가지 영역이 모두 들어가 있다. 나는 그런 점에서 당신의 양파섭렵(兩派涉獵)이 보편적인 코스이고 합리적인 변화라고 본다. 이 대목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가?

“근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야 한다. 근본은 행복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행복이 무엇인가는 복잡하게도 설명할 수 있지만 간단히 정의하면 ‘잘 먹고 잘 사는 일’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길이 무엇인가? 이 목표를 위해서 다른 것은 모두 방법이고 수단일 뿐이다. 좌파는 이상주의적인 노선이고 우파는 현실주의적인 노선이다. 이상(理想)이 있어야 정치인이다. 이상은 정치인의 엄청난 자양분이다. 이상이 없으면 자양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박정희, 김대중은 젊었을 때 좌익을 경험해보았다. 이때의 경험이 정치적 자양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에는 역시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현실은 유연함을 요구한다.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현실적인 태도다. 동구권이 붕괴되고, 러시아가 붕괴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중국과 수교가 되어 처음 중국에 갔을 때 화장실의 문짝이 없었다. 밖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화장실이었다. 집사람이 중국 화장실에 갔다가 불편을 호소했다. ‘이론과는 다르구나!’를 느꼈다. 미국에 가니까 사람들이 아주 친절했다. 길을 물어보면 친절하게 가리켜주는 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미 제국주의가 아니구나!’를 알았다. 이론보다는 현장체험이 중요하다는 이치를 절감했다. 이런 현장을 보면서 내 생각에 변화가 왔다. 잘못되었으면 수정하고 방향을 틀어야 한다. 나는 좌파에게 ‘현실을 보자.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우파에게는 ‘미래를 보자. 근본을 보자. 자기만 생각하지 말고 안 보이는 주변도 좀 생각하자’고 말하고 싶다.”

김문수 집안은 여헌 장현광 선생의 학맥


▎2012년 10월 10일 수원 경기도청을 방문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맞고 있다.
김문수와 인터뷰를 하면서 ‘이 사람은 정치인보다는 유교적인 소양을 갖춘 선비 지도자에 가깝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도자였던 심산 김창숙 선생의 스타일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대쪽 같은 절개도 있으면서 자신이 잘못됐다고 느끼면 언제든지 고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사람 속여먹지 않고, 적어도 자기 앞에만 큰 감 놓으려고 하지 않는 최소한의 양심가라는 느낌이다.

필자가 영남의 선비 집안을 연구하면서 잘 모르는 대목이 나오면 연락해서 물어보는 사람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藏書閣) 책임자로 있는 김학수(金鶴洙) 선생이다. ‘17세기 영남학파 연구’가 그의 박사논문이다. 영남 집안의 족보와 고문서, 그리고 학맥과 혼맥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장서각에는 우리나라 명문가의 고문서 자료들이 광범위하게 수집되어 있어서, 유서 깊은 양반 집안을 연구하는 중심이기도 하다.

7∼8년 전쯤에 김학수와 함께 상주의 양반 집안 답사를 같이 간 적이 있다. 어느 고택에서 하룻밤 같이 자면서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선생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여헌 선생과 같이 방 안에 있으면 그 방이 훤해진다. 같이 있던 사람들의 마음도 같이 훤해진다”는 이야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사람이 공부를 했으면 저 정도는 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주역에 보면 ‘여(旅)’ 괘가 있다. 56번째 괘다. 위에는 불이 있고 아래에는 산이 있는 형상이다. 화산려(火山旅)다. 여(旅)는 여인숙이라는 뜻이다. 공자는 4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주역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 이전에는 시원찮게 알다가 여러 가지 풍파를 겪으면서 ‘인생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를 실감하고 주역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앞날을 점치는 괘를 뽑아 보니까 이 ‘여’ 괘가 나왔다고 한다. 자신의 앞날이 여인숙이라는 것을 예측했다고나 할까. 아닌 게 아니라 공자는 50대 중반부터 천하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여인숙에서 잠 자고 다닌 셈이다. 여헌 선생이 자신의 호를 여헌이라고 한 이유는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헌은 여인숙을 뜻하고 여인숙은 인생이 잠깐 왔다가 나그네처럼 떠나야만 한다는 이치를 명심하기 위해서다. 그러자니 욕심이 없어진다. 나그네가 소유하려고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욕심이 없으니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충만하다. 주변이 훤해진다.

알고 보니 김학수는 김문수와 경주 김씨 규정공파(糾正公派) 수(洙) 자 항렬이 같다. 같은 집안이다. 김문수가 집안 형님이다. 집안 내력을 잘 알고 있을 수밖에. 김문수 집안은 여헌 장현광 선생의 학맥이었다. 여헌의 학풍을 직통으로 계승한 유학자 집안이었다. 김문수 고향이 영천의 임고면(臨皐面) 황강리(黃岡里)이고, 이 일대에는 여헌의 제자가 많이 살았다.

동네 입구에 돌비석이 서있고, 거기에는 ‘以和爲貴 悠久萬歲’라고 쓰여져 있다. ‘화(和)가 귀한 것이고, 이 화합하는 마음이 있어야 만세를 간다’는 뜻이다. 김문수 고향 동네에서 귀하게 여겼던 화(和)가 여헌 학풍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고향에 있던 죽강서당(竹岡書堂)을 김문수 집안의 조부 항렬에 해당하는 분이 운영했었다고 한다. 김문수도 죽강서당에서 어릴 때부터 한문을 익혔다. 어린아이와 새댁, 며느리, 여자들도 여기에서 한문을 배울 수 있었다. 죽강 할배는 먹고 살게 없어서 일찍이 만주에 갔었고, 모택동 정권이 수립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서당을 운영했다고 한다.

죽강 할배 외에 용지 할배가 운영하던 서당이 동네에 또 있었다고 한다. 여기는 수준이 좀 있었다. 집안 족보는 이 용지 서당에서 배웠다. 그리고 돌목 할배가 운영하던 돌목서당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장자(莊子)’를 비롯하여 수준 높은 문장과 한시를 가르쳤다고 한다. 어린애들은 다닐 수 없는 서당이었다. 김문수는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 조그만 서당이 3개나 있었던 유학적 분위기에서 자랐던 것이다. 김문수 증조부가 우담(愚潭) 김준희(金俊熙)인데, 여헌의 학맥이었다. 김준희가 나중에 ‘여헌문인록(旅軒門人錄)’을 편찬하고 발행했다.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은 신기독(愼其獨)”


▎지난 4월 2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김문수 당 보수혁신위원장이 오픈 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 도입 등 정치·선거제도 개혁안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문인록 발행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학문적 온축(蘊蓄: 속에 깊이 쌓아둔 것)이 있어야 하고, 주변에서 학문과 인품에 대한 평판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다 어느 정도의 재력이 있어야 책을 낸다. 여헌문인록을 김준희가 발행했다는 것은 주변에서 ‘발행을 해도 된다’는 신망을 얻었던 증거다. 김문수의 14대조가 김연(金演)이다.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을 하다가 경주의 서천(西川) 전투에서 순절했다. 나라에서 불천위(不遷位)를 하사했다. 보통 4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내고 그 이상 넘어가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고조부가 4대다. ‘불천위’는 이 제한을 받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주는 조상을 말한다. 나라에 공훈이 있어야만 불천위를 받는다. 불천위는 국가유공자나 큰 학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제사를 지칭한다. 따라서 양반 집안에서는 불천위 제사가 있어야 격이 맞는다.

유년 시절 죽강서당 다닐 때 수업료는 어떻게 냈는가? 한문 공부 가운데 기억나는 대목은 무엇인가?

“서당 선생님에게 추수할 때 나락 1가마 정도를 어른들이 드렸던 것으로 알고 있다. 곡식으로 수업료를 낸 셈이다. 어렸을 때 집에서 본 주련과 현판글씨 가운데 ‘신기독(愼其獨)’이 있었다. 그때는 뭘 몰라서 독기신(獨其愼)으로 읽곤 했다. ‘행념래회(行念來悔)’라고 써진 편액도 많이 보았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이 신기독(愼其獨)이었다. ‘혼자 있을 때 자기를 점검하고 살펴야 한다’. 남이 볼 때에는 잘하다가 안 볼 때는 함부로 살면 신기독이 아니다. 남이 보지 않는 혼자 있는 시간에 자기를 점검하고 챙겨야 한다. 조선 선비들은 신기독을 공부의 기준으로 삼았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유정유일(惟精惟一) 윤집궐중(允執厥中)’도 최근에 자주 묵상하는 문구다. ‘마음 자세를 정성스럽고 한결같이 해서 균형과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온갖 풍파 속에서 살아야 하는 정치인으로서 살다 보니 이 대목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다.”

김문수는 대구 경북고 3학년 때 3선개헌 반대시위에 앞장섰다. 교문 밖으로 나가 대구 대명동의 2·28 기념탑까지 학생들이 뛰어갔다. 2·28 기념탑은 4·19를 촉발시킨 대구의 시위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탑이었다. 학교에서 뛰어가면 20분 거리의 탑인데, 여기를 한 바퀴 돌고 학교로 돌아간 것이 데모였다. 담임선생이 반성문을 쓰면 봐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김문수는 “‘이승만의 3선개헌이 잘못이다’라고 교과서에 써 있다. 교과서에 써 있는 대로 했는데 왜 반성문을 써야 하느냐?”고 답변했다. 결국 무기정학을 받았다. 집안 어른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작은아버지가 교사였다. “너 후회 안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옳은 일 했는데 왜 후회를 해야 합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이것이 선비집안의 유전자였던 것이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라고 하지 않았던가! ‘옳은 일 했는데 왜 후회를 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이후로 김문수의 인생 행로를 결정했다.

그가 청계천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하고, 공장 다니고, 고문당하고, 감옥소 생활 한 것도 이 대목에서 출발했다. 유교가 뭐냐? 수기치인(修己治人) 아니냐? 먼저 수신을 하고 그다음에는 정치를 한다. 현실 문제에 뛰어든다는 것이 도교·불교와 구별되는 점이다. 수신 측면에서 보면 동양 삼교, 즉 유·불·도교가 모두 같다. 그러나 치인의 영역에서 구별된다. 유교는 공부해서 결국 정치하는 것이 정석 플레이다. 김문수가 노동운동을 하다 정치에 뛰어들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아귀가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출직 국민공천제 실천이 정치개혁 첫 단추”

성완종 전 의원의 죽음에서 비롯된 엄청난 스캔들이 정국을 강타하고 있다. 정치가 돈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과연 어떻게 이 지긋지긋한 구조를 끝장낼 수 있을까?

“보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가치를 지키자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가 부패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위협받고 포퓰리즘이 판치고 시장경제는 부정된다. 부패, 특히 정치부패는 돈이 드는 구조에서 생긴다. 왜 정치에 돈이 드는가? 보스가 공천권 갖고 있으니 보스가 정치 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공천받으려는 사람들이 내야 하는 것이다. 그 돈은 어디서 오는가? 개인적인 비리 혹은 기업인들에게 반(半) 강요해서 받을 수밖에 없다. 성완종 회장 리스트 파문도 돈 들어가는 정치의 악순환 때문이다. 결국 돈이 들어갈 필요 없는 정치구조를 만들면 해결되는 문제다. 선출직의 국민공천제 실시가 중요한 첫걸음이다. 새누리당 보수혁 신위를 이끌며 가장 심혈을 기울여 관철했던 혁신이다. 국민 공천제 전면 도입은 정치부패를 뿌리 뽑고, 삼류 정치를 일류 정치로 만들어 대한민국을 선진강대국으로 이끄는 필수 전제조건이다.”

김문수 손을 잡아보니 손이 컸다. 체구에 비해 손이 크고 손바닥이 두터웠다. 손은 오장육부의 연장선상이다. 손이 오장육부를 말해준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그리스 작가 카잔차키스가 자신의 양쪽 손이 다르다고 말했던 대목이 기억난다. 한쪽 손은 섬세한데, 다른 한쪽 손은 거칠다고. 이는 양 극단이 자기 안에 내재해 있다는 의미다. 김문수가 키는 그리 큰 편이 아닌데 손이 체구에 비해 크고 두터웠다. 다분히 실무적이고 굳센 의지의 소유자라는 증거다.

양쪽 문을 서로 연결하려면 돌쩌귀가 있어야 한다. 돌쩌귀를 영어로 카디날(cardinal)이라고 한다. 카톨릭 추기경이 카디날이다. 추(樞)가 이것이다. 서로 다른 두 쪽의 문짝을 서로 연결해서 여닫도록 해주는 장치다. 서로 다른 두 문짝을 연결해서 돌아가도록 만드는 장치가 돌쩌귀요 카디날이다. 김문수는 이 두 문짝을 중간에서 쇠심지를 박아 연결할 수 있는 경력을 자신의 인생에서 쌓았다.

“한반도가 기운이 강하다. 한반도 분단은 어마어마한 에너지원이다. 이걸 잘 해결하면 세계적인 리더십이 나올 수 있다. 영적(스프리츄얼)이고 위민(慰民)하는 리더십이 그 요체다.”

김문수가 인터뷰 말미에 한 말이다. “인터뷰 끝나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충청도 택시노조원들에게 강연하러 아산에 가야 한다고 답변한다. 인터뷰는 한강의 유람선 레스토랑에서 했는데, 그는 강연하러 떠나고 나는 혼자 남아서 한강의 꽃피는 봄 정취를 감상하였다.

- 사진 전민규 월간중앙 기자

조용헌 - 원광대 불교학 박사. 지난 20여 년간 한·중·일 3국의 1천여 사찰과 고택, 영지(靈地)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재야의 수많은 기인, 달사를 만나 교유했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천문·지리·인사 등 강호동양학의 3대 과목을 한국 고유의 문화 콘텐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용헌의 사찰 기행〉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방외지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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