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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군의 한 토막 인문산책] 보바르·황진이의 '계약결혼'

[주인군의 한 토막 인문산책] 보바르·황진이의 '계약결혼'
데스크승인 2015.04.23  | 최종수정 : 2015년 04월 23일 (목) 00:00:01

사르트르와 보바르.20세기의 지성으로 평가받는 두 남과 여.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로 인간이 하나의 실존임을 밝히고자 했던 사르트르.그리고 작품 '제 2의 성'을 통해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영원한 여성다움'이라는 날조된 신화를 타파하자고 부르짖었던 보바르. 프랑스의 명문 소르본대학에서 조우한 이 둘은 각기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와 여성해방의 선구자적 운동가로 자리매김한다. 

 이에 더하여 이 둘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계약결혼'이다. 서로의 자유를 구속하지 말고, 비밀도 갖지 말며, 다른 사람과의 사랑 또한 허용하되 경제적으로는 독립하면서 살자고 하는 내용의 이 계약결혼은 당시 프랑스사회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둘은 죽는 날까지 서로를 존중하며 비교적 충실하게 계약내용을 이행했다. 사르트르가 한 때 로댕의 연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에게 관심을 갖자 보바르는 질투심이 있을 법도 했으나 대범하게 지나쳤다.사르트르는 수백권 쯤의 책이 소화된 보바르에게 평생을 반했고,보바르 역시 뿌리 깊은 지성과 사상에서 나오는 사르트르의 말에 반해 정식결혼보다 더 충실하게 일생을 보냈다. 그 둘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서로를 자유롭게 하면서 관계를 유지했던 지적 동반자였던 셈이다. 

 여기서 시대를 거슬러 잠시 동양으로 가보자. 황진이와 이사종. 이 둘은 16세기 조선 중기의 명기(名技)와 명창(名唱)으로 명성을 떨친 시대의 연인들이다. 자신을 연모하다 죽어간 이웃집 총각으로 인해 평생 기생으로 살기로 작정한 황진이는 여자로서 한참 물이 오를 나이에 선전관(宣傳官) 이사종을 만나게 된다. 송도의 한 냇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이사종에게 반한 황진이는 자신의 집으로 그를 초대하고는 여러 밤을 함께 보낸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이 둘은 6년 간의 계약결혼을 하게 된다. 먼저 3년은 이사종의 집에서,나중 3년은 황진이의 집에서 살기로 하되 경제적 부담도 똑같이 지자는 내용이었다. 계약기간이 끝나자 황진이는 깨끗하게 이사종을 보냈다.

 님을 그리는 마음을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춘풍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라는 시조에 담은 채.

 시, 서, 화 그리고 노래와 춤 등 모든 예술분야에 정통했던 황진이는 이후 자신의 재능을 십분 살려 왕족 벽계수를 유혹하고 30년 면벽의 수도승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기도 한다. 비록 당대 최고의 학자 서경덕 만큼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으나 남성위주의 사회를 뒤흔들고 남녀관계 역시 본인이 선택하고 선도하되 헤프지 않았다. 서양이나 중국의 미인들이 자신의 미모에만 의지하여 권력자에게 몸을 맡긴 것과는 다른 차원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보바르보다 수 세기를 앞서 '계약결혼'이라는 방식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당당함을 보여주었던 것이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주인군 수원문화원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