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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대의 정가산책]'묵언수행' 손학규의 선택은?

[서봉대의 정가산책]'묵언수행' 손학규의 선택은?

#{서봉대} 블로거 | 2015.01.29 10:38:06 송고


손학규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31일 오후 여의도 국회에서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후 국회를 나서며 차량에 올라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있다. 2014.7.31/뉴스1 © News1 박세연



손학규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에 대한 정계복귀 요청 기류가 야권을 중심으로 일고 있으나 당사자인 손 전 고문은 '묵묵부답'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치권에서 자신이 거론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할 정도라는 측근들의 전언을 감안할 경우 현재로선 정계복귀에 뜻이 없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측근들과 전화통화를 해도 정치권 얘기에 대해선 듣기만 할 뿐 특별한 언급은 하지않는다고 한다.

당내 한 중진 의원도 손 전 고문에 대해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는 데 바람이 가만두지 않는 격"이라며 "이번 2·8 전당대회에 그를 끌어들여 정계은퇴 선언에 담긴 진정성을 훼손해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앞서 손 전 고문은 지난해 7·30 재·보선 수원 병 선거에 떨어진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부인과 함께 전남 강진으로 내려가 백련사 인근 토담집에서 묵언수행과 자서전 집필 등을 하며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손 전 고문이 올 연말이나 내년 초 외부 활동에 나설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내년  4월 총선에 출마할 측근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렇다고 지원유세 등을 통해 정치행보를 본격적으로 재개하는 건 아니고 측근의 선거 사무실을 방문하거나 SNS를 통해 격려하는 정도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얘기가 현실화된다면 정치행보를 재개하는 것으로는 비쳐지지 않는다 해도 정계은퇴 1년반만에 은둔생활은 접게 되는 셈이다. 2008년 18대 총선 때에도 민주당 대표였던 그는 당이 참패한 데 책임을 지고 춘천에서 칩거생활을 2년정도 했었다.

당내 한 의원은 "정계은퇴했지만 앞으로 맡을 역할이 있고 역할을 크게 할 분"이라고 강조, 손 전 고문의 향후 행보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칩거 생활을 끝낸 그의 행보가 정계복귀 쪽으로 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없어 보인다. 손 전 고문 측이 정계복귀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선을 긋지는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정계은퇴후 고향인 경기 시흥 등으로 거처를 정하지 않고 새정치민주연합의 텃밭인 전남지역으로 내려갔다는 점에 주목하는 측도 있다.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가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네거티브 흑색선전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이 전 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네거티브 흑색선전으로 더이상 우리 정치가 후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밝혔다. 2012.12.16/뉴스1 © News1


#이회창 전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총재의 경우 1997년에 이어 2002년 대선에서도 낙선하자 대선 이튿날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6년 전 정치에 들어올 당시의 꿈을 이루지 못한 회한이 어찌 없겠습니까만 깨끗이 물러나겠습니다…"라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두번의 대선 모두 선거전 초반엔 대세론을 구가했으나 아들 병역 비리 등 각종 의혹들에 휩싸이면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이 전 총재는 2007년 대선을 한달 앞두고 한나라당을 탈당, 무소속 후보로 출마함으로써 다시 한번 정치권으로 뛰어들었다. 5년만의 정계복귀였으나 이에 따른 비난여론도 적잖았다.

출마 명분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겨냥한 '좌파정권 종식'. 각종 의혹들에 휩싸여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던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로는 정권교체를 이루기 어렵다는 주장도 폈다.

당시 이명박 후보는 BBK 주가조작사건 연루의혹과 도곡동 땅 의혹 등에 휩싸이면서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었으며 이같은 상황과 맞물려 이회창 후보의 경우 상승세를 타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명박 후보가 지지율을 회복, 상승세로 돌아서면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15%를  득표하는 데 그침으로써 이명박· 정동영 후보에 이어 3위로 뒤쳐졌다. 1997년과 2002년에 이어 대선 3수에서도 낙선한 셈이다. 

그는 이듬해 자유선진당을 창당,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자유선진당은 창당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18석(비례대표 4석 포함)을 차지, '제 2의 자민련'으로 부활하는 듯했으나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총선에서 잇따라 당세가 위축돼 군소정당으로 전락해버렸고 그는 당을 떠났다. 

이어 2012년 대선을 한달 앞두고 새누리당에 입당,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했으며 선거후에는 2선으로 물러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92년 대선에서 패하자 기자회견을 통해 "오늘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밝힌 뒤 정계를 은퇴했다. 

하지만 그 역시 2년 반만에 정치권으로 되돌아 왔다. 자신의 정치계보 모임인 내외문제연구회에 참석, "국정현실이 큰 혼란에 빠져있고 제 1 야당의 정당기능이 마비된 상황을 그대로 바라볼 수 없다"는 명분을 부각시킨 뒤 정계복귀를 선언했던 것이다. 

제 1야당이던 민주당내 자신의 세력을 끌어내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직을 맡게 됨으로써 정치활동에 본격 나섰다.

앞서 그는 정계은퇴를 선언한지 한달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 가 연구활동을 하다가 6개월만인 1993년 7월 귀국, 아태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정치재개를 모색했었다.이어 1997년 대선 4수에 도전,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공동정부 합의(DJP 공조)를 토대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정계은퇴 번복에 대한 비난여론이 거셌음에도 그는 권토중래에 성공함으로써 정권을 잡게 됐던 것이다.

18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서거 5주기 추도식에서 이희호 여사가 헌화하고 있다. 2014.8.18/뉴스1 © News1 박정호 기자


#김 전 대통령과 이 전 총재의 정치적 명운이 이처럼 엇갈리게 된 이유는 뭘까?

여러 측면들이 지적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지지기반의 충성도가 달랐던 데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의 경우 정계 은퇴선언 번복으로 비난여론에 휩쓸렸음에도 버틸 수 있었던 데는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20%대의 '콘크리트' 지지율이 있었다. 

측근들을 주축으로 신당을 창당함으로써 야권분열까지 초래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이런 지지율 덕에 맞설 수 있었다.

반면 이 전 총재에겐 콘크리트 지지율이 설사 있었다 해도 김 전 총재의 경우에 비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대세론을 탔던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조차 아들 병역 비리 의혹 등이 불거지자 50%안팎이었던 여론 지지율이 하루아침에 10∼20%대로까지 급락해버렸다.

게다가 2007년 대선에선 출신지였던 충청권에서조차 한나라당 측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여서 지역적 지지기반의 강도에서 호남의 김 전 대통령에 비해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1997, 2002년 대선때처럼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보수 유권자들로 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기도 어렵게 됐다. 보수유권자들의 지지를 놓고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와 경쟁해야 했던 것은 물론,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탓에 정당 차원의 지원도 받을 수없는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결국 김 전 대통령에 비해 정치적 재기를 위한 지지기반이 열악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고 그만큼 정계은퇴 번복에 따른 비난여론에 맞서기도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손 전 고문은 어떨까? 

올해 68세가 되는 그 역시 정계 복귀한다면 지향점은 대선출마 쪽일 것이다. 김 전 대통령과 이 전 총재의 정계복귀때 나이도 각각 69, 72세로 엇비슷했다.  

그는 보수와 진보 쪽 유권자들을 폭넓게 아우를 수 있는 몇 안되는 정치 리더로 꼽힐 만큼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이때문인듯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대선후보 적합도 조사에서 1위로 가장 많이 꼽히기도 했다.

재야 운동권출신으로 서강대 정치학 교수였던 그는 1993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개혁정책에 이끌려 정계입문, 경기 광명을 보궐선거에 당선됨으로써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보건복지부장관과 경기지사를 역임했으며 2007년 한나라당을 탈당한 후에는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 등에서 당대표를 맡았고 정계를 떠날 때까지 4선 의원을 기록했다.

현역 정치인들중 그처럼 전국적인 지지세력과 팬클럽을 갖고 있는 인사도 몇명 되지않는다. 특히 그의 출신지인데다 도지사까지 지냈던 수도권은 물론, 새정치민주연합으로선 최대 취약지인 영남권에도 지지세력을 갖고 있다는 게 강점으로 꼽힌다.

민주통합당 손학규 대선 경선 후보가 28일 오후 강원도 원주 인터불고 호텔에서 열린 제18대 대선 후보 경선 강원합동연설회에서 정견발표를 하고 있다.2012.8.28/뉴스1 © News1


하지만 정계 복귀에 성공할 수 있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무엇보다 김 전 대통령처럼 비난여론에도 흔들리지 않는 '콘크리트 지지율'이 없다는 게 그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그는 각종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10%대의 지지율을 넘어서기도 힘들었으며 한 자리수로 떨어지기도 했다.

한 측근조차 "시대가 절실하게 그를 요구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정계복귀라는 꿈을 꿔서는 안된다. 그가 아니면 안된다는 분위기가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지금 같은 정치상황에선 복귀를 한다고해도 비난여론에 휩쓸려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며 떠났던 그로서는 복귀 명분을 찾는 것조차 현재로선 쉽지않아 보인다.

때문에 토담집에서 칩거중인 그가 실제로 '와신상담' 하고 있다면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시대적 요구에 맞아떨어짐으로써 정치적 꿈을 다시 살릴 기회를 잡을 수도 있지만,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원로역할을 하는 것 또한 그의 '순리'일지 모른다. 자신의 정계은퇴를 계기로 정치권의 변화와 혁신을 촉구했던 그였기도 하다.

칩거를 끝낸 후 손 전 고문의 선택은 어느 쪽으로 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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