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생이면 올해로 만 84세. 만 84세에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움직이는데 불편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나이에 손수 운전하면서 산에 올라가 사진을 찍는다. 사진만이 아니고 국궁(國弓)도 하고, 야생화도 찍고, 문화유적지를 찾아다닌다.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컴퓨터로 직접 포토샵 작업하며 정리한다. 젊은 사람 못지않은 기억력과 활동력을 보이는 장본인이 올해 만 84세의 주인공 남기승 옹이다. 세월을 무색하게 하는 당사자다.
남 옹의 손자 중 한 명이 카네기멜론 컴퓨터사이언스를 졸업하고 미국 오라클 본사에 근무한다. 컴퓨터 전문가인 그 손자가 할아버지의 포토샵 작업과정을 보고는 “저도 모르는 수준의 작업을 하신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실제로 남 옹의 작업 영상물을 보면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다. 정말 대단한 열정이고 노익장이다.
남 옹의 이런 모든 작업은 등산에서부터 시작됐다. 남 옹은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고교 생물 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10여년 가량 근무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산업화 초기엔 필요한 인재를 학교에서 기업으로 많이 스카우트돼 갔다. 남 옹도 그런 케이스로 제약회사로 옮겼다. 1960년대 당시 그 회사는 직원이 200여명 가량 됐다. 남 옹이 나서 산악반을 만들었다. 몇 몇 동아리 활동 중에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했다. 전국의 산을 다녔다. 그냥 다니기 무료하니 다른 회사와 연계해서 직장인 등산대회를 개최하자고 했다. 직장대항 등산대회가 몇 몇 회사가 의기투합해서 열렸다. 남 옹이 속한 산악반이 매번 우승했다. 그 우승기는 남 옹이 퇴직하고 나올 때까지 회사에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매번 등산을 다니다보니 뭔가 밋밋한 느낌이 들었다. ‘아, 그렇지. 산에 가면서 테마를 정해서 가보자’고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사진이고 풍경화다. 남 옹이 말한다. “나에게는 어떤 일을 하면 그 과정이 중요했지, 결과가 좋건 나쁘건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풍경화로 시작한 사진은 남 옹에게 평생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활력이 됐다. 사진작가협회 정회원이란 자격은 덤으로 주어졌다. 풍경화란 테마는 산에 가서 작업하기는 좋았지만 ‘한 번 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남 옹에게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찍는 것으로는 도저히 끝장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테마를 좀 더 구체적으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생화로 살짝 바꿨다.
남 옹의 야생화 작업은 당대의 최고 식물학자인 고 이영노 박사를 만나는 계기가 됐고, 문순화․송기엽 사진작가를 만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들과 어울려 전국의 산하를 숱하게 누볐다. 송기엽 작가는 틈만 나면 남 옹에게 전화를 걸어 “남 선생 갑시다”하면 두 말없이 카메라장비를 챙겨 집을 나섰다.
그는 60세를 맞으면서 인생의 큰 전기를 맞는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은 그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65세까지 회사에 이름은 올리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퇴직한 상태였다. 남는 건 시간뿐이었다. 본격 그만의 작업이 시작됐다.
우선, 해외 나가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캐나다 제스퍼에서 밴프까지 캐나디언 로키를 종주하며 풍경사진을 찍었다. 이집트 룩소르 왕가의 계곡도 촬영했고, 미국 그랜드 캐니언을 포함한 캐니언을 그대로 담았다.
한국에서는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불교를 유심히 들여다보니 너무 방대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몰라 무작정 절에 찾아가 사진을 찍었다. 탑과 불상, 마애불 등 무궁무진하게 렌즈에 넣었다. 불상 하나만 해도 끝이 없었다. 1990년 즈음 남 옹이 주도해서 사진 동아리를 만들었다. 퇴직 기업인이나 장성 등이 주축이 됐다. 마침 승려가 한 명 있었다. 그 승려가 “500나한상을 한 번 작업해보라”고 했다. 그 말에 ‘이거다’ 싶어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누군가 설악산에 500나한상이 있다고 해서 찾았다. 각각의 하나의 표정을 최대한 살리려 앵글을 담아 촬영했다. 하지만 나한상에 먼지가 쌓여 그 표정을 살릴 수 없었다. 아내를 데리고 가서 나한상을 하나씩 수건으로 닦아가며 찍었다. 먼지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도저히 끝 낼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마무리를 못했다.
전주 송광사에 500나한상이 있다고 해서 그쪽으로 대상을 바꿨다. 그런데 이번엔 스님이 못하게 했다. “나한상 사진 찍으러 왔다, 찍게 해달라.” “안 된다” “왜 안 되냐?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달라.” “당신 같은 사람들이 사진 찍어가서 가격표 매겨 붙여 놓으면 신도라고 사칭해서 절에 와서는 몰래 한두 개씩 집어간다. 그래서 안 된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나, 믿을 수 없다. 스님이 사람을 그렇게 의심을 하느냐.” “못 믿는 게 아니고 실제로 그렇다.” 수개월 동안 500나한상을 찍기 위해 쫓아다녔고, 수많은 작업을 했지만 마무리가 안 됐다. 끝장 보는 그의 성격도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스스로 판단했다. ‘이건 도저히 끝을 볼 수가 없겠다’라고.
그래서 새로 시작한 게 노인들 인물사진이다. 소재 찾고 만나기 쉽지 않았다. 복지관이 일반화가 안 된 1990년대 보라매공원 근처 복지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60대 청춘이 노인들 일을 도와주며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로 테마를 정했다.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을 찍자고 다짐했다. 역사물을 처음 시작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수원화성을 정했다. 그 때가 71세 때였다. 보통 노인들은 그냥 집에서 산보나 소일거리나 하며 시간을 보내지만 남 옹은 그 때 새로운 취미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수원화성의 4계를 오롯이 렌즈에 담았다. 역사물은 처음이었지만 정성을 다했다. 제대로 끝장 보는 성격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2002년 개인전을 열 정도였다. 서울에서도 개최했다. 사람들이 제법 찾았다. 사진동호회 회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수원시청에서도 찾아왔다. 수원시청에서 ‘앵콜전’으로 다시 했다. 지금도 수원시청 홈페이지에 ‘남기승 갤러리’라고 따로 마련돼 있을 정도다. 수원화성뿐 아니라 수원의 여기산에 백로 군락지가 있다. 백로의 4계도 촬영했다. 알 낳고 새끼 부화하고 키우는 전 과정을 생생하게 담았다. 전문가 뺨치는 포토샵으로 영상처리해서 수원시에 기증했다. 물론 무료다. 남 옹에게는 건강을 챙겨주는 보배 같은 작품들이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이 있어야 된다는 소신으로 흔쾌히 보냈다.
한 번 시동 걸린 역사물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심취하게 된다. ‘한국의 고궁들을 마무리해보자’ 결심했다. 경복궁, 창덕궁 등의 4계절을 모조리 차례로 촬영했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남 옹 혼자서 마무리 한 것이다. 그것도 아무 보상도 없는 일을. 그 일을 왜 했냐고 물으니 “집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뭔가 움직일 소재를 마련하는 게 내 나이 때 하는 일이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남 옹이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싶다.
사진 촬영하러 산에 다니다 우연히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바로 국궁이었다. 2003년에 입문해서 “정말 열심히 했다”고 강조했다. 그 덕으로 2005년에 입단했다. 상당히 빠른 실력이었다. 2013년엔 신기록에 가까운 ‘5연몰기’에 성공했다. ‘5연몰기’는 5발씩 5번, 총 25발을 쏘아 모두 명중시키는 신기다. 웬만한 사람은 평생 한 번도 못하는 기록이고 기술이다. 남 옹의 83세 때 기록이다. 그것도 캄캄한 밤에 과녁에 레이저빔을 맞춰놓고 쏘는 병촉야사(秉燭夜射)로 맞췄다. 전국에서 제일 규모가 큰 육사 주최 전국국궁대회에 나가 우승하기도 했다. 정말 ‘세컨 라이프(Second Life)’를 제대로 즐기는 남 옹이다.
국궁을 하다 고고학의 대가이자 고인돌 박사로 유명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고인돌을 촬영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인데 ‘잘 됐다’ 싶어 ‘해보자’고 했다. 강화, 화순, 고창 등지로 고인돌 촬영하러 숱하게 다녔다. 하루는 화순 고인돌을 담으러 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 종일 촬영에 매달렸다. 화순 고인돌 군락은 4㎞가 넘게 상당히 길쭉하다. 반대편에 가서 돌아오려고 보니 날이 어두워졌다. 말이 고인돌이지 고인돌은 고대 무덤이다. 간혹 불을 켜놓은 곳도 있지만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 뒤에 강화에서 가서는 아예 랜턴을 들고 가서 밤에 고인돌에 랜턴을 비춰 작업을 했다. 야경에 비친 고인들이 새삼스러웠다.
그렇게 해서 남 옹이 지금까지 촬영한 사진작품은 수원화성과 고인돌과 같은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경복궁․창덕궁 등 조선시대의 궁궐, 연꽃의 4계절, 꽃이 피는 신비 등을 찍었다. 남 옹은 이를 직접 영상처리해서 동영상으로 CD까지 제작했다. 그 연세에 유투브에 ‘기승남’이란 아이디로 22가지의 테마로 작품을 올리기까지 하고 있다. 또 국궁의 활을 쏘는 장면은 자신이 직접 자신의 모습을 촬영도 했다.
지난 11월26일 만나서 인터뷰하기로 했다. 굳이 남한산성에서 만나자고 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의 4계 중 겨울 장면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고 작업해야 한다고 했다. 남한산성으로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남 옹이 손수 운전해서 올라왔다. 이미 5시간 전 먼저 와서 남한산성 촬영을 마치고 오후에 만나 인터뷰를 마쳤다. 정말 부러운 노년의 삶이다.
남 옹과 같이 다니는 친구들은 하나둘씩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친구 4명이 한데 모여 2년 전까지 같이 다녔어요.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점심도 하고 그랬죠. 근데, 최근에는 한 명도 못 만나고 있어요. 한 명은 아예 걷지를 못하고, 대학교수한 친구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뇌세포가 다 망가졌는지, 집을 나서면 찾아 돌아가지를 못합니다. 다른 한 친구는 몇 년 전까지 같이 활을 쏘기도 했는데, 지금은 거의 움직이질 못하고 있죠. 세월이 가니 할 수 없죠, 뭐.”
하지만 남 옹은 아직 건재하다.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나 보람이 뭐냐고 물었다.
“건강비결은 없고, 집에서 멍하게 있는 시간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그런 시간을 아예 만들지 않으려고 하죠. 인생의 보람은 자식들이 다 잘 커주고, 손주까지 잘 커서 그게 인생의 최고 보람입니다.”
남 옹의 자식은 2남1녀. 손주는 모두 7명이다. 얼마 전 삼성서울병원에서 사우디에 총 1,000억 원 규모의 의료기술수출을 주도한 담당 의사가 둘째 아들이다. 그의 손주들 역시 대부분 옥스퍼드나 캠프리지, 스탠포드, 브라운대학 등 미국의 명문대학을 나온 인재들이다. 현재 미국 변호사나 금융, 컴퓨터업에 종사하고 있다. 남 옹이 충분히 자식들 잘 키운 보람을 느낄 만한 인재들이다. 언제까지 작업을 계속 할 것이냐고 물었다.
“내년(2015년)까지는 아마 남한산성 촬영 때문에 국궁을 할 수 없을 것 같고, 내년 후반기쯤 활을 다시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요즘은 컴퓨터 작업을 하는데, 잠시 헷갈리기도 합니다. 조금 전 폴더를 만들었는데, 다시 만들곤 합니다.”
그래서 한 마디 했다. “그 정도는 젊은 사람들도 자주 하는 실수입니다. 그 연세에 그 정도면 아직도 정정하신 겁니다.” 이 정도다. 아직 할 일이 많단다. 남 옹이 언제까지 건강하게 다닐지 정말 궁금하다.
'◐ 여러가지의 칸 === > ◆문화.예술.음악.미술.글.책.영화.디자인_..'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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