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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으로 새기는 삼라만상...해외서 더 유명한 '이관우 전각미술가'

도장으로 새기는 삼라만상...해외서 더 유명한 '이관우 전각미술가'
데스크승인 2014.11.12  | 최종수정 : 2014년 11월 12일 (수) 00:00:01 송시연 | shn8691@joongboo.com


   
 

우리나라 최고의 실력파 축구선수 박지성.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축구명문대를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각되지 못했다가 한일월드컵이 열린 2002년 히딩크 감독의 신임을 얻어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여기 박지성처럼 세계가 먼저 알아보고 주목하는 작가가 있다.

과천을 터전으로 작업하고 있는 이관우(47) 전각미술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그는 도장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

도장을 물감삼아 회화 작품을 만들어 낸다. 글자, 그림 등 다양한 무늬가 새겨진 그의 도장은 ‘응집(凝集)’의 형태로 캔버스 속에 들어가 인간을, 산을, 바다를, 우주를 담아낸다.

그는 미술명문대를 나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국 화단에서 주목하지 않는 작가였다. 실력은 있었지만 내로라하는 장소에서 전시를 여는 것도 해외아트페어에 참가하는 일도 그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보다 해외에서 잘나가는 ‘몇 안 되는’ 작가가 됐다.

2010년부터 시작된 해외활동, 그곳에서 그의 작품은 쉴 새 없이 팔려 나간다.



#끊임없이 고민하다

그가 미술을 시작하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중학교 때 짝꿍이 그린 그림을 따라 그렸다가 그것을 본 선생님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칭찬해 주면서 부터다. 미술을 배운 적도, 그림을 그려야 겠다는 생각도 한적 없었지만 장난스럽게 잡은 붓이 평생 그의 길이 돼 버렸다.

“저희 어렸을 때는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어요. 그림을 배운다는 친구들도 없었죠. 그런데 중학교 때 짝꿍이 배운 그림을 그리더라고요. 그게 신기하고 재밌어 보여 한번 따라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셨죠. 그때부터 그림을 시작해서 상이란 상은 다 휩쓸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는 원래 도장을, 정각을 배우지 않았다. 서양화를 전공했다. 수채화를 그리고, 아크릴물감과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매 순간 순간이 고민이었다. 나를 나타내 주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처음에 페인팅을 했을 때 과연 이것을 가지고 제가 화가로서 족적을 남길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항상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그런 생각이 공포감으로 밀려왔어요. 나를 대변하는 작품을 만들고, 어떻게 하면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항상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울타리가 넓어지니까 더 많은 상실감과 좌절감이 찾아왔죠. 이 그림이 내 그림 같고, 내 그림이 저 그림 같았으니까요.”

‘내 그림이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라는 심오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버려진 집에서 목도장을 발견했다.

“항상 뭔가를 찾고 있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목도장을 발견하게 됐죠. 목도장을 발견했을 때 뭔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찌릿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 목도장을 몇 만개 모아놓으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하는 재밌는 생각이 들었죠.”

처음에는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걸로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확장해 나갈까하는 고민을 했다. 그리고 군대, 법률사무소 등에서 얻은 목도장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이후 기술을 배워 미국, 이태리에서 재료를 사다가 직접 도장을 만들어 작품화시키기 시작했다.

“재밌더라고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느낌이었죠. 드디어 나만의 색깔을 찾았구나, 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 고민하기 시작했다.

   
▲ 이관우作 'Korea stamp'

“그때는 이게 최상인줄 알았는데 어느 날 보니 다시 한계에 부딪히더라고요. 오늘은 기가 막힌 것 같은데 며칠 뒤에 보면 허무하고, 그런 일이 반복이 됐죠. 그걸 이기기 위해 매일 작업실에서 놀았어요. 아마 몇 년 동안 하루에 13~14시간은 도장 파는 일만 한 것 같아요.”

목도장을 처음 발견한 그 순간부터 25년간 끊임없이 고민해 지금의 작품까지 확장시켜 왔다. 그리고 이제는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고, 세계는 그에게 주목하고 있다.



#미운오리새끼 백조가 되다

그는 강원도에 위치한 관동대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화단에서 미술을 한다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학연, 지연, 혈연이 만연한 이 사회에서 그를 이끌어 줄 끈은 없었다.

“저를 가르쳐 주셨던 교수님들은 모두 순수하고 작품을 진정으로 즐기는 분이셨어요. 자연 속에서 그분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죠. 어차피 미술은 혼자 가는 거예요. 혼자 가다 보면 결국은 나중에 다 만나게 돼 있잖아요. 저는 어떻게 보면 한국 화단에서는 이방인 같은 존재인 것 같아요. 여기저기 끌려 다닐 일도 인사를 다닐 일도 없었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작품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그가 해외에 진출한 것도 우연찮은 계기에서 시작됐다. 해외 아트페어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부스비, 작품운반료 등 일정의 참가비를 지불하고 가야한다. 그에게는 생각치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다 2010년 지금까지도 인연을 맺고 있는 한 화랑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뉴욕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에 참가할 것을 권했다.

“어려운 일이죠. 아트페어에 참가했다가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1~2천만원은 손해본다고 봐야해요.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작가는 없어요. 그런데 고맙게도 인연을 잘 맺어 아트페어에 참가하게 됐죠.”

   
 

거기서 일이 터졌다. 가져간 작품 5점 중에 3점이 팔린 것이다. 믿을 수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는 일이 일어났다. 150호나 되는 대형 작품이 팔린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외시장에서 그것도 동양의 작가가.

“전날 꿈자리가 좋았다 싶었더니 아침부터 전화가 걸려왔어요. 작품이 팔렸다는 거예요. 너무 신기했죠. 그런데 그런 전화가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연달아 걸려왔죠. 하늘에 붕 뜬 기분이었어요.”

그 일을 계기로 파리, 런던, 베이징, 홍콩, 싱가폴, 이스탄불, 터키 등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에 참가하고 있으며,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매번 상당수의 작품이 팔렸다. 올해만해도 10여개국의 아트페어에 참가, 많은 작품이 팔려나갔다.

“외국은 프로필을 보지 않아요. 오로지 작품만 판단하고, 작품으로 승부를 보죠. 작품만 가지고 판단해야 하는데 모든 것들이 상업적으로 연결되다 보니 한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예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가 그림을 시작한 것도, 버려진 집에서 목도장을 발견한 것도, 해외아트페어에 참가하게 된 것도 모두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됐다. 우연한 계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준비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치열하게 고민하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실하게 준비해왔다. 흘러가는 시간을 가만두지 않고 쪼개고 쪼개 나눠 썼다.

“소나무가 제대로 자라기까지는 7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해요. 7년 뒤에는 쑥쑥 성장하죠. 제가 지금 그 위치에 와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합니다. 제 상황과 환경에 개의치 않고 꾸준히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작업해 왔어요. 이런 지난 25년의 노력이 이제 조금씩 빛을 발하는 것 같아요. 이제 그 영양분을 발판삼아,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뛰어넘으면 저의 줄기들이 더욱 굵어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걸렸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지난 시간들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요즘 친구들은 기다릴 줄 모르는 것 같아요. 지금 당장 이 옷이 좋아보인다고, 이쁘다고 입으려고 해요. 결국은 다 무의미한 것들인데. 지금 갖지 않아도 계속 나를 단련하고 무장하면 결국은 가질 수 있어요. 아니 가질 수 있어도 갖지 않게 되는 때가 오죠. 우리는 영혼이 있잖아요. 장인정신이라고 하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잘 물려주신 것 같아요. 젊은 친구들이 그 장인정신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기술은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본질이 중요해요. 유행보다는 자기 것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자기 작업에 대한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송시연기자

사진=이정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