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 반대 못 박은 박근혜… '지하경제와 전쟁'
● 공약 재원 135조원 필요하지만 증세 카드 받으면 정치적 부담
● 국세청, 가짜석유 전격 세무조사…정권교체기에 풀린 물가도 쐐기
박근혜 정부의 국정 키워드 두 가지가 공개됐다. 물가안정과 증세 불가다. 박 대통령은 27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과의 첫 회의에서 이를 집중 논의했다. 박 대통령이 많은 현안 중에서 두 가지를 선택한 것은 민생을 최우선 순위로 삼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 방향을 가늠케 한다. 물가와 세금은 민생 안정의 출발점이다.
박 대통령의 이날 발언으로 증세는 정부가 맨 나중에야 고려해볼 카드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증세 논의는 당분간 수면 아래로 내려앉게 됐다. “공약 재원 마련이 어려우니 증세를 하라”는 곳곳의 제안은 현실적이고 친절한 조언이다. 대선 당시 잡은 공약 재원만 135조원이다. 그러나 이제 막 출발한 박근혜 정부로선 증세 카드를 쉽게 받으면 받을수록 정치적 곤경에 처하게 되는 딜레마가 있다. 복지 확대가 명분이라 해도 증세는 조세저항을 부를 수밖에 없다. 흔히 증세를 ‘독이 든 술잔’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게다가 “가급적 증세를 않는다”는 공언을 뒤집는 셈이 돼 박 대통령의 강점인 ‘신뢰’ 브랜드가 상처를 입게 된다.
증세에 대한 정부 입장은 분명해졌으나 박 대통령 스스로 운신의 폭을 제약한 측면이 있다. 이제 남은 카드는 박 대통령이 언급한 것처럼 낭비를 줄이고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얼마나 재원을 조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재원 조달 계획을 거듭 요청했지만 기획재정부가 끝내 만족할 만한 답을 제출하지 못했을 정도다.
‘지하경제와의 전쟁’은 불가피해졌다고 볼 수 있다. 조세연구원은 사업소득세만 연간 22조~29조원이 탈루되는 것으로 추산한다. 당장 국세청은 이날 전격적으로 가짜 석유 제조·판매자 66명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지하경제에서 세금을 끄집어내겠다는 첫 신호탄이다. 국세청은 앞으로 가짜 양주 제조·판매업자 등 지하경제를 구성하고 있는 불법업자에 대한 세무조사를 확대할 계획이다. 이미 세무조사 전문인력 400여 명을 증원했다. 지하경제를 지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관련 정책도 속도가 빨라질 전망이다. 국세청이 금융정보분석원(FIU) 고액현금거래 정보를 공유하게 하는 방안은 금융계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박 대통령은 이날 회의를 통해 공직사회 기강 다잡기에 나섰다고 볼 수 있다. 물가안정 요구는 박 대통령이 공직사회에 안겨준 첫 번째 숙제다. 사실 정권교체기를 틈타 물가는 고삐가 풀려 있었다. 지표상으로는 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5%에 그칠 정도로 안정돼 있지만 체감물가는 그게 아니었다. 물가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전기요금과 도시요금이 올 들어 4% 이상 인상됐다. 지방에선 더 심했다. 부산·대구·대전·울산에서 택시요금이 15~19%, 경남에선 시내버스 요금이 9.3% 올라갔다. 충남에선 하수도 요금이 22.4%나 인상됐다. 급기야 새누리당이 25일 회의를 열어 “올해 안에는 추가적인 공공요금 인상이 없도록 해달라”고 정부 측에 특별 주문을 할 정도였다. 가공식품 가격 상승은 아예 서민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 올 들어 밀가루·포장김치·간장·된장 가격들이 일제히 7~8% 올랐다.
물가는 가만 놔두면 뛰어오르는 본성이 있다.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관료 사회가 물가 관리에 뒷짐을 지고 있으면 이런 본성은 더 확대된다. 전국에서 공공요금 인상이 경쟁적으로 이뤄진 것이 그 방증이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기관장은 “정권교체기에 공공요금을 현실화하지 않으면 어려워진다는 생각이 퍼져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28일 긴급 차관급 회의를 열어 서민 물가안정 방안을 논의한다. 물가 관리의 성패가 1기 박근혜 정부 역량에 대한 평가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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