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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특례시의 종합/*기존_ 자료3(수원관련)종합

수원의 유래=모수국-수원의등장-화성건설-근대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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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3 21:11
http://tong.nate.com/jc5115/42877773

모수국

"수원지역의 첫 이름 모수국"

"수원지역의 첫 이름 모수국"

언제부터 우리 조상이 수원에 살았을까요? 그것은 대략 10만년 전부터였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10만년 전이라니,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지요. 이 시기를 보통 구석기 시대라고 부릅니다. 구석기 시대는 돌을 깨뜨려 만든 도구를 사용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때부터 조상들이 살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그것은 파장동과 수원 지역의 곳곳에서 그 시대의 유물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물이 발견됐다는 것은 그 시대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구석기 시대에 수원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가, 대략 5,000년 전쯤인 청동기 시대에 다시 돌아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수원 지역에서 중석기·신석기 시대의 유물은 보이지 않고, 청동기 시대의 유물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떤 유물이냐 하면, 바로 고인돌입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이 수원 지역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고인돌이란 커다란 돌로 만든 옛날 조상들의 무덤이에요. 또 다른 유적으로는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를 들 수 있습니다. 서둔동 여기산에서 발견된 집터 유적을 통해서 이곳에서도 오랫동안 사람들이 머무르면서 생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동기나 철기를 사용하던 시절, 수원 지역에도 작은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고조선을 세우시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한반도 남쪽에서는 삼한, 즉 마한·진한·변한이라는 세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그때 수원 지역은 ‘모수국’이라고 하였는데, 바로 마한의 작은 나라였습니다. ‘모수국’이라는 이름이 수원의 최초의 이름이지요.


이후 삼한은 없어지고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대를 삼국 시대라고 합니다. 삼국 시대는 서로 영토를 넓게 차지하기 위해, 특히 우리 나라의 중심 지역인 한강 유역을 놓고 많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원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가 다스리는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쯤의 일입니다.


한편 수원을 차지한 고구려는 수원 지역의 이름을 ‘매홀’이라고 고쳤습니다. ‘매홀’이 무슨 뜻이냐구요? ‘매홀’은 물이 많은 곳을 의미합니다. 수원은 대대로 물이 풍부해 이름에 항상 ‘물’이라는 뜻이 담겨 있어요.이후 신라가 크게 성장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한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요. 이때를 우리가 흔히 통일 신라 시대라고 부릅니다.


삼국이 통일되고 다시 90년 가까이 지난 뒤 수원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 또 한 번 바뀌게 되었습니다. 즉 경덕왕이 다스리던 757년에 ‘매홀’이라고 불렀던 수원을 ‘수성군’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역시 물이 많은 곳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어요.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의 수원 지역은 중국과의 왕래를 위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어요. 그래서 이곳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운 것도 사실이에요. 당시 이곳에 ‘당성’ 혹은 ‘당항성’이라고 부르는 성을 쌓아서 바다에서 쳐들어오는 외적도 물리치고 우리 나라 배도 보호하면서 중국과의 왕래를 편하게 하였습니다.


수원의 등장

통일 신라 말기에 세워진 고려는 국력이 약해진 신라를 합치고 마침내 전국을 통일하는 강력한 국가로 등장했습니다. 당시 고려 왕건이 남쪽 지방을 정벌할 때 수원 사람 김칠과 최승규 등 200여 명이 왕건을 도운적이 있었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수성군'이었던 수원 지역의 이름이 '수주' 로 바뀌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군’보다는 ‘주’란 지명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왕을 도와준 공로로 보다 중요한 지역으로 대우를 받고 이름도 바뀌었으니, 수원 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했겠지요.오늘날 수원시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 ‘수원’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수주’라는 명칭에서 지금의 수원이란 이름으로 바뀐 시기는 1271년이었습니다. 지금부터 700년이 넘었지요.

이렇게 오랜 전통을 가진 덕인지, 수원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습니다.

화성건설

"신도시를 꿈꾼 화성 건설"

1789년 10월에 정조 대왕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이 수원의 관아가 있는 중심부(현 화성시)로 옮겨지고, 이곳에 있던 수원 사람들이 현재의 수원 지역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이때부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팔달산과 주변 지역이 수원의 중심지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계속해서 1793년 1월 12일에 정조는 수원의 새로운 읍치를 ‘화성’이라고 바꾸고 동시에 이곳을 유수부로 승격시켰습니다. 유수부는 지금의 광역시와도 같은 것입니다. 수원이 유수부로 승격된 것은 개성·강화·광주와 함께 4유수부의 하나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원이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수원 부사를 ‘화성유수’, 수원에 주둔했던 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지휘하는 ‘장용외사’와 화성 행궁을 관리하는 ‘행궁정리사’로 삼았습니다. 1793년에 수원의 이름을 화성유수부로 고치면서 수원이라는 이름과 동시에 부르게 되었습니다.


1794년 1월에는 정조 대왕의 지시로 화성을 쌓는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 9월 10일 화성 성역이 완공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문화의 꽃으로 불리는 화성을 기반으로 수원은 더욱 커져 우리 나라에서 손꼽히는 농업 도시와 상업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원은 상업이 활발해져 시장이 생겼는데 개성, 그리고 평양과 함께 전국의 3대 시장 중의 하나로 소문이 났습니다. 지금의 영동 시장을 말합니다. 영동 시장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이지요? 전국의 상인과 많은 물품이 드나들던 수원이 전국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로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겠지요.


그리고 화성을 중심으로 곳곳에 저수지를 만들고, 대유둔·서유둔과 같은 국영 농장을 만들어 농업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수원에 있는 농촌 진흥청과 같은 국가의 큰 기관은 바로 이 전통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근대수원

"근대화 물결 속의 수원"

전국에 4곳 밖에 없던 유수부로서 농업과 상업 도시로 이름을 날리던 수원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습니다. 1895년에 행정구역의 개편을 통해 유수부가 폐지되고 수원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듬해 전국을 한성부의 1부와 13도로 나누고 각 도마다 관찰사를 두고 관찰부를 지정했습니다. 관찰부란 지금의 도청 소재지와 같은 곳입니다. 수원이 경기도의 관찰부가 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요. 이 당시 수원군은 40개 면과 560개 마을을 두어 큰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한편 수원은 교육열이 매우 높은 곳으로, 1896년 2월 10일에 수원 경기 관찰 소학교가 세워지는 등 근대적 교육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는 일본에 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역사적으로 외적의 침입에 용감히 싸웠던 수원에서도 일제에 항거하여 의병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수원을 근거지로 한 대표적 의병 부대는 홍일초 부대였습니다. 홍일초 부대뿐이 아니라 수원의 각 지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감옥에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우리 나라를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효율적인 통치를 한다는 구실로 우리 나라의 행정 구역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이어온 우리 나라의 전통을 없애려는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인 한성부의 이름을 경성부로 바꿔 경기도 관할 하에 두었고, 경기 도청을 수원에서 경성으로 옮겼습니다. 이런 까닭에 수원의 위상이 잠시 흔들린 적도 있었습니다.


이후 일제는 1914년 4월 1일 경기도에 있는 면의 명칭과 구역의 통폐합을 포함한 전국적인 행정구역의 개편을 단행하였고 수원군은 20면으로 통폐합되었으며, 군의 전체 마을은 270리가 되었습니다.


1919년에는 일제의 강력한 무력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독립을 요구하는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수원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항일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3월 1일에는 제암리 교회에서 시위가 있었고, 화홍문 일대에서도 수백 명이 일제에 맞섰습니다.


3월 16일에는 서장대에서, 21일에는 수원군 동탄면에서, 23일에는 서호 부근에서 약 700여 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수원의 만세 시위는 4월 중순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제암리의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어 불태워 죽이는 잔혹한 짓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1931년 4월 1일에는 전국 41개 지정 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는데, 수원군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수원읍의 각 리의 명칭이 본정·매산정·궁정과 같은 일본식의 지명으로 바뀐 것도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수원에서는 3·1운동 이후에도 계속해서 일제에 항거하는 학생, 청년, 여성, 농민, 노동자들이 독립 운동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지금의 수원 농생명 과학고등학교인 수원고농이 1920년대에 계속해서 학생 운동을 벌였고, 1930년대에도 일제가 우리말과 글을 못쓰게 하는 정책에 대항해서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독서회 활동을 벌였습니다.


수원 지역은 구한말 당시의 의병 운동에서 일제 강점기의 학생·청년 운동에 이르기까지 항일 독립 운동을 앞장 서서 전개해 나갔던 대표적인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속의 수원

"세계 속의 도시로"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수원은 새로운 도시로 거듭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로는 화성군과의 분리였습니다. 1949년 8월 15일에 수원군 수원읍 일원이 수원시로 승격하고, 수원군의 나머지 지역은 화성군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가 시작된 후부터 계속 같은 지역이었던 화성시와 새롭게 영역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이때 경기도에는 수원시를 포함하여 인천시, 개성시 등 3개의 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경기도의 중심 도시는 인천이었습니다. 마침내 1967년 6월 23일 경기 도청이 인천에서 수원으로 옮겨지면서 수원은 경기도 도청 소재지로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수원으로 도청 소재지를 옮기는 것이 경기도의 발전에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수원은 계속 발전하여 도시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1988년 7월 1일 수원시를 장안구(팔달동 외 11개 동)와 권선구(매교동 외 11개 동)로 나누어 이로써 수원은 2구 체제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3년 2월 1일 팔달구가 신설됨으로써 수원은 장안구·권선구·팔달구의 3개의 구로 구성되었습니다.


한말부터 근대 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하여 교육 도시로 이름이 높던 수원은 1970년대 이후 많은 대학교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수원에는 경기 대학교, 아주 학교, 성균관 대학교를 비롯하여 인근에 경희 대학교, 외국어 대학교, 수원 대학교, 한신 대학교, 협성 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수원의 관문인 수원역은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철도와 국도의 건널목에 해당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새삼 주목할 사실은 수원역이 인근 대학교로 향하는 학교 버스의 출발지로 아침과 저녁의 통학 시간대에는 대학생들로 북적거리는 장소라는 점입니다. 이렇듯 수원은 전국 최고의 교육 도시로 손색없는 곳입니다.


한편 1980년대 이후 난파 어린이 합창단, 수원시 교향악단의 창단을 시작으로 많은 문화 예술 단체들이 만들어져 문화 예술의 도시가 됐으며, 각종 스포츠단의 수원 연고로 스포츠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대회가 열리는 도시로 확정됨에 따라 앞으로 국제 도시로서 성장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로써 수원은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기도의 중심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앞서가는 산업 경제의 도시이자 문화 예술의 도시로 21세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수원은 계속 발전하여 도시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1988년 7월 1일 수원시를 장안구(팔달동 외 11개 동)와 권선구(매교동 외 11개 동)로 나누어 이로써 수원은 2구 체제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3년 2월 1일 팔달구가 신설됨으로써 수원은 장안구·권선구·팔달구의 3개의 구로 구성되었습니다.


현재와 같이 장안구, 권선구, 팔달구, 영통구의 4구 체제가 된 것은 2003년 11월24일 매탄 1,2,3,4동, 원천동, 이의동, 영통1,2동, 태장동을 편입한 영통구가 설치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수원의 유래

'이름의 유래'

유래수원은 삼국시대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시절(5세기 말엽에서 신라통일까지)에는 매홀(買忽)이라 불렀는데 통일신라 경덕왕때(757년) 이르러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고 다시 고려 때는 수주(水州)가 되었다.


여기서 성이나 군, 또는 홀과 주는 행정구분에 따른 지명 접미어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명의 핵심인 '水'와 '買'가 주목의 대상이 된다


'買'는 발음상 물(水)과 관련된 어사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고유문자가 없던 시절, 한자의 음과 뜻(훈)을 빌어 고유명사를 표기한, 소위 말하는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이다


한편 買忽과 忽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忽은 '홀'로 읽히는 한자지만 표기 시에는 '골'로 읽혔으리라 짐작된다.

따라서 매홀은 물골을 뜻하며 당시'(매)골' 또는 '미골'로 발음되었으리라 추정하는 것이다





"물"에서 비롯된 이름

"므리[水]의 고장 - 모수국(牟水國)"

흔희 '수원'이라면 경부선 열차가 통과하는 서울의 남쪽 관문 또는 화성이 잘 정비되어 있는 현재의 수원시 중심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수원의 본모습은 이보다 훨씬 서쪽으로 옮겨 지금의 화성군, 그 중에서도 서해 바닷가로 우리 의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오늘의 수원은 앞서 말한 대로 지금으로부터 고작 200 여 년 전의 조선 시대 정조 대와의 역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수원이란 지명의 유래는 본래 내륙이 아닌 바닷가 갯마을에서 비롯되었다. 200년의 열 배가 넘는 2천여 년 전의 아득한 옛날, 현 화성군의 서쪽은 대부분 바다였으리라 짐작된다.


화성과 수원은 그 지형이 야트막한 야산으로 이루어져 그 사이로 호수나 저수지 같은 물이 많기로 유명하다

본래 바닷물로 출렁거렸을 이 지역에 차츰 물이 빠져나가면서 작은 섬들은 산으로, 그리고 깊은 곳은 지금 처럼 호수나 웅덩이로 변했을 것이다. 바닷물이 빠져 육지가 점점 넓혀져가던 그 즈음 온통‘물나라’[水國]로 보였을 포구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보금자리를 틀고 그 마을이 점점 커져서 오늘의 수원이란 지명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흔히 수원을 말할 때 그 시발지로서 삼한 시대의 모수국(牟水國)을 떠올리곤 한다. 중국의 사서 『삼국지』「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 상(上) 205에 나오는, 마한 50여국 중의 하나인 모수국(牟水國)이 옳다면 모수(牟水)는 화성군 중에서도 바다에 연한 남양면이나 송산면 아니면 서신면 쯤이 되리라 추정한다.

모수국(牟水國)의 정확한 고유어 발음은 재구할 수 없으나 대체로 물이 많은 곳, 곧 물나라란 뜻으로 쓰인 것 같다. 혹자에 따라서는 모수국(牟水國)을‘벌물’,‘물벌’, 혹은‘물골’의 표기로 보기도 하나 그렇게 읽혔을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모수(牟水)에 접미한 국(國)은 지금처럼 국가 개념의‘나라’가 아니라 단순히‘온누리’라고 할 때의‘누리’[世]와 마찬가지로 지명에 쓰인 접미어이다. 말하자면 부족 국가 시대에 한 부족이 모여 살던 집단 마을을 지칭한 것이다.


수원시 이름 변천사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그들이 살고 있는 땅 이름은 변하기 마련이다. 지명은 단순히 지표상의 한 지역을 다른 곳과 구분짓기 위해 붙인 이름만은 아니다. 그 이름 속에는 그것을 지어붙인 당시의 언어는 물론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까지 담고 있다는데 우리의 주목에 값한다. 지명의 형성은 그 곳 주민의 정신 세계의 표출이며 지명의 변천은 그 지역 역사의 한 줄기이다.

아득한 옛날 부족 국가 시절, 마한(馬韓)에‘모수국(牟水國)’이란 마을이 있었다고 중국측 사서는 적고 있다. 이 모수국(牟水國)이 지금의 어디인지는 정확히 비정할 수 없으나, 삼국 시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있던 5세기 말엽에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때까지 불렀다는 ‘매홀(買忽)’과 대체로 동일한 지명일 거라고 추정한다.

중국측 기록인 모수(牟水)와 우리측 기록인 매홀(買忽)은 당시 어떻게 불렸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다만 이 땅 이름은 비록 한자로 적었으나 우리 고유어임이 분명하고, 또‘모(牟)’나 ‘매(買)’는 발음상 물[水]과 관련된 어사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고유 문자가 없던 시절, 한자의 음과 뜻[訓]을 빌어 고유 명사를 표기한, 소위 말하는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의 난해성이 고유어에의 접근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모수(牟水) 혹은 매홀(買忽)로 기록된 고유 지명은 신라의 삼국 통일과 함께 큰 변화를 겪는다. 순수 고유어로 불리던 삼국의 땅 이름이 2자(字)로 된 한자어 지명으로 바뀌는 지명 개혁을 맞이한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757년(경덕왕 16)에 이르러 매홀(買忽)은 지명의 본뜻을 살린 한자어‘수성(水城)’으로 개칭된 것이다. 물론 지명의 보수성으로 인하여 원주민 사이에는 이후 오랫동안 매홀(買忽)이란 고유명이 쓰였겠지만 수성(水城)에서 비롯된‘수주(水州)’,‘수원(水原)’등의‘수(水)’자계 행정 지명이 점차 이 지역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
잡게 되었다.

한자어 지명 수성(水城)은 고려 건국 초(940년 : 태조 23) 중국식을 모방하여 수주(水州)로 개칭한 것을 필두로‘수주목(水州牧)’을 거쳐 지금처럼 수원(水原)이란 이름이 등장한 시기는 1310년(충선왕 2)에 이르러‘수원부(水原府)’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이 이후의 변천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열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군(郡)·성(城)·주(州)·부(府)·도호부(都護府)·목(牧)·읍(邑)·시(市) 등은 행정 개편이 있을 때마다 승격과 강등을 반복한 행정명의 변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후 수(水) 또는 수원(水原)과는 별도로 또 하나의 이름인‘화성(華城)’이 탄생한다. 주지하는 대로 이 한자 지명은 1783년 정조 대왕이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침(陵寢)을 이 곳으로 옮기고 새로운 도시 건설을 위해 화성을 쌓음으로서 비롯된 이름이다.

지금은 수원시(水原市)와 화성군(華城郡)이 행정 구역상 따로 존재하지만, 기원적으로 이 두 이름은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 200년 전 정조 대왕은 수원부의 호칭을 화성으로 바꾸고, 그 이름을 친히 현판에 써서 장남헌(壯南軒)에 걸었다고 하는데, 정조는 무엇을 근거로‘화(華)’자를 이 땅의 이름으로 택했을까? 수원의 지명 유래를 얘기하자면 수원(水原)과 화성(華城)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나아가 그 중에서도‘수(水)’와‘화(華)’의 탐구가 그 핵심적인 내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