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더 이상 사정하지 마세요'
“최고위원님 더 이상 사정하지 마세요.” 이는 1년 전 이맘때 18대 총선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 명단을 본 박근혜 전 대표가 친박 공천심사위원인 강창희(63)전 최고위원에게 한 말이다.
“비례대표 후보 남녀 각각 25명씩 50명에 든 박 전 대표측 사람은 엄밀히 말해 2명 뿐이었다. 그것도 당선 가능성에서 끝이나 마찬가지인 21번과 22번. 박 전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말했다. 이후 불어닥친‘친박열풍’은 거칠 것이 없었다.
대전?충남을 기반으로 5선 국회의원을 지낸 강창희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자신의 30년 정치인생을 담은 자전적 정치에세이 ‘열정의 시대’(중앙북스)를 출간했다.
강 전 최고위원은 작년 총선을 앞두고 당 인재영입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당연직 공천심사위원이 됐다. 그는 이 책에서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한나라당, 아니 친이 측이 무소불위의 칼날을 휘두른 공천 뒷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에 따르면(제4장 악전고투 18대 총선 공천심사) 작년 지역구 공천이 끝났을 때만 해도 큰 사단이 벌이질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관측된다.
그는 “박 전 대표측은 미흡하지만 공천결과를 받아들였고 ‘잘하면 50명까지도 당선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아 나도 ‘그럼 됐다’고 말해 주었다.”(391쪽)고 밝혔다.
물론 박 전 대표가 공천탈락자들을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강남의 한 중식당에서 강 전 최고위원을 만난 박 전 대표는 “수고하셨다”면서 “안된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요. 어떻게 하지요.”라며 탈락자들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단은 고작 25명 정도 당선될 비례대표에 600명이나 후보가 몰리면서 엿보이기 시작했다. 심사기간에 쫓긴 공심위는 안강민 위원장과 이방호 사무총장, 강 전 최고위원에게 소위를 구성해 심사토록 위임했다.
강 전 최고위원은 “후보결정 마감 이틀전에 이방호 총장이 (축소본) 명단을 내놓았는데 이미 남녀 각각 25명씩 50명의 비례대표 후보가 순번까지 정해져 있어 심사를 할 이유가 없었다”며 심사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했다.
이후 안강민 위원장의 설득으로 재심사에 들어갔으나 이 총장이 “박 대표 측과 이미 합의한 사안”이라며 밀어부쳤다. 그 자리에서 강 전 최고위원의 확인 전화를 받은 박 전 대표는 “그런 합의를 한 적이 없다”고 했고, 비례대표 후보 명단을 본 후에는 “최고위원님 더 이상 사정하지 마세요”라는 한마디만 남겼다. 강 전 최고위원은 “이미 싸워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한 듯했다”고 전했다.
강 전 최고위원은 그러나 친이(친 이명박)측이 공천에서 전횡을 휘두르도록 만든 책임은 박 전 대표 측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박 전 대표측이 공심위 구성에 합의할 때 나를 제외하고 충분한 세력을 확보했어야 했는데 알고보니 박 전 대표측 추천을 받은 사람은 강정혜 서울시립대 교수 한 명뿐이었다”며 “원천적으로 잘못된 공천이 이뤄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줬던 것”이라고 꼬집었다. “솔직히 박 전 대표가 원망스러웠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8대 공천심사외에도 탄핵열풍이후 박 전 대표의 대표 천거 과정 등 눈길끄는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강 전 최고위원은 29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박 전 대표에게 책을 보냈는데 아무 말씀이 없었지만 출판기념회에는 참석하시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열정의 시대’(총412쪽 1만3천원) 출판기념회는 내달 9일 세종문회회관 세종홀에서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