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사서에 아득한 옛날 부족 국가 시절, 마한(馬韓)에 ‘모수국(牟水國)’이란 마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모수국(牟水國)이 지금의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삼국 시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있던 5세기 말엽에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때까지 불렀다는 ‘매홀(買忽)’과 대체로 동일한 지명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중국측 기록인 모수(牟水)와 우리측 기록인 매홀(買忽)은 당시 어떻게 불렀는지 정확히 비교할 길은 없다. 다만 이 땅 이름은 비록 한자로 적었으나 우리 고유어임이 분명하고, 또 ‘모(牟)’나 ‘매(買)’는 발음상 물[水]과 관련된 어사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고유 문자가 없던 시절, 한자의 음과 뜻[訓]을 빌어 고유 명사를 표기한, 소위 말하는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의 난해성이 고유어에 대한접근을 가로막고 있다. 모수(牟水) 혹은 매홀(買忽)로 기록된 고유 지명은 신라의 삼국 통일과 함께 큰 변화를 겪는다. 순수 고유어로 불리던 삼국의 땅 이름이 2자(字)로 된 한자어 지명으로 바뀌는 지명 개혁을 맞이한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757년(경덕왕 16년)에 이르러 매홀(買忽)은 지명의 본뜻을 살린 한자어 ‘수성(水城)’으로 개칭된 것이다. 물론 지명의 보수성으로 인하여 원주민 사이에는 이후 오랫동안 매홀(買忽)이란 고유명이 사용돼겠지만 수성(水城)에서 비롯된 ‘수주(水州)’, ‘수원(水原)’등의 ‘수(水)’자계 행정 지명이 점차 이 지역에서 자리잡게 된다. 한자어 지명 수성(水城)은 고려 건국 초(940년 : 태조 23) 중국식을 모방하여 수주(水州)로 개칭한 것을 필두로 ‘수주목(水州牧)’을 거쳐 지금처럼 수원(水原)이란 이름이 등장한 시기는 1310년(충선왕 2)에 이르러 ‘수원부(水原府)’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이 이후의 변천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열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군(郡) · 성(城) · 주(州) · 부(府) · 도호부(都護府) · 목(牧) · 읍(邑) · 시(市) 등은 행정 개편이 있을 때마다 승격과 강등을 반복한 행정명의 변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후 수(水) 또는 수원(水原)과는 별도로 또 하나의 이름인‘화성(華城)’이 탄생한다. 주지하는 대로 이 한자 지명은 1783년 정조 대왕이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침(陵寢)을 이 곳으로 옮기고 새로운 도시 건설을 위해 화성을 쌓음으로서 비롯된 이름이다. 지금은 수원시(水原市)와 화성군(華城郡)이 행정 구역상 따로 존재하지만, 기원적으로 이 두 이름은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 200년 전 정조 대왕은 수원부의 호칭을 화성으로 바꾸고, 그 이름을 친히 현판에 써서 장남헌(壯南軒)에 걸었다고 하는데, 정조는 무엇을 근거로 ‘화(華)’자를 이 땅의 이름으로 택했을까? 수원의 지명 유래를 얘기하자면 수원(水原)과 화성(華城)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나아가 그 중에서도 ‘수(水)’와 ‘화(華)’의 탐구가 그 핵심적인 내용이 될 것이다. <자료제공= 수원시청> 므리[水]의 고장 - 모수국(牟水國) | | | | | 흔히‘수원’이라면 현재의 수원시 중심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수원의 본모습은 이보다 훨씬 서쪽으로 옮겨 지금의 화성군, 그 중에서도 서해 바닷가로생각해야 한다. 오늘의 수원은 앞서 말한 대로 지금으로부터 고작 200여 년 전의 조선 시대 정조 대왕의 역사에서 비롯 됐다. 수원이란 지명의 유래는 본래 내륙이 아닌 바닷가 갯마을에서 비롯되었다. 200년의 열 배가 넘는 2천여 년 전의 아득한 옛날, 현 화성군의 서쪽은 대부분 바다였으리라 짐작된다. 화성과 수원은 그 지형이 야트막한 야산으로 이루어져 그 사이로 호수나 저수지 같은 물이 많기로 유명하다. 이 지역에 차츰 물이 빠져나가면서 작은 섬들은 산으로, 그리고 깊은 곳은 지금처럼 호수나 웅덩이로 변했을 것이다. 바닷물이 빠져 육지가 점점 넓혀져가던 그 즈음 온통‘물나라’[水國]로 보였을 포구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보금자리를 틀고 그 마을이 점점 커져서 오늘의 수원이란 지명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을 말할 때 그 시발지로서 삼한 시대의 모수국(牟水國)을 떠올리곤 한다. 중국의 사서 『삼국지』「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 상(上) 205에 나오는, 마한 50여국 중의 하나인 모수국(牟水國)이 옳다면 모수(牟水)는 화성군 중에서도 바다에 연한 남양면이나 송산면 아니면 서신면 쯤이 되리라 추정한다. 모수국(牟水國)의 정확한 고유어 발음은 대체로 물이 많은 곳, 곧 물나라란 뜻으로 쓰인 것 같다. 혹자에 따라서는 모수국(牟水國)을‘벌물’, ‘물벌’, 혹은‘물골’의 표기로 보기도 하나 그렇게 읽혔을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모수(牟水)에 접미한 국(國)은 지금처럼 국가 개념의‘나라’가 아니라 단순히‘온누리’라고 할 때의‘누리’[世]와 마찬가지로 지명에 쓰인 접미어이다. 말하자면 부족 국가 시대에 한 부족이 모여 살던 집단 마을을 지칭한 것이다. ‘牟’의 한자음은‘모’또는 속음(俗音)으로‘무’로 읽힌다(정확한 한자음은 mou / mau / mu). 자전에 의하면 ‘클·모’, 또는 ‘땅이름·모’로 풀이하고 있으나 차자표기법에서는 훈(訓)이 아닌 음으로 읽히는 차음자(借音字)이다. 모(牟)가 차음으로 쓰인 용례를 보면, 신라 지명의 모지현(牟支縣), 모산정(牟山亭)을 비롯하여 백제 인명의 모대왕(牟大王), 모도(牟都), 모태(牟太) 등을 들 수 있다. 현 고창의 삼국 시대의 이름이 모량부리(毛良夫里)였는데, 이는 삼한 시대의 모려비리(牟盧卑離)의 계승이다. 그렇다면 모려(牟盧)와 모량(牟良)이 같은 어사의 서로 다른 표기로서, 모(牟)나 모(毛)는 똑같이 모/무의 차음임을 알 수 있다. 물[水]은 (중세어로는‘물’) 본래 어두에 와서 다른 말을 수식할 때는 간혹 받침‘ㄹ’이 탈락하여‘무/모’또는‘미’로 쓰일 때가 있다. 예컨대 무자이[水尺], 무자위[水車], 무삼[水蔘], 무소[水牛], 무살미(‘물꼬’의 옛말), 무삶이, 무넘이>무너미/무네미[水踰], 무솔, 무좀[水筮] 등의‘무’와 미나리[芹葉], 미장이[泥水匠] 등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모수(牟水)의 모(牟)가‘ㄹ’받침이 탈락한 모/무의 표기라 짐작되며, 또 모수국(牟水國)은 본래 모량수국(牟襄水國)의 준말로 본다면, 모량(牟襄)이 탈락 이전의 어형을 표기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수국(水國)은 모(牟) 또는 모량(牟襄)이 물(水)을 뜻하는 고유어임으로 여기에 한자어를 덧붙여 놓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牟) 또는 모량(牟襄)과 수국(水國)은 따로 분리해서 해독해야 옳다고 본다. |
수원시를 아시나요 ③ | 지명의 유래 - 고서에 기록된 수원 | | | | (미)골 → 매홀(買忽) 수원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명확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35, 잡지 4, 지리 2(卷 第三十五 雜志 第四 地理 二)에서 찾아볼 수 있다. · · · · · 水城郡 本 高句麗 買忽郡 景德王 改名 今 水州 수원은 삼국 시대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시절(5세기 말엽에서 신라 통일까지)에는 매홀(買忽)이라 불렀는데 통일신라 경덕왕대(757년) 이르러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고 다시 고려 때는 수주(水州)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여기서 성(城)이나 군(郡) 또는 홀(忽)과 주(州)는 행정 구분에 따른 지명 접미어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명의 핵심인‘수(水)’와 ‘매(買)’가 주목의 대상이 된다. 앞서 매홀(買忽)의 매(買)와 모수(牟水)의 모(牟)는 동일어의 다른 표기일 가능성이 있다. ‘매(買)’의 중국 한자음[7세기 초의 중고음(中古音)]은‘마이’(mai)이며, 우리의 전통 한자음은‘미’로 추정된다. 앞서 물(믈)이 어두에 와서 지명 접미어를 수식할 때는 받침‘ㄹ’이 탈락하여‘무’또는‘미’로 읽힌다고 했는데, 실제 다른 고구려의 지명 표기에서 매(買)가‘미’(米 또는 彌)와 동일한 차음자(借音字)로 쓰인 예가 있다. · · 內乙買 一 云 內余米 (지리 4) · · 買召忽 一 云 彌鄒忽 (지리 2) ‘米’와‘彌’는 중국 중고음(中古音)이‘미에’(miei, 혹은 myie)이며 우리는 이를 ‘미’로 읽는다. 물나리를 미나리라 하고 물장이를 미장이라 발음하는 경우와 같은 어형이다.
한편 이런 추정도 가능하다. 우리말이 본래 개음절어(開音節語)였음을 가정하면 중세 때 ‘믈’로 읽혔던 ‘물’의 옛말은 받침이 없는 두 음절의 ‘므리’로 연구할 수 있겠다. 이같은 기원형 ‘므리’는 그 말이 쓰이는 환경(수식어나 피수식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어형 변화를 거쳤으리라 생각된다. ┌ 수식어 : 므리> /매>무/모/미 므리(水)│ └ 피수식어 : 므리>믈>물 그런데 고지명 표기에 보이는 매(買)와 ‘믈’(물)의 홀(勿)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매(買)가 북방계 고구려어이며, 홀(勿)은 남방계(韓語 : 신라어와 백제어)로서 이들이 한반도에서 남북의 언어 차이를 보이는 실례라 지적된 바 있다. 그러나 므리>믈/ 의 위와 같은 어형 변화를 고려한다면 이런 견해는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실지로 매(買)는 어두가 아닌 어말, 곧 피수식어로 쓰일 때는 물[水]이 아닌 천(川)이나 정(井)과 대응 표기 되었다. 伊珍買>伊川 (지리 2) 內乙買>沙川 (지리 2) 薩買>淸川 (지리 2) 伏斯買=深川 (지리 4) 省知買=述川 (지리 4) 於斯買=橫川 (지리 4) 於乙買=泉井 (지리 4) 於乙買串>泉井口 (지리 4) 골[買忽]의 (매)가 모(무), 미와 함께 물의 변이음으로 본다면 수원과 화성의 현 지명에 많이 보이는‘매(梅)’자 이름도 이 매(買)의 흔적이 아닐까 의심한다. 이를테면 남양 반도 서남단에 위치한 서신면의 면 소재지인 매화리(梅花里)를 비롯하여 우정면의 매향리(梅香里), 수원시 권선구의 매산로(梅山路)와 매교(梅橋), 장안구의 매향동(梅香洞), 팔탄면의 매곡(梅谷) 등이 그런 예인데, 여기서 매(梅)는 매화꽃의‘매’가 아니라 물을 뜻하는 매(買)의 매로 봄이 옳을 듯하다. 한편 매홀(買忽)의 홀(忽)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忽’은‘홀’로 읽히는 한자지만 표기 당시에는 ‘골’로 읽혔으리라 짐작된다. 고구려 지명에서 가장 많이 쓰인 접미어 ‘골’[忽]은 본래 말 모음을 유지한 ‘구(고)루’ (溝樓者 句麗名 城也, 三國志)형으로도 나타난다. 따라서 매홀(買忽)은 당시‘ (매)골’ 또는 ‘미골’로 발음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자료제공 = 수원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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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을 얼마나 아시나요④ | 곶(岬·串)에서 비롯된 이름 = 화성(華城) | | | | 정조가 명명했다는 화성(華城)의‘화(華)’자의 유래는 화성군 남양면의 바닷가 포구에서 찾을 수 있다. 장산곶이란 예에서 보듯 지명 아래 붙어서 반도형(半島形)으로 생긴 갑(岬)을 ‘곶’(기원형은‘고지’)이라 한다. 남양 반도라 불리듯 화성군 남양면은 전체가 곶으로 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화량포구[花梁浦]는 그 지형이 마치 입을 내밀 듯 서해 바닷가로 삐죽이 뻗어 있다. 화량포는 일찍이 중국 대륙 문화의 유입 통로로서 신라 진흥왕 때(564)에 화량진(花梁鎭)을 개설했다. 또한 이 곳은 인천이 개항하기 이전까지는 중국 남경(南京)으로 가는 길목으로 흔히 ‘남경두목쟁이’[南京渡項]라 일컬었으며 이 곳에 성을 쌓아 당항성(唐項城)이라 했으니, 이는 당나라로 가는 길목이라는 뜻이다. 이런 전략적인 요충지의 이름을 왜 화량(花梁)이라 붙였을까? 화량은 꽃피는 포구란 뜻은 아니다. 바다로 삐쭉이 내민 곶(cape)에 형성된 마을, 곧‘고지돌’ 혹은 ‘곶돌’을 차자표기한 것이다. 현용어 꽃[花]은 예전에 ‘곶’이라 했고 이는‘串’의 곶과 그 음이 유사하다. 고지>곶을 곶(串)이나 갑(岬)으로 차훈하지 않고 꽃을 뜻하는 화(花)로 대신한 것은 지명 표기에서 이왕이면 좋은 뜻의 한자로 적으려는 지역민의 바람이 작용한 탓이다. 한편 화량(花梁)의 양(梁)은 지명 표기에‘돌’또는‘들’로 읽히는 차자이다. 노량진(鷺梁津)이 노들나루로, 명량(嗚梁)이 울돌로 읽히는 것처럼, 돌(들)은 강이나 해변가의 취락지에 붙는 지명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남양에는 거지동(居芝洞)이란 마을이 있다. 거지(居芝)가 고대의 고차(古次), 홀차(忽次)와 같은‘고지’의 차음 표기이다. 옛날 화량진(花梁鎭)은 지금의 남양면 지화리(芝花里)인데 이는 거지동(居芝洞)의 지(芝)와 화량동(花梁洞)의 화(花)를 따온 것으로 거지(居芝)나 화(花)는 공히‘고지’의 표기이다. 이와 관련하여 수원과 화성에는 유독‘화(花)’자 지명이 눈에 많이 띄이는 게 결코 예사롭지 않다. 이 지역에 꽃이 많아서가 아니라 해변으로 뻗은 곶(串)이 많아서 붙어진 이름일 것이다. 남양면의 면 소재지인 매화리(梅花里)의 매화(梅花)는 수원 지명의 어원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매(梅)가 매홀(買忽)의 매(買)와 통하는 물>미를 뜻하고, 화(花)는 고지>곶(串)을 뜻하기 때문인데 이런 점에서는 수화리(水花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우정면의 화산리(花山里)와 융건릉이 위치한 화산(花山)이란 지명이다. 흔히 ‘꽃뫼’라 일컫는 화산(花山)의 화(花)에서 이와 통하는 화(華)로 옮겨가지 않았나 하는 의심에서다. 곶(串) > 곶의 화(花)가 다시 화(華)로 화(華)는 화(花)와 통하는 한자이다. 자전에 의하면‘꽃필·화[開花]’, 또는 중화(中華)와 같이 땅 이름이나 나라 이름으로 쓰인다고 적고 있다. 본래 고지[串]에 솟은 산, 즉 곶뫼[串山]를 뜻이 좋은 화산(花山)으로 적다 보니 훗날 사람들은‘꽃뫼’로 부르게 됐다. 그리고 이 꽃뫼, 곧 화산에서 화성(華城)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사정은 정조가 화성(華城)이라는 지명을 풀이한 대목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이 된다. 1793년(정조 17) 1월 12일 팔달산에 올랐던 정조는 팔달산 아래 신도시를 화성(華城)이라 명명(命名)했다. 이때 정조는 수원부를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격상시켜 서울을 개성(開城), 광주(廣州), 강화(江華), 화성(華城)의 4 유수부가 동서남북으로 감싸는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화성유수부에 장차 성곽 축성을 의도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4년(정조 18) 1월 15일부터 화성(華城)이라 불리는 성곽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화성(華城) 축성 바로 전날인 1월 14일 정조는 연석(筵席)에서 화성(華城)이라 이름지은 내력을 밝혔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화성(華城)에서의 ‘화(華)’자는 중국 요(堯) 임금 때 화(華) 땅의 봉인(封人)이 장수(長壽), 부귀(富貴), 다남자(多男子) 등 세 가지를 가지고 요 임금에게 축원(祝願)하였다는 고사를 취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 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이 자리한 화산(花山)의 ‘화(花)’자를 딴 것이기도 하다. 곧 화(花)는 화(華)와 통하니 화성(華城)은 곧 화산(花山)이라는 뜻이 된다. 이처럼‘수원’의 지명 유래에는‘물’과 ‘곶’이라는 지형상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고, 여기서 비롯된 수(水)와 화(花) 또는 화(華)가 어우러지면서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던 것이다. <자료제공 = 수원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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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을 얼마나 아시나요⑤] 역사 = 고대 | | | | | 삼국 시대에 수원 지역을 최초로 차지하였던 국가는 백제였다. 마한의 소국이었던 백제는 대방군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한강 유역의 여러 성읍 국가들이 단결할 때 그 중심 세력이 되었다. 여러 성읍 국가들의 중심이었던 백제는 3세기 중엽 고이왕(古爾王) 대에 이르러 급격히 발전하여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했으며, 지금의 경기도 지역 대부분이 당시에 백제의 영토에 포함되어 있었다. 수원을 포함하고 있는 경기 남부 지역은 백제 초기 건국지인 위례성과 인천 지역으로 비정되는 미추홀 지역과 근접하기 때문에, 백제가 마한을 정복하여 고대 국가 체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자국의 영토로 포함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백제는 4세기 중엽 근초고왕(近肖古王) 대에 이르러 비약적인 발전을 보았다. 이 때 백제는 영역을 확장하여 지금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는 물론 황해도·강원도까지 뻗쳤으며 국제적으로도 그 위용을 드러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기록으로 백제 시대에 수원 지역이 어떤 명칭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삼한 시대 이후 삼국 시대에 들어와 수원 지역을 최초로 차지한 나라가 백제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다. 이후 고구려의 남하 정책을 통하여 수원은 백제로부터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되어 그 관할 하에 들어갔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건국하여 4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에 걸치는 시기에 전성기를 이루며 한반도와 만주에 걸치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게 됐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남하 정책을 추진하여 427년(장수왕 15)에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했다. 475년(장수왕 63)에 백제의 수도 한산성을 함락하여 백제의 왕인 개로왕(蓋鹵王)을 전사시킴으로써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죽령과 아산을 잇는 영역까지 진출했다. 이 때 고구려는 한강 유역과 그 주변인 수원 지역을 확보하여 고구려의 영토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각 지역의 이름을 고구려식으로 바꾸었는데, 이 때 수원 지역의 이름은‘매홀(買忽)’이라고 했다. 또한‘수성(水城)’이라고 했으며‘매홀군(買忽郡)’이라는 명칭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경우에 지방 제도 중에‘군(郡)’이라는 것이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매홀군’이라는 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매홀의‘홀(忽)’자체가 지방 제도로 보인다.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됐던 수원 지역은 551년(성왕 29)에 다시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수도를 한산주(漢山州)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했던 백제는 동성왕(東城王)·무녕왕(武寧王) 대의 안정 기반을 바탕으로 성왕(聖王) 대에 이르러 백제의 중흥과 왕권 강화의 목적에서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백제의 중흥을 이룩한 성왕은 551년에 그의 필생 사업으로서 한강 유역 회복 작전을 시도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는 신라·가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서북으로부터 돌궐의 위협과 귀족 세력의 내분에 처해있는 고구려의 위기를 이용하여 백제는 한강 하류를, 신라는 죽령(竹嶺) 이북 10개 군(郡)을 점령했다. 그러므로 한강 하류에 있던 수원은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551년에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었던 수원 지역은 2년 후 신라의 영토에 속하게 됐다.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통로와 한강 유역이 가지고 있는 인적·물적 자원의 확보를 바라고 있던 신라가 553년(진흥왕 14)에 군사를 일으켜 백제가 다시 회복한 영토였던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하고 그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한편으로는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에 힘입었던 것을 생각할 때 한강 유역의 점령이야말로 삼국 통일의 밑거름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수원 지역은 신라가 점령한 한강 하류 지역에 속하는 지역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신라의‘신주(新州)’에 포함되었다. 신주는 4년 후인 557년(진흥왕 18)에 ‘북한산주(北漢山州)’로 다시 568년(진흥왕 29)에 ‘남천주(南川州)’로 바뀌었다. 진평왕 대에 이르러 604년(진평왕 26)에는‘북한산주(北漢山州)’로 고쳐졌다가‘한산주(漢山州)’로 확정됐다. 그 뒤 757년(경덕왕 16) 12월에 9주(州)의 이름을 모두 고칠 때‘한주(漢州)’로 고쳐졌다. 757년 개편 당시‘한산주’는 하나의 소경(小京)과 27개 군(郡), 46개 현(縣)을 관장하였으며, 주(州)에 직접 속하는 현은 둘이었다. 통일 신라 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전국의 지명을 한문식으로 바꾸었는데, 이 때 한주에 속해 있던 수원 지역의 이름은‘수성군(水城郡)’으로 바뀌었다. 이 이름은 통일 신라 이후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계속 사용됐다. <자료제공 = 수원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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