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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특례시의 종합/*기존_ 자료3(수원관련)종합

[수원을 얼마나 아시나요=6,7,8,9,10] 모음= 수원일보 펌

[수원을 얼마나 아시나요=6,7,8,9,10] 모음= 수원일보 펌
2009.09.1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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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을 얼마나 아시나요⑥
역사 = 고려시대
2009년 09월 07일 (월) 편집부 han@suwon.com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와 후백제를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하고 나서 지방 행정 구역을 정비하지 못하다가 940년(태조 2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757년(경덕왕 16년)부터 사용되던 전국의 주·부·군·현(州·府·郡·縣)의 명칭을 고쳤다. 이 때 수성군이었던 수원의 명칭이 ‘수주(水州)’로 승격됐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할 때 수원 사람 김칠(金七)과 최승규(崔承珪) 등 200여 명이 태조에게 귀순하여 협력하였으므로 그 공로로 수주(水州)로 승격시켰다고 고려사에 전한다.

983년(성종 2년)에 행정 구역 정리를 통해 전국에 12목을 설치 할 때 ‘양주(楊州)’가 목(牧)으로 승격되면서 수주도 그 관할 아래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 양주·광주(廣州)에 속한 모든 주·현은‘관내도(關內道)’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수주 역시 ‘관내도’에 속해 있었다.

992년(성종 11년)에 주·부·군·현과 관방(關防)·역참(驛站)·강하(江河)·포구(浦口)의 명칭을 고치면서 수주(水州)의 별호로 ‘한남(漢南)’또는 ‘수성(隋城)’이라고 했다. 995년(성종 14년)에 마침내 전국을 10도(道)로 나누고 12개 주(州)에 각각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다. 전국이 절도사 체제로 개편되는 것을 계기로 수주에는 ‘도단련사(都團練使)가 설치됐다.

이후 수원 지역은 1005년(목종 8년)에 ‘도단련사’가 폐지되고, 1018년(현종 9년)에 지방 관제의 정비를 통해 지방관이 부임하는 ‘지주사(知州事)’로 복구됐다. 지주사로 복구된 수주는 안성현(安城縣)·당성군(唐城郡)·재양현(載陽縣)·안산현(安山縣)·용성현(龍城縣)·정송현(貞松縣)·진위현(振威縣)·양성현(陽城縣) 등 10개의 속현(屬縣)을 거느리게 됐다. 그러나 1031년(현종 22년)에 안성현은 천안부(天安府)로 당성군과 재양군을 인주(仁州 : 지금의 인천)로 이관하여 수주의 속현은 7개의 현이 됐다. 1018년(현종 9년)에 ‘경기제도(京畿制度)’를 실시하여, 개성·장단현령 설치로 왕경(王京) 주위 12현을 ‘경기’의 행정 구역으로 확정했다. 하지만 이 때 수주는 경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1067년(문종 21년)에‘양주목’에 속하였던‘수주’는 양주가‘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되어 남경에 속하게 됐다. 1106년(예종 1년)에 양주·광주 소속 주·현이 들어가 있는 ‘관내도’와 충주·청주 소속 주·현이 속한 ‘충원도(忠原道)’, 공주·운주(運州) 소속 주·현이 속한 ‘하남도(河南道)’를 통합하여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로 만들었다. 이 때 수주는‘양광충청주도’
에 내속됐다. 1171년(명종 1년)에 이를 둘로 나누어 수주는‘양광주도(楊廣州道)’에 속하게 됐다.

‘양광주도’에 소속된 수주가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된 것은 1271년(원종 12년)의 일이었다. 이 해에 착량(窄梁)에서 군대를 주둔하고 있던 몽고 군사가 대부도(大阜島)에 쳐들어와서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죽이자 대부도의 백성들이 분노하여 몽고 군사를 죽이고 항쟁을 했다. 이 때 수주 부사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부도 주민들의 폭동을 진압하여 이 공로로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했다.

대부도민들의 반란을 토벌한 안열의 공으로 ‘수원도호부’가 된지 얼마 후 다시 ‘수주목(水州牧)’으로 승격됐다. 수원도호부의‘목’승격은 아마도 인근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와 ‘강령도호부(江寧都護府)’를 각각 길주목(吉州牧),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시켰던 1308년(충렬왕 34년)의 지방 행정 구획 개편과 시기를 같이하여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해 6월 충렬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이른바 그의 개혁 정치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지방 행정 구획의 개편을 실시했다. 1310년(충선왕 2년)에 전국의 목(牧)을 폐지하기로 하여 수주목이‘수원부(水原府)’로 격하됐다. 1314년(충숙왕 1년)에 양광주도를 ‘양광도(楊廣道)’로 다시 고치어 수원부는 양광도에 내속됐다.

1362년(공민왕 11년)에 홍건적이 선봉 부대를 파견해 양광도 내의 각 주와 군에 항복을 권유했을 때 수원부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항복하여 적의 세력을 더욱 강성하게 했다. 이런 까닭으로 공민왕은 수원부를 ‘수원군(水原郡)’으로 강등시켰다. 이 때 안성 사람들은 투항을 가장하고 연회를 베풀어 적들이 술에 취한 틈을 타서 적장 6명을 죽이고 적을 섬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안성은 조그만 읍(邑)임에도 불구하고, 수원 부곡(部曲)이었던 양량(陽良)·감미탄(甘彌呑)·마전(馬田)·신곡(薪谷) 등을 이속 받았다.

적군에게 투항을 이유로 ‘수원부’의 명호를 강등 당한 수원군은 4년 후인 1366년(공민왕 15년)에 군민(郡民)들이 당시 재상이었던 김용(金鏞)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쳐 다시 부(府)로 승격되고 안성으로 이속 되었던 부곡 4곳 중 3곳을 환속 받았다. 결국 수원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경기도에 속하지 않고 양광도에 속하고 있었다.

당시 수원부가 직할하던 7개 속현(屬縣)은 안산현(安山縣)·영신현(永新縣)·쌍부현(雙阜縣)·용성현(龍城縣)·정송현(貞松縣)·진위현(振威縣)·양성현(陽城縣) 등 이다.

'내가 사는 곳'과의 소통 - 수원일보

수원을 얼마나 아시나요 ⑦
역사 = 조선시대 <상>
2009년 09월 08일 (화) 편집부 han@suwon.com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즉위 2년 후에 지방의 중심이 되는 대읍(大邑)을 ‘계수관(界首官)’으로 정하였다. 이 때 지방 행정 구역을 개편하지 않아 고려 시대부터 계속된 양광도의 계수관으로 광주(廣州)·충주(忠州) 청주(淸州)·공주(公州)·수원(水原)을 정했다. 전국에 25개의 계수관을 정하였으며, 계수관으로 선정된 수원은 조선 초 전국에서 지명도가 높은 지방 도시였다.

1395년(태조 4년)에 양광도에 속한 수원이 경기도에 속하게 됐다. 1394년(태조 3년)에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고, 한양의 위치에 맞게 경기도가 다시 조정됐다. 그러므로 한양 천도 다음해인 1395년에 양광도에 속한 수원부를 ‘경기좌도(京畿左道)’에 내속시켰다.

1398년(태조 7년)에 수원부의 남쪽 60리에 있는 신영장(新永莊 : 옛 이름 양성현)을 수원부에 내속시켰으며, 1402년(태종 2)에 경기좌도·경기우도를 ‘경기좌 우도(京畿左右道)’로 개칭했다. 이 때 경기좌도에 속한 수원부는 ‘경기좌우도’에 속하게 됐다.

1413년(태종 13)에 경기좌우도를‘경기도(京畿道)’로 개칭했고, 수원부를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명칭을 바꿨다. 도호부는 사실상 고려 시대의 부(府)를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하며, 일반적으로 목(牧)보다는 격이 낮고 군(郡)보다는 한 단계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행정 단위였다.

도호부가 대도호부와 마찬가지로 군사적 의의가 강조되던 고려 시대와는 달리 일반 행정 구획상의 한 명칭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경기도 관찰사를 수원도호부에 두고 관내 행정을 총괄했으며, 수원은 경기도의 중심 도시였다.

1424년(세종 6년)에 경기 감사의 요청으로 수원도호부에 속한 송장(松莊) 87호(戶), 부산(釜山)과 청호역(菁好驛)을 아울러서 59호, 용인현(龍仁縣)·의신현(義信縣)의 6호를 떼어서 진위현에 이속시켰다. 또한 1433년(세종 15)에 수원부의 속현(屬縣) 영신(永新)을 진위(振威)에 이속했다. 그러나 몇 년 후인 1438년(세종 20년)에 진위현으로 이속시켰던 청호역을 다시 수원도호부에 속하게 했다.

1457년(세조 3년)에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중익·좌익·우익을 혁파하고 거진(巨鎭)을 설치했다. 경기도에는 수원진·광주진·양주진·강화진·개성진 등 5개 진이 설치됐다. 수원진(水原鎭)에는 부평(富平)·인천(仁川)·금천(衿川)·안산(安山)·남양(南陽)·진위(振威)·안성(安城)·양성(陽城)을 속하게 했다. 그리고 판관(判官)·교수(敎授)가 1명씩 증원되어 수령인 부사를 보좌하게 했다.

수원은 1526년(중종 21년)에 수원 사람 노범근이 부모를 죽인 사건으로 당시의 관례에 의하여 수원도호부에서 수원군(水原郡)으로 강등되고, 동시에 진(鎭)도 혁파되어 인천으로 이속됐다.
그러나 1535년(중종 30년)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고, 수원진도 복구됐다. 1457년(세조 3년)에 진이 설치되었을 때보다 2개 도호부와 3개의 현이 추가되었다.

수원진(水原鎭)은 1602년(선조 35년)에‘방어사(防禦使)’를 겸하게 했으며, 1668년(현종 9년)에‘별중영장(別中營將)’과‘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했다. 그리고 1687년(숙종 13년)에 ‘총계좌영장(摠戒左營將)을 겸하도록 고치었다.

당시 수원도호부의 경역(境域)을 알 수 있게 하는 사방 경계까지의 리수(里數)를 보면 세종실록 지리지가 동쪽으로 용인까지 17리, 서쪽으로 쌍부(雙阜) 팔라곶(八羅串) 55리, 남쪽으로 충청도 평택현 유지두까지 65리, 북쪽으로 과천까지 21리이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동쪽으로 용인현 경계까지 21리, 남쪽으로 충청도 평택현 경계까지 50리, 같은 현 경계까지 59리, 진위현 경계까지 22리, 서쪽으로 남양부 경계까지 20리, 같은 부 경계까지 1백 13리, 북쪽으로 과천현 경계까지 39리, 서울까지는 88리가 된다.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를 보면, 1789년(정조 13) 읍치를 이전하기 전까지 수원부의 크기는 둘레가 550리, 남북의 길이가 120리, 동서의 길이가 110리의 큰 도시였으며, 경계는 동쪽으로 용인현 경계까지 21리, 남쪽으로 진위까지 20리, 서쪽으로 남양까지 10리, 북으로 광주까지 30리가 됐다.

'내가 사는 곳'과의 소통 - 수원일보

수원을 얼마나 아시나요 ⑧
역사 = 조선시대 <하>
2009년 09월 08일 (화) 편집부 han@suwon.com

수원은 조선이 건국된 후 400여 년 동안 큰 변화를 겪지 않았으나 정조가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 이전의 지방 행정 체제의 관례를 깨는 매우 특수한 위치를 부여받게 됐다. 정조의 부친인 장헌 세자(莊獻世子) 즉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무덤이 이 곳 수원으로 천봉됨을 계기로 새로운 읍치가 조성되고 종래의 도호부가 유수부로 승격되는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1789년(정조 13년) 7월 영조의 사위였던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사도 세자가 묻혀있는 영우원(永祐園)의 천봉 문제에 대해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천봉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고 7월 11일에 영우원 천봉을 주관할 천원도감(遷園都監)과 원소도감(園所都監)을 설치했다.

영의정 김익(金金)·좌의정 이성원(李性源)·우의정 채제공(蔡濟恭) 등이 수원의 장지(葬地)가 될 곳을 살피고 돌아온 후 묘소를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안장하는 것이 좋겠다는 장계를 올리자 정조가 이를 허락했다. 이 해 7월 13일 미륵당(彌勒堂)에 원(院)을 설치하여 천봉을 원활하게 했다.

능원이 옮겨지려면 그에 앞서 능원이 들어설 화산(花山)의 백성들, 즉 수원 읍치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천봉의 결의가 이루어진 자리에서 정조 자신도“지금 가장 급한 일은 본토의 백성을 안심케 하는 것이요. 그 다음에나 이읍의 계획을 의논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인심이 안정된 후에라야 땅의 제세도 길하게 된다”라고 하며 능원의 이전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하는 읍민들의 처리 문제에 몹시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정조는 새 능원의 조영과 읍치의 이전 그리고 읍치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한 대책 등을 신속하고 적절하게 처리하기 위해 경기관찰사에 서유방(徐有防), 수원부사에 조심태(趙心泰)를 임명했다.

수원부의 읍치는 7월 15일 팔달산의 아래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7월 17일에 팔달산 아래의 신읍치로 이주할 민호(民戶) 244호의 가주(家主)·역(役)·집 칸수 등을 조사하여 조정에 올리도록 하교했다. 마침내 읍치를 옮기고 수원 부내를 남리(南里)와 북리(北里)로 나누었다.

이 때 백성들의 신읍치 이주 비용으로 10만 냥(兩)을 구읍의 객사에서 하사하고, 한편 수원부에 갇혀있던 가벼운 죄를 진 모든 죄수에게 특사령을 내려 석방했다. 또 광주부에 속해있던 일용면(一用面)과 송동면(松洞面)을 수원부에 이속시켰다.

1793년(정조 17년) 1월 12일에 정조는 수원의 신읍치를 ‘화성(華城)’이라고 새로 바꾸고 동시에 이곳을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수원의 유수부 승격은 개성·강화·광주와 함께 이른바 4유수부의 하나가 된 것이다. 수원이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수원 부사를 ′화성유수(華城留守)′ 겸 ′장용외사(壯勇外使)′·′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로 삼았다. 그리고 판관 1명을 두어 유수를 보좌하게 했다.

수원을 포함하는 유수부의 유수는 매우 특이한 존재로서 이들은 지방의 수령이면서도 직제상 경관(京官)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또한 국가 최고 회의 기관인 비변사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새로 승격된 화성유수부의 초대 유수로는 10년간 좌·우 영상을 두루 역임했고 또 수원 신읍 조성에 따른 모든 절차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번암 채제공이 임명됐다.

정조가 당대 제일의 명상으로 손꼽히던 채제공과 같은 인물을 유수로 임명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화성유수부(수원)를 얼마나 중히 여겼는가를 알 수 있다.
화성유수부로 승격된 다음날인 정조 17년 1월 13일에 안산군(安山郡)을 화성유수부에 이속시켰다. 또한 효과적인 진관 운영을 위해 수원진에 속해있던 부평·인천·남양·통진·안산·김포·양천·진위·용인·안성·양성·금천의 진(鎭)을 남양에 이속시켰다.

1794년(정조 18년) 1월에 정조의 특명으로 화성 성역을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년) 9월 10일 화성 성역이 완공됐다. 성 안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남북 대로와 관아 정문에서 동문으로 나아가는 동서 도로가 중심 대로가 되고 두 도로가 교차하는 중앙에‘십자가’라 부르는 교차로를 만들었다. 이 때 성곽 안팎 주민들의 거주 구역은 2개 부(部)로 나뉘어지고, 다시 그 안에 4개의 거주지로 편성됐다.

네개의 행정 단위는 자내(字內)를 써서 ‘남성자내(南城子內)’, ‘서성자내(西城字內)’, ‘북성자내(北城字內)’, 동성자내(東城字內)’라 했다. ‘남성자내’는 신풍교 남쪽변에서 팔달문 안 서쪽변, 그리고 팔달문 밖의 동서로에서 향교까지이며,‘서성자내’는 신풍교에서 북으로 장안문 안 서쪽변에서 화서문 밖까지이다.

‘북성자내’는 십자가 동북모퉁이에서 장안문 안쪽 동쪽변, 그리고 보습곶이[甫十串]의 북에서 장안문까지이며,‘동성자내’는 십자가 동남변에서 팔달문 안의 동쪽변, 그리고 수원천 동쪽의 아래 위이다.
같은 해에 경기 감영 소속인 광주의 양재역(良才驛)을 화성유수부로 이전하여 설치하고, 영화도(迎華道)에 속하게 하였다. 화성 성역이 완공된 후인 1797년(정조 21년) 9월에 시흥현과 과천현을 수원에 이속시켰다.

또한 다음해인 1798년(정조 22년)에 시흥·안산·과천·용인·진위의 5읍의 군총(軍摠)을 장용외영(壯勇外營)에 이속시켰다. 그래서 진위는 팔달위(八達衛), 용인은 창용위(蒼龍衛), 안산은 화서위(華西衛), 과천은 장안위(長安衛), 시흥은 협수위(協守衛)에 속하게 하여 수원을 방비하게 했다.

'내가 사는 곳'과의 소통 - 수원일보

수원을 얼마나 아시나요 ⑨ 역사 = 한말
1906년 수원군 40개 면에 560개 동리로 개편
2009년 09월 10일 (목) 김기원 기자 kkw517@suwon.com

고종은 1895년 윤 5월 1일(5월 26일 공포 칙령 제 98호)에 지방 제도를 개편하여 전국을 23개의 부로 나누어 337개 군을 그 밑에 두었다. 23개 부는 한성부·인천부·충주부·홍주부·공주부·전주부·남원부·나주부·제주부·진주부·동래부·대구부·안동부·강릉부·춘천부·개성부·해주부·평양부·의주부·강계부·함흥부·갑산부·경성부 등이었다. 부에는 관찰사, 군에는 군수가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이 때 경기도라는 명칭은 없어졌으며 수원군은 인천군·김포군·부평군·양천군·시흥군·안산군·과천군·남양군·강화군·교동군·통진군 등과 함께 인천부에 소속되었다. 수원은 종래 지방 행정 제도상 특별한 지위에 있었던, 개성·강화·광주와 더불어 유수부(留守府)의 칭호를 잃고(칙령 제97호) 일개 군(郡)으로 격하된 것이다.

같은 해 9월 5일(1895년 9월 5일 공포 칙령164호)에는, 337개 군의 군수의 봉급을 5등급으로 차등을 두어, 군 자체의 격이 5등급으로 나뉘어 지게 되었다. 이 때 수원은 2등 군이 됐다.

당시에 1등 군이었던 곳은 강화·충주·공주·전주·영광·남원·순천·나주·영암·광주·진주·경주·상주·안악·평양 등 17개 군이었다. 2등 군은 수원을 포함하여 32개 군이 여기에 속했다.

고종은 1896년(건양 원년)에 23부제를 폐하고 1부 13도제를 채택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1부는 한성부를 말하는 것으로 판윤(判尹)을 두었고, 13도는 경기·충청북도·충청남도·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북도·경상남도·황해도·평안남도·평안북도·강원도·함경남도·함경북도였다. 각 도는 관찰사를 두고 각 도마다 수부(首府)를 지정했고, 이 때 수원은 경기도의 관찰부(觀察府)가 됐다.

한편 경기 지역 중 광주·개성·강화·인천에는 부윤(府尹)을 두었으며, 13도의 소관 각 군을 5등으로 정하여 군수(郡守)를 두었다. 경기도 각 군의 등급은 1등부터 4등까지 나누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수원군은 역시 2등급이었다.

이 때의 행정 구역은 앞서 살펴본 신읍치로 수원을 옮긴 때인 화성 축성 이후의 행정 구역과 동일하고 각 면에 속한 동리 역시 같다.

1906년(광무 10) 9월 24일(칙령 제 49호)에 지방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는데 이 때 수원군의 팔탄면·초장면·압정면·오정면이 남양군에 편입되었고, 오타면이 진위군에, 광덕면의 신흥포·신성포와 가사면의 삼도오동이 아산군에 편입됐고, 율북면·승양면·감미면 등이 양성군에서 수원군으로 편입됐다. 이 때 수원군은 40개면과 560동리(洞里)로 개편됐다.

'내가 사는 곳'과의 소통 - 수원일보

수원을 얼마나 아시나요⑩ 역사 - 일제 강점기
現 시민회관 자리에 신사 세우고 동명 지어
2009년 09월 14일 (월) 편집부 han@suwon.com


일제가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를 병탄한 직후인 10월 1일 조선 총독부는 종래의 13도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조선 총독부령 제6호를 공포했다. 이 때 종래의 한성부를 경성부로 명칭을 바꾸어 경기도 관할 하에 두었으며 경기 도청의 위치를 수원에서 경성으로 옮겼다.

이후 일제는 1914년 3월 1일(1913년 12월 29일 공포 조선 총독부령 제111호) 도의 위치, 관할 구역 그리고 부·군의 명칭, 위치, 관할 구역에 관한 개편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당시 경기도에 소속된 부와 군은 경성부(京城府)·인천부(仁川府)·고양군(高陽郡)·부천군(富川郡)·시흥군(始興郡)·수원군(水原郡)·진위군(振威郡)·안성군(安城郡)·용인군(龍仁郡)·이천군(利川郡)·김포군(金浦郡)·강화군(江華郡) 파주군(坡州郡)·개성군(開城郡)·포천군(抱川郡)·연천군(涎川郡)·광주군(廣州郡)·양평군(楊平郡)·양주군(楊州郡)·가평군(加平郡)·여주군(驪州郡)·장단군(長湍郡) 등 2부 20개 군이었다.

수원의 관할 구역도 개편이 이루어져 수원군의 종덕면·율북면·수북면·토진면·서신리면·청룡면·숙성면·오정면·언북면·포내면·현암면·안외면·승량면·가사면·광덕면 등이 진위군으로 들어가고, 영흥면(靈興面)과 대부면(大阜面)을 제외한 남양군, 광주군의 의곡면(儀谷面)·왕륜면(旺倫面), 안산군의 월곡면(月谷面)·북방면(北方面)·성곶면(聲串面) 등이 수원군으로 포함됐다. 이 때 바뀐 수원의 행정 구역에 포함된 군과 면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남부면·북부면·일용면·형석면·송동면·매곡면·삼봉면·용복면·안녕면·산성면·문시면·남곡면·갈담면·공향면·장주면·태촌면·동북면·어탄면·청호면·초평면·정림면·남면·상홀면·양간면·감미면·남양군(영흥면, 대부면 제외) 일원·광주군 의곡면·왕륜면·안산군 월곡면·북방면·성곶면

곧이어 한 달 후인 1914년 4월 1일(1914년 3월 13일 공포 조선 총독부 경기도령 제3호)에는 경기도 소재 면의 명칭과 구역의 통폐합을 통한 대대적인 개편이 이뤄졌다. 당시 일제는 지명을 일원화하기 위하여 각 동리(洞里)의 명칭을 리(里)로 개칭했다. 이에 따라 수원군은 20면(面)으로 통폐합 되었으며, 군의 전체 마을은 270리(里)가 됐다.

이 때 수원군 청호면의 갈곶리·삼동 일부는 진위군 북면(北面) 그리고 수원군 율북면의 황구지는 진위군 서탄면(西炭面)으로 편입되었고, 수원군 토진면·서신리면·수북면 일부·청룡면·감미면 일부·율북면 일부는 진위군 청북면(靑北面)으로 개편됐다. 수원군 포내면·안외면 일부·현암면 일부는 진위군 포승면(浦升面)으로 개편됐고, 수원군 안외면 일부·광덕면 일부·가사면 일부·현암면 일부·포내면 일부·안외면 일부·광덕면 일부·승량면·가사면 일부는 진위군 현덕면(玄德面), 수원군 숙성면·언북면·오정면·안외면 일부·현암면 일부는 진위군 오성면(梧城面), 수원군 종덕면 일부·율북면 일부·수북면 일부는 진위군 고덕면(古德面)으로 개편됐다.

1931년 4월 1일(1930년 12월 29일 공포 조선 총독부령 103호) 전국 41개 지정 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는데 수원군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됐다. 이 때 수원군은 1읍(邑) 19면(面)으로 편성되었다. 수원읍·매송면·정남면·안용면·장안면·양감면·태장면·향남면·반월면·일왕면·동탄면·송산면·서신면·팔탄면·봉담면·마도면·비봉면·성호면·우정면·음덕면이었다.

당시 수원읍의 각 리의 명칭이 정(町)·정목(丁目)과 같이 일본식으로 개편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정(本町 : 1·2·3·4정목)·매산정(梅山町 : 1·2·3정목)·남수정(南水町)·구천정(龜川町)·영정(榮町)·매향정(梅香町)·북수정(北水町)·신풍정(新豊町)·궁정(宮町)·장안정(長安町)·남창정(南昌町)·남부정(南部町)

이중에서 본정은 지금의 팔달로 지역, 영정은 영동 시장 지역, 궁정은 교동 지역, 남부정은 매교동 지역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궁정은 수원 향교 바로 위 지금의 수원 시민 회관 자리에 신사(神社)를 세우고 의도적으로 지은 동 명칭이다.

한편 1936년 10월 1일(1936년 9월 26일 공포 조선 총독부령 94호)에는 수원읍이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는데, 수원군의 일형면 고등리·영화리·지소리·동리·서둔리, 수원군 태장면 지리·인계리·권선리 일부, 수원군 안용면 세리·평리의 일부 등이 수원읍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수원읍에는 고등정(高等町)·영화정(迎華町)·지소정(紙所町)·화서정(華西町), 서둔정(西屯町)·지야정(池野町)·우만정(牛滿町)·인계정(仁溪町)·세류정(細柳町)·대평정(大坪町) 등이 새로 생겨났다. 여기에서 지소정은 지금의 연무동 지역, 지야정은 지동 지역, 대평정은 평동 지역이다.

이와 같은 수원의 행정 구역은 일제의 강점기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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