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논객이라면, 저마다 나름대로 원칙과 기준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나만의 원칙이랄까, 기준이랄까. 그런 가이드라인은 가지고 있다. 비논리적인 어거지나 욕설은 하지 않는다는 것과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해서는 그것이 공익적 성격이 아니라면 거론하지 않는다는, 이 두가지를 가능하면 지키기위해 노력은 하는 편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프라이버시 문제가 사회,공익적 성질을 지니고 있고 당사자가 공인 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1960~1970년대를 살아온 사람은 기억이 나실 것이다. 지금의 국민배우에 해당되는 최무룡과 김지미 라는 걸출한 영화배우가 있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잘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이혼을 하게 된다. 이 두배우가 이혼한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이혼의 변은 그야말로 한편의 싯귀와도 같았다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우리는 헤어지기로 했다. ” 바로 이말이었다.
천하의 섹스피어라도 이런 구절은 미쳐 생각 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가 사랑한다면 어떤 고난이 닥쳐도 백년해로를 같이 하자고 맹세를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가치일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 정반합의 모순인지, 형이상학적인 뜻인지 , 알송달송한 해석은 뒤로 한 채,, 어쨌든 두 배우는 헤어졌다.
그리고 세월이 유수같이 흐른 2008년10월 나는, 14살 연상의 여인과 재혼을 하는 또 한사람을 보게 된다. 바로 신동욱 이라는 40대 초반의 남자 였다. 이 때도 그랬다. “서로 좋아 ,서로 만나 사랑하는데 나이 차이가 무슨 문제 인가. 남은 여생 정말 행복하게 살겠다. ”고 하면서 떠들고 다녔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이 끝난후 모 방송국의 기자가 소감을 묻자 신랑인 신동욱은 “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다 ” 라고 하면서 한숨을 내 뿜었다. 그 좋은 결혼식에 “행복합니다.”가 아니고 무사히 끝나다는 말이 나오다니, 그 말 한마디로, 그 결혼식의 성격이 짐작 되기도 했다.
당시 언니는 결혼식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하나 뿐인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결혼식이 결코 정당하지 않음을 시사해 주는 늬앙스 였다. 그 이후로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지는지는 모르지만, 육영재단을 둘러 쌓고 여러 가지 확인도 안되고 ,검증도 안되는 각종 루머성 기사들이 인터넷 세상을 떠 돌아 다녔다. 나도 그 자료를 보았지만, 내 자신도 확인할 방법이 없는 까닭에 나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간주 하고 무시해 버리기 일쑤였고 그 어떤 논쟁 대열에도 끼어 들지를 않았다.
오늘 나는, 신문에 난 뉴스를 보았다. 처형의 미니홈피에 들어가 가짜 이름으로 온갖 허위사실과 비방으로 처형을 비난했고, 그것도 모자라 의기투합한 추종자들까지 동원하였다니 이 사람이 과연 정상적인 한 가문의 사위가 맞는지, 어찌 양심을 가진 인간이 이렇게 타락할 수가 있는지 차라리 연민의 정이 들기도 했다.
“사랑 ”이라는 말속에 숨겨진 인간의 추잡한 욕심과 위선의 껍데기를 벗겨 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결국 그 결혼식은 염불 보다는 잿밥에 마음이 가 있었던 위장된 결혼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박근혜 전대표의 사람보는 눈은 정말 탁월한 모양이다. 그러기에 결혼식을 그토록 반대했고 오죽했으면 결혼식에 불참 까지 했을까. 시간이 지나 지금 보니 정말,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