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 광복절 노래처럼 해방은 전격적으로 그리고 기습적으로 이루어졌다. 한일합방이 되던해 태어났던 사람은 청년의 시기를 지나 장년에 접어든 기나긴 36년 세월이었다. 그 압제의 세월은, 망국의 국민들 대부분에게 친일의 멍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다. 만주로 간도로 그리고 이땅에서 독립운동으로 36 년을 바친 소수의 의인들만이 그 굴레에서 의 자유를 당당히 얘기할수 있었다. 36년간 지독한 가난과 수탈의 경험은 해방정국에서 좌익세력을 키우는 배경이 되었다. 전쟁의 막바지에 가자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칼한자루라도 더 만들기위해 집안의 이런 수탈과 절대빈곤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는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엘도라도였다. 지주나 마름들은 재빨리 우익이 되어 활개치던 시기에, 좌익은 70%가 넘는 소작농과 빈곤층을 상대로 세력을 급속히 확산해 갔다. 남로당과 전농, 전평의 조직적 지도하에 곳곳에서 좌익폭동 이 발생하고, 한마을이 좌우익으로 갈리기도 하고, 우익마을과 좌익마을이 생겨나기도 했다. 좌익세력의 활동은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고 그지도부들이 대거 월북하면서 비로소 수그러들었다. 이승만정부는 ‘보도연맹’을 만들어 당시 좌익경력자들을 가입시켜 면죄부를 주었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좌우익의 대결은 다시 재연된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한청년단이나 경찰에게 끌려가 학살을 당하였다. 좌익경력자들이 북한 공산군을 지원할 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군과 경찰이 화근을 제거한다는 조치였지만 이 보도연맹사건은 수십년 두고두고 한국현대사의 아픈 편린으로 남아야했다. 인민군이 내려오자 상황은 또 반전되었다. 이번에는 학살당한 사람들의 가족과 좌익들, 소작농들이 븕은 완장을 차고 거리를 활보하며 우익단체와 지주, 친일인사들에게 다시 무자비한 보복을 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밀고 올라오자 상황은 또 역전된다. 보복당한 우익들이 좌익들보다 더 가혹하게 재 보복을 하였다. 난리통에 사람목숨은 파리목숨보다 못했고, 개인적 원한도 좌익으로 몰아 죽이기도 하였다. 전쟁과 좌우익의 싸움으로 삼천리강산은 시체가 계곡을 메우고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게 해방과 전쟁당시 남한의 사회상이었다. 일본왕이 항복선언을 하던날 박정희는 중국의 만리장성 깊은 산중에 있었다. 당시 박정희는 일본의 만주군 중위였고 소련의 공격에 대비해 싱룽으로 이동하는 산중에서 세상이 바뀐 소식을 접하게 된다. 만주군은 무장해제 되고 박정희 역시 직위해제 되어 당시 만주등지에 징집되어 있던 장병들이 임시정부가 있던 북경으로 모이게된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들은 편입하여 광복군을 편성하게 되고 박정희는 주평진대대의 2중대장에 임명된다. 이 주평진 대대시절 박정희는 처음으로 공산주의라는 이념과 맞딱뜨리게 된다. 부대내에서는 이미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포섭된 부대원들에 의해 이념토론이 공공연히 열렸고, 박정희 중대장을 성토하는 분위기를 선동하는 자들도 생겨났다. 훗날 박정희는 이들의 행태에 크게 실망하고, 좌익들의 분열선동에 부화뇌동하는 민족성에 절망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남로당사건은 박정희의 좌익경력을 주장하는 폐인들이 단골로 써먹는 메뉴들이다. 남로당사건에 대해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김종신씨에게 말한 기록이 있다.
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당시 남로당 당원으로 추정되는 이재복의 명단에 박정희란 이름이 있었고, 이 명단은 남로당원 명단이 아닌, 포섭하기 위한 명단이었지만 이로 인해 박정희는 고문과 재판을 받은것이다. 해방정국 당시 시대상황은 사회주의가 득세하던 시대였고, 또한 빈농이 대부분인 사람들이 좌익의 교묘한 선전술에 기만당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순수 사회주의를 꿈꾸던 이상주의에 가까웠고,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의 공산주의 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이미 광복군 시절에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분열 책동을 경험으로 간파하고 있었고, 6.25전쟁을 통해 확실히 반공의 가치관을 정립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해방후 6.25전쟁 동안 수많은 목숨들이 좌우익의 대립으로 사라져갔고, 화해가 어려울만큼 골이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내세운 5.16혁명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고 나는 지금도 5.16은 역사의 필연이라고 믿는다. 말 나온김에 박정희대통령을 폄훼하는 부류들 얘기좀 해보자. 일제시대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 만주군의 소위였다는 사실하나로 박정희대통령을 친일파로 매도했던 전정권이나 또 추종 폐인들이나, 그의 지인과 가족력에서 좌익과의 연결고리 를 찾아내서 폄훼하려는 무리들이나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러운 좀비들이다. 이들의 박정희 비판도 대단히 비겁하고 교묘하고 다양하다. 누구처럼 아주 드러내놓고 적개심을 표출하는 폐인들이다. 인터넷 여기저기 굴파듯이 뒤져서 사실관계가 확인되지도 않은 루머성글들을 짜깁기해서 덧칠 을 한후 버젓이 글이라고 올리는 불쌍한 폐인들이다. 예전 촛불파동때 김밥값과 초값을 모금한다고 하더니 결국 통장공개하고 고소고발 한다고 난리치던 그 아고라를 떠올리게 하는 폐인들이다. 교묘하고 비겁한 비판도 있는데, 박정희 시대 18년의 공은 ‘경제성장’이란 통속적 단어하나 로 뭉퉁거려놓고 인권탄압, 유신독재, 쿠테타라는 자극적 단어를 주욱 나열해놓는 농객들이다. 순수한 <성장의 그늘>을 얘기하는것이 아니라, 마치 <막장의 그늘>이란 느낌이 들게끔 논리를 전개해간다. 그리고 은연중에 지금의 부조리한 경제상황이 개발독재의 유산이라는 늬앙스를 풍긴다. 스컹크보다 더 심한 악취가 느껴지는 글이다. 어느 시대나 그늘과 양지가 존재하는 법이다. 해방후 격동의 한국현대사가 그렇게 살아왔고, 이념, 친일, 민주, 독재 이런 정치적 잣대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수 없다. 문제는 그시대 그시절의 사회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가를 해야 한다. 아무리 박정희시대를 폄훼해도 그 공(公)과, 과(課)는 평형저울에 올려놓을수 없을 만큼 차이가 확연하다. 스스로를박정희대통령과 비슷한 반열에 올려보려는 '자아 증폭 폐인'들과, 툭하면 박정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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