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파란blog이전(+)됨:약7십만접속/-기존_자료2 종합(박근혜 前 대통령관련)

박정희 전대통령의 마지막하루

박정희 전대통령의 마지막하루 역사와인물

2010/07/02 15:31

작성자: 학산도인의말삼(dudtksgkrdls)

복사 http://blog.naver.com/dudtksgkrdls/memo/30089084261

♣ 박정희 전대통령의 마지막 하루 ♣
(10.26. 그날의 진실중)
나는10.26事件의 直接的인 契期가 됐던 釜馬事態의現場에 있었던 以後
朴正熙大統領 弑害事件과 이 事件의 後爆風인 12.12事件을 長期間 取材해 왔다.
이런取材는 朴大統領傳記執筆로 이어졌다.
이 冊은 내가 1997年부터 1999年 末까지[朝鮮日報]에連載했던
<近代化革命家 朴正熙의 生涯: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가운데10.26事件을 다룬 部分만 뽑아낸 것이다.
요사이 새삼스럽게 10.26事件이 社會的 論爭거리가 되고이 事件을
잘 모르는 젊은層이 많아져 이冊을 내게 됐다.
내가 10.26事件을 取材하면서 個人的 好奇心을 풀려고 한 臺木이 있다.
朴大統領은 果然 가슴 貫通傷을 當하고도"난 괜찮아" 라고 말했을까.
나는 10.26事件의 現場에 있었던 主要人物들을거의 다 만났다.勿論
거기에는 그 最後의 晩餐場에 있었던 세 生存者도 包含된다.
金桂元(當時大統領秘書室長), 沈守峰(歌手), 그리고 申才順(女大生).
이들 중 申才順氏의 證言이 가장 正確했다.
申氏는 는 大擔한 性格인 데다가 記憶力과 表現力이 大端했다.
하느님이 그女를 朴正熙의 最後 目擊者로 選擇했다는느낌이 들 程度였다.

한가한 시간에 피아노 치는 박 대통령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5분,김재규金載圭의 권총 발사로 가슴을 관통당해 등에서 피를 괄괄 쏟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을 혼자서 안고 있었던 이가 신씨였다.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은 팔에 총상을 입고 실내 화장실로,김계원 씨는 바깥 마루로,심수봉 씨는 김재규가 다가
오는 것을 보고 달아난 이후 신씨만이 대통령을 피범벅 속에서 안고 있었다.김재규는 합동수사본부 수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차지철을 거꾸러뜨리고 앞을 보니 대통령은 여자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어 식탁을 왼쪽으로 돌아 대통령에게 다가가자 여자가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권총을 각하의 머리에서 50cm 거리에 대고 쏘았습니다."이 순간을 40대의 중년의 중년여성으로 변한 신재순 씨는 이렇게 기억했다(1997년의 증언)"그 사람의 눈과 마주쳤을 때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인간의 눈이 아니라 미친 짐승의 눈이었어요.
그가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대었을 때는 다음에는 나를 쏘겠구나 생각하고 후다닥 일어나 실내 화장실로 뛰었습니다. 저의 등 뒤로 총성이 들렸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도 문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바깥이 좀 조용해지자 신씨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대통령은 실려 나갔고 문 앞에 차 실장이 하늘을 보고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신씨가 일으키려고 손을 당겼다.
"차 실장은 몇 번 힘을 써 보다가 포기하는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난 못 일어날 것 같애." 그러고는 다시 쓰러져 신음하는데 그 눈빛도 잊을수가 없어요.
그날 밤 차 실장은 김재규 부장을 자극하고 약을 올리듯 막말을 했습니다. 그래도 차실장이 고마운것은 그날 제가 대기실에서 면접을 볼 때술을 못 마신다고 했더니 그분은 "옆에 깡통을 갖다 놓을테니 거기에 부어 버려라" 고 말하더군요. 나는 박정희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 신씨에게 여러 모로 물어보았다. 신재순씨의 설명은 일관성이 있었다. "그날 밤 대통령 께서는 좀 취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말이 헛 나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인자한 아버지 같았어요.
피를 쏟으면서도 "난 괜찮아" 라는 말을 또박 또박 했으니까요. 그말은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어서 피하게" 라는 뜻이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 이시니까 역시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더 생각해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했었죠.
그분의 마지막은 체념한 모습이었는데 허무적이라기
보다는 해탈한 모습 같았다고 할까요.
총을 맞기 전에는 "뭣들 하는 거야" 하고 화를
내셨지만 총을 맞고서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어요.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까요."



근혜, 근영 두딸과
아들 지만 생도를 찾아간 박 대통령




해탈한 모습으로 운명을 받아들인 박정희!

총성과 고함과 비명이 오고 가는 아수라장 속에서
피하지도 숙이지도 애원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난 괜찮아"란 말을 남기고 떠난 사람.
그래서 나는 그가 참 멋진 모습으로 죽은 사람이란
생각을 하곤 한다.

그가 보통 사람처럼 행동 했더라면?


차지철 실장처럼 실내 화장실로 달아나 숨어 있는것을
김재규가 문을 차고 들어가 그를 사살하는 모습이었다면
우리는 지금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것인가.
박정희의 비범한 죽음과 그 증언자 신재순 씨로 인해서

우리는 영웅을 잃지 않게 되었다.
해탈한 초인超人의 모습으로 죽은 박정희의 국장(國葬),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권한대행이 영전(靈前)에
건국훈장을 바칠 때 국립교향악단은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곡)를 연주했다.

독일 철학가 니체가 쓴 동명(同名)의 책 서문을
음악화한 이 곡의 선정은 얼마나 상징적 이었던가.
니체는 이 서문에서


"인간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라고 썼다.
그는 "그러한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덧붙였다.


어느 행사장에서 담배를 피며 활짝웃는
박 대통령 내외분


한 시대의 청탁(淸濁)을 다 들이마시고도 끝까지
자신의 혼을 더럽히지 않고 죽어 간 박정희를
나는 서슴치 않고 초인(超人) 이라고 부른다.

무자비한 권력욕의 화신이 아니라 부끄럼 타는 초인!
하나 우스운 것은,


김재규의 지령을 받아 두 대통령 경호원을 사살 하는 등
이날 궁정동 작전을 지휘했던
박선호(朴善浩)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일대 학살극을 끝낸 뒤
두 여인(심수봉,신재순)에게 각각 20만원이 든
돈봉투까지 주고 차에 태워 집으로 보내 주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사살 당하는 것을 목격한 두 사람을,
이 사건의 주역이 아무 감시역도 붙이지 않고 현장에서
이탈하게 했다는 이 점이 10 . 26사건의 성격을 이야기 해준다.
과감하지만 치밀하지 못한 김재규의 지리멸렬상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권력을 잡지 못하고 전두환(全斗煥) 의
등장에 길을 열어 주엇던 것이다.

10월 26일 밤의 행동에 의하여 상처받고 의심받은
요인들과 이 약점을 이용한 세력이 있었다.
이날 밤은 그뒤 10여 년의 한국 역사를 상당 부분 결정했다.



여름 휴가때 망중한을 즐기던
박 대통령의 어느날 오후에


계엄사령관으로 등장한 정승화(鄭昇和) 장군은
김재규의 계략에 의해 대통령 시해 현장에
초대 받아 와있었다는 점으로 해서 의심을 샀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지도자의 용기와
결단을 보여주지 못했다.

핵심 인물의 권위가 약화된 틈을 타서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 의 대표격인 전두환 장군이
권력 공백을 채우게 되는 것이다.

10월 26일의 하루는 박정희의 18년을 마감하고
13년의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탄생시킨 24시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날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길었던 날,
가장 드라마틱했던날로 기억된다.
30여년의 역사를 해체하고 재구성한 하루였다.
이 책을 쓰는 데는 이동욱(李東旭)(전 조선일보 기자.
현 한국 갤럽 근무)씨의 취재협력이 컸음을 밝혀둔다.
2005년 2월 조갑제 (趙甲濟)

석유파동 직후 대통령은
수영장에 물을 넣고 하면 돈도 많이드는데

마루를 깔고 배드민턴이나 치도록하자"고 지시해


실내 수영장이 실내 배드민턴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환갑을 넘긴 대통령과 배드민턴을 치고 나면 젊은

이 부관도 땀으로 온몸울 적셔야 했다. 이날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에 참석 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이 부관은 박 대통령의 양복과 구두를 챙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2층 거실의 대통령으로부터 인터폰이 울렸다."예,

이광형 입니다"

"어제 입었던 그 양복하고 구두, 그거 가져오게."

예 알겠습니다.

"어제 입엇던 양복과 구두"란 허리단을 수선한 곤색 양복

과 금강제화에서 맞춘 검정색 구두를 말한다.한해 전 코 수술을 받은 직후부터 담배를 끊었던 대통령은 몸무게가 60Kg에서 3~4Kg쯤 불었다.

농촌을 방문해 낫들고 모내기 하던 박 대통령


1층 집무실로 출근할 때 자신이 전날 입엇던 양복바지를 든 채 내려온 적도 있었다.대통령은 부관에게 바지를

뒤집어 허리 뒷단을 보여주며 손가락으로 정확히 폭을

재 보이고는"여기 요만큼만 더 늘려주게"라고 했다.

부속실 직원들은 을지로 2가에 있던 "세기 영복점"으로

옷을 보내어 고쳐 오도록 했다.그날, 대통령의 마지막

양복을 준비했던 이광형은 "바지는 수선해서 입고 구두

뒤축을 갈아 신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이 부관은 평소보다 십여 분 늦게 양복과 구두를 들고

2층 거실로 올라갔다.

그때까지 대통령은 거울 앞에서 하얀 와이셔츠에 자주색 넥타이를 맨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하체는 반바지 모양의 팬티 차림 그대로였다. 대통령은 이 부관이 들어서자


"어, 어, 이리 가져와"하며 반겼다.

농촌 시찰이 있는 날이면 대통령은 소풍가는 소년처럼

들떠 있곤 했다. 이날도 늦게 올라온 양복을 받아 입으며

연신 어깨를 들썩이면서 알수없는 콧노래를 흥얼 흥얼했다.

권력이란 갑옷을 걸치기 직전 박정희(朴正熙) 이라는

한 인간의 내면을 엿보게 하는 것은 고독(孤獨),

무인(武人),절약(節約)의 상징물인 효자손, 카빈 그리고 변기

속의 벽돌이었다. 2층 거실과 1층 집무실 변기에 벽돌들...


그는 양복을 입음으로서 이같은 자신의 내면을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감싸 버렸다.

* 위글은 월간조선 대표이사였던 기자 조갑제씨의

"朴正熙의 마지막 하루"란 책의 머리말에서 발췌했다.

* 여름 어느날 박 전대통령이 낮에 점심시간을 이용해 이발을

하면서 상의와 와이셔츠 를 벗고 이발의자에 앉았는데,
이발사의 눈에 런닝셔츠에 구멍뚤린것이 들어왔다. 순간,

이발사는 눈이 붉어지며 목이 메였다.한나라의 최고권력자로서

너무소박하고 검소한 그모습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다. 잠시후

이발사는 화제를바꿔 오래되어 늘어지고 구멍이 헐거워진 낡은

혁대를 새것으로 바꾸시는게 어떠시냐고 넌지시 여쭤보았다.

박전 대통령은 빙그시 웃으며 임자, 앞으로 십년은 더찰수

있는데 왜 바꾸나 절약해야지 했다. 그때만해도 조그만 사무실

을 개조한 이발소라 온수공급이 안되어 내실에서 물을끓여

양동이 두개로 날라서 썼는데 육여사가 직접운반 했으며,

머리감기는것도 육여사의 몫이었다. 하루는 순옥이라는 이발소

여직원의 시집갈날을 알게됐다.

며칠이지나 그녀가 청와대근무를 그만둘날이 오자 이발소로

전화가왔다.박전 대통령이었다.
내가 순옥이에게 해줄수있는건 같이 사진을 찍어주는것 밖에

없으니, 집무실 뒷문으로 오라는것이었다.

잔디밭에 같이서서 몇장의 사진을 찍은후 흐믓한 표정으로

여직원의 어깨를 두드려주던 그 생전의 모습을 잊을수 없다고

전속이발사는 고개를 숙이며 한참을 울었다.

이승만 대통령시절 지은 진해별장(확실한지?)이

너무낡아 여름휴가 전에 박실장과 정회장이 의논해서 다시

개조해 놓았고 박 전대통령의 가족이 휴가가 시작돼 진해로

내려와 별장이 아닌곳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고, 조바심이난

박실장은 별장 개조건을 말씀드렸다 대노한 박대통령이 당장

짐을싸 서울로 돌아가자고 흥분하며 왜 너희들 멋대로 일을

처리하느냐며 야단쳤다. 그때 연락을받고 정회장이 들어와

한시간을 얘기한끝에 화가 풀렸다고한다.나라돈을 사사로운

개인을 위해서 쓰는것에는 엄격했다는 박 전대통령

이었다.

지난해 3월 22일 내방에 올렸던 목련꽃을 닮았던 그 분이 그리워

*** 중에서 발췌.

<박대통령이 경부 고속도로 공정 점검차 헬기를 타고 지방으로

향하던중 엔진고장으로 수원의 밭에 불시착을 하지요.

헬기가 노후해 부속이 낡았기 때문이지요.측근들이 새로운 헬기 도입을 수차 권하였으나 달러를 쓸수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 합니다. 그리고, 그는 찝차를 타고다니며 민정시찰을 했습니다.

십여년이 넘도록 서너대의 찝차만을...1964년엔가 독일 방문을 했을때 한국 교민인 광부와 간호사들 앞에서 울고 말지요.

가난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그들의 고생에 목이 메였기 때문에... 미처 말도 다 끝내지 못하고서...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그가 또울자 독일의 뤼브케 대통령이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며 위로하고...

파월 장병을 월남에 보내놓고 밤새 담배를 피웠던 박전 대통령 이었습니다...독일과 월남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이 나라의 경제 개발은 힘을 받아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지요...

해진 혁대.궁정동에서 총상을 입고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달리는 차안에서 김계원 비서실장이 안고 있는 중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김 실장은 그 사실도 모르고 빨리가자고 외치고만 있었다. 두 정보부 경비원 유성옥과 서영준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 권총을 일부러 보이면서 둘러선 군의관과 위생병들에게

"꼭 살려야 해요" 라고 위협조로 말했다. 정규형 대위는

이우철 일병에게 심장 마사지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 일병은

환자의 가슴 위로 올라가 두 손을 포갠뒤에 왼쪽 가슴을 몇차례 강하게 눌렀다. 동시에 정 대위는 수동식 인공호흡기 "암부"를 환자의 입과 코에 덮어씌워놓고 공기주머니를 눌러 공기를 허파로 밀어 보냈다. 정 대위는 심장을 자극하여 박동 시키는 강심제 에피네프린 20cc를 가슴에 주사했다. 심장 마사지도 다시했다. 한 20분간 응급소생법을 실시했으나 결과는 회생불능이었다.

말년에 근혜씨 근영씨 두딸과 청와대에서
정대위는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라고 했다. 곁에 버티고 있는 두 감시자에게 송계용 소령은 "돌아 가셨습니다. 라고 이야기했다. "이 사람이 누구십니까?" 송 소령의 물음에 두 감시자는 대답이 없었다.며칠 뒤 군의관 정규형 대위는 합수부(合搜部)에서 조사를 받을 때 "얼굴을 보고도 왜 각하인 줄 몰랐는가"란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했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감시자들이 응급처치 중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있어 50여 세로 보았습니다.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 입니다."

盧대통령 내외용 옷걸이 132만원 [조선일보 2006-03-29 11:31] 김희정의원 밝혀… 청와대 “정상회담 위한 외빈용”

[조선일보 권대열기자]

청와대와 국회의장실 등이 현 정부 출범 후 관저,공관을 수리하거나 가구·집기를 바꾼 내용이 밝혀졌다. 청와대 등이 한나라당 김희정(金姬廷) 의원에게 28일 제출한 자료에서 확인됐다.

자료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 내외용으로 지름 34㎝ 길이 165㎝의 132만원짜리 옷걸이를 2003년 11월에 산 것을 포함, 옷걸이 5개를 총 418만원에 샀다. 2003년 이후 청와대가 대통령 내외가 사는 관저용 집기 구입에
쓴 비용은 총 5060만원이다. 청와대는 또 2003년 1346만원을 들여 거실용 응접 의자·탁자 세트를, 2004년 7월에 추가로 527만원짜리 거실용 의자 세트를 산 것으로 돼 있다. 수영장 수리와 도배·보일러 공사 등 관저를 수리하거나 고치는 데 들어간 공사비는 2003년 이후 총 6억3148만원으로 집계됐다. 청와대측은 132만원짜리 옷걸이와 관련,“각종 정상회담 등에 사용하는 외빈용이고 개인용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쓰는 ‘행거형’”이라고 해명했다. 김원기 국회의장은 한남동 의장 공관 수리비로 2년간 1억6443만원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김 의장의 전임자들인 박준규(3907만원), 이만섭(6166만원), 박관용(5421만원) 전 의장 때 사용한 액수도 이번 자료에서 함께 드러났다. (권대열기자)

지금 노무현씨는 멀쩡한 전용헬기를 고 1200억원 이란 막대한 국민의 혈세를 쏟아부어 한대에 400억가는 헬기를 3대나 도입 합니다.

부자 나라이며 강대국 미국의 대통령 부시 전용헬기도 10년이

넘었지만 운항을 하고 있는데요.

최고급 독일제 BMW 승용차를 5대씩이나 들여오고.

대통령 임기가 고작 5년인데도... 그동안도 무능하고 쓸데없는 일에 치우쳐 민생과 경제를 팽겨치고 모든일에 대해서 강건너

불보듯 하고 있는 그는 도대체 어느나라 사람이며 어느나라

대통령인지요.

빨리 임기나 끝났으면 좋으련만 왜 그렇게 긴지...한번 잘못

선택한 사람 때문에 온 나라가 흔들거리고 정신을 차릴수가

없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서거한지 27년이나 된분에게

싸움을 걸고, 결국은 죽은사람에게 지고만 노정권과

그 수하들이 안스럽네요.!
내가 그동안 박 대통령에 관한책을

읽은것만도 대략 20권이 되는데 현재 나와있는 책들까지는 참

많지요.그 많은 내용을 어떻게 다 올리겠습니까.

지금 서너장 올려도 이렇게 길어지는데 말입니다.! 이미, 레임덕은 시작되었고 5월의 선거와 내년의 각당 대통령후보 경선.
후년에 대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제발 노무현씨는 더이상 깜짝쑈를 멈추고 퇴임 할때까지 조용히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1962년에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를 만나던

박정희 국가 최고회의 의장

대통령의 장부. 박 대통령 부속실에서는 세가지 장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족장부"는 대통령을 제외한 두 딸과 한 아들의 잡비 씀씀이를 다룬 것이었다. 1979년 10월에는 27만 9, 388원이 지출됐다.2층 내실 담당 가정부 미스 원에게 10만 원, 신당동의 대통령 사저를 관리하고 있던 박환영 비서관과 아주머니에게 월급 이외의 보조비로 2만원씩, 선물인 듯한 동양란 구입비 3만 2,000원, 지만(志晩)생도의 콘텍트렌즈 구입비 5만원, 세탁비 2만여 원 등이었다.본관에는 식당이 있었다.
본관 근무자와 대통령 가족이 식사하는 곳이었다. 저녁에 대통령이 주관하는 수석비서관 회식, 특별보좌관 회식도 여기서 했다.이 식당의 식료품 구입비는 1979년 8월에 80만 8, 765원이었다.박 대통령의 개인지출을 기록한 장부에 따르면 그는 1979년에 약 70만원을 양복, 허리띠, 구두구입비로 썼다. 10월 3일에 구두 세켤레 11만 2, 200원, 8월 5일에 흰색 반바지 두벌 3만원, 허리띠(반바지용)2만원. 5월 28일에 잠옷 네벌 2만원..... 박 대통령 개인 잡비는 대통령 이름으로 된 통장에서 빼쓰고 입금해 두기도 했다.1979년 초에 9만 9, 830원이 전년도에서 이월했다가 10월 26일 현재 9만 7, 330원이 잔고로 남아 있었다.이렇게 절약에 절약을 거듭하며 검소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 이었다....
지금 노씨의 부인 권씨는 강남의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의 옷(한벌당 기백만원)을 한번에 서너벌씩 구입해입는다한다. 남편의 봉급에서, 아니면 증권에 투자해 번돈으로.? 설마 판공비로 쓰지는 않기를 바랄뿐...지금도 석연치 않게 규명이 제대로 안되는 서너건의 게이트 사건들.. 제발 퇴임해서 법의 심판없이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나 개인적으론 바란다. 어찌 될지는 시간이 흘러야 알게되겠지만.지금도 늦지않았다. 박 대통령이 서거했어도 전, 노, 김대중, 김영삼, 전대통령과 현직인 노무현씨 보다도 압도적인 차이로 인기순위 1위를 몇년째 고수하고 있슴은, 국민들의

평가가 제대로 올바르게 내려졌다는 것을 의미 하지요.

그는 개인적인 사심없이 애민,애족,애국 하였던 청렴했던 진정한 이땅의 단 한사람의 지도자 였습니다.

1968년도에 외대에 특강을 하러온 육 여사가 방명록에 사인하는 모습육영수 여사 1968년 육성.출처 푸른바다님 네이트블로그*** modrige님 포스트에서 인용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몇 번이나 다짐했건만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다정한 목소리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이제는 잊어 버리려 다짐했건만 잊어 버리려 하면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1974년 9월4일)박대통령 일기에서...



장모 이경령 여사와 육여사 묘소를 참배한 박 대통령


박지만씨와 서향희씨 박대통령 묘소참배,
박근혜 대표와 함께
지만씨의 아들이 태어나 박 대통령의 가통을 잇게 된것을 축하 합니다.

경부고속도로 출발점 한서독 정상회담서 통역 맡았던 백영훈씨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964년 12월 8일 서독의 수도 본에 있는 에르하르트 총리 공관. 3년 전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과 ‘전후 독일 부흥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르하르트 총리 간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 중이던 군사정부는 미국의 차관 거절로 자금이 부족했다. 우여곡절 끝에 광부와 간호사 7000여 명을 긴급 모집해 서독에 파견하고 그들의 월급을 담보로 1억4000만 마르크(3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었다.

(박 대통령) “각하, 우리를 믿어주세요. 군인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우리도 독일처럼 분단국가입니다. ‘라인강의 기적’처럼 경제를 살려서 갚겠습니다.”

(에르하르트 총리) “각하, 제가 이승만 대통령 시절 한국에 두 번 갔었습니다. 산이 많던데 그러면 경제발전이 어렵습니다. 대동맥을 뚫으세요. 독일에도 산이 많았는데 1932년 본-쾰른 간 아우토반을 건설했고 1933년 집권한 히틀러가 아우토반을 전국으로 확장, 건설한 것이 경제부흥의 원동력이 됐습니다.

각하께서 내일 그 역사적인 길을 가십니다. 히틀러는 정치는 실패했지만 경제발전의 초석을 닦았습니다. 폴크스바겐 공장 만들고 철강공장 만든 것도 히틀러였습니다. 각하도 고속도로를 만든 다음에 자동차 물동량을 늘리고 제철공장 만드세요. 그리고 일본과 국교를 맺으세요. 지도자는 과거보다 미래를 봐야 합니다.”

(박 대통령)“일본이 사과를하지 않는데 어떻게 손을 잡겠습니까?”
(에르하르트 총리) “아직 사과를 안 했나요?”
(박 대통령)“그렇습니다. 우리도 아량이 있습니다.”
(에르하르트 총리)“제가 사과시키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에르하르트 서독총리(오른쪽)가 64년 12월 8일 총리공관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둘째가 통역관인 백영훈 원장.

당시 두 정상 간 대화는 박 대통령 통역관으로 수행했던 백영훈(80·사진)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이 통역했다. 지난 24일 서울 서초동 집무실에서 만난 백 원장은 “그때 박 대통령이 에르하르트 총리에게 돈 꿔달라는 얘기를 몇 번이나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며 “에르하르트 총리가 박 대통령에게 ‘니히트 바이넨(그만 우세요)’이라고 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에르하르트 총리의 말대로 그 정상회담 직후인 65년 1월 16일 일본 오히라 외무상이 서울에 와서 정식으로 사과했고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졌다.

박 대통령 일행은 그 다음날 본에서 쾰른까지 20㎞ 구간을 아우토반을 이용해 이동했다. 이 구간은 1928년 착공해 32년 완공한 세계 최초의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였다. 박 대통령이 탑승한 벤츠 승용차는 시속 160㎞로 달렸다. 큰 충격을 받을 만했다. 박 대통령은 가는 도중 두 번이나 중간에 차에서 내렸다. 장기영 부총리, 이동원 외무부 장관, 이후락 비서실장도 따라 내렸다. 아우토반을 자세히 살펴본 박 대통령은“어떻습니까. 좋죠? 히틀러가 했답니다. 우리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대답은 부정적이었다. “힘든 일입니다. 그 시절이나 가능했지….”

박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승한 서독 대통령 의전실장에게 처음

건설계획 수립부터 건설 방식, 관리 방법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통역관이 전해주는 답변을 손수 메모하기도 했다. 백 원장에게

“우리가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을 한국에 가서 실현할 것”이라며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서독 방문 8일간 일과가 끝나면 낮에 들은 얘기를 다

적어내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백 원장은 매일 새벽 3시에 잠자리에

드는 강행군을 했다. 대통령 주치의가 놔주는 주사로 근근이 버텼다는 것이다.

서독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박 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에 몰두했다.

각 나라의 고속도로 건설 공사에 관한 기록을 공부했다. 사안이 사

안이니만큼 비밀 유지도 철저히 했다. 고속도로 건설 구상이 미리

알려져 반대 여론이 들끓게 되면 착공도 하기 전에 좌초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아우토반을 달려 본 지 2년4개월이 지난 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 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선거공약으로 제시했다.

백 원장은 국내 최초의 민간연구소인 한국산업개발연구원을

설립해 경부고속도로의 타당성 분석과 운영 활성화 방안에 대한

보고서를 내는 등 자문 역할을 했다.

백 원장이 박 대통령 통역관으로 서독을 방문한 것은 그가

대한민국 독일 유학생 1호이자 경제학 박사 1호였기 때문이다.

1955년에 독일 쾰른대 경제학과에 진학해 3년 만에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귀국, 29세에 중앙대 교수가 됐다.

경제학 책을 여러 권 집필해 유명해졌다. 하지만 5·16

군사정부에 의해 병역기피자로 몰려 훈련소에 강제 징집됐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병으로 있던 그를 박 대통령에게 요청해

발탁한 사람은 신응균 주서독 대사였다. 육군 훈련병에서

하루아침에 서독에 경제사절단으로 가는 정래혁 당시 상공부

장관의 특별보좌관이 된 것이다.

백 원장은 한독 경제협력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독일 정부로

부터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그는 “지난해 G20 회의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참석한 걸 보고 눈물을 많이 흘렸다”며 “그건 나만이

알 수 있는 대한민국의 고단한 역사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조강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