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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외풍에도 흔들리다 꺾여버리는 수많은 기업들 가운데에서 단단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기업에게는 모두 ‘뿌리’가 있다. 뿌리는 기업의 ‘전통’이자, 하나의 ‘정신’이다.
우리나라의 에너지, 화학, 통신사업을 이끌고 있는 SK그룹도 온갖 외풍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켜냈다. SK그룹은 2002년 이른바 ‘소버린사태’를 겪으면서 경영권 위협을 받았지만, 이를 극복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SK그룹의 뿌리 깊은 기업정신이 없었다면 소버린사태 당시 쉽게 침몰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고(故) 최종건 창업주에서 시작해 고 최종현 명예회장, 지금의 최태원 회장까지 2대에 걸쳐 내려온 SK그룹. 조그만 직물회사로 시작한 최종건 회장이 뿌린 씨앗이 이제 울창한 숲이 됐다. 그렇기에 SK그룹의 모태인 수원시 평동 선경직물 터는 의미가 더더욱 남다르다. 선경직물 터는 SK그룹의 정신과 뿌리가 한 곳에 응축돼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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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동 지역은 지난 1960~70년대 선경직물의 수혜를 많이 받았던 곳이다. 70년대는 선경직물의 직원만 해도 2000여명이 넘는 등 수원시 최대의 고용창출기업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야말로 선경직물의 ‘황금기’였다.
평동 주민 이 모씨는 “60~70년대 선경직물 때문에 평동 전체가 먹고 살았을 정도로 호황이었다”면서 “현재 SK그룹이 이렇게까지 성장한 것은 모태인 선경직물의 덕이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평동 1-1번지는 싸늘한 폐공장으로 남아있다. 낮은 담장 위에 보이는 공장들의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고, 거미줄로 인해 공장 내부는 육안으로 관찰이 불가능할 정도다. 당연히 SK그룹 발상지임을 기념하는 그 어떤 구조물도 볼 수 없었다. 현재 이곳 선경직물 터는 관리인 한명이 정문을 지키면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선경직물 터가 폐공장으로 바뀐 건 2003년 이곳에서 공장을 운영 중이었던 SK케미칼이 직물사업 철수를 결정하면서부터다. 1990년대 들어 SK케미칼은 사업구조를 화학중심으로 재편하면서 직물사업을 계속 축소해왔다. 이로 인해 평동 직물공장은 이후 명맥만 유지해오다 2003년 9월 끝내 문을 닫게 됐다.
SK그룹 측은 향후 선경직물 터 처리를 두고 여러 검토를 해왔으나 아직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몇 년 전엔 SK건설이 이곳에 대형쇼핑몰을 건립할 예정이었으나 인근에 위치한 공군 제10전투비행단으로 인한 고도제한 등의 이유로 이 조차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SK그룹의 발상지인 선경직물 터가 아직까지 폐공장으로 남아있는 이유다.
SK그룹 측도 모태인 선경직물 터에 대한 처리를 두고 고심이 깊다. SK그룹 관계자는 “최근 몇 년전부터 옛 선경직물터에 기업 발상지를 기념할 수 있는 여러 사업들을 검토해왔지만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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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건 회장은 약관 18세의 나이로 조선 선만주단과 일본 교토직물이 합작한 선경직물에 입사했다. 최종건 회장은 어린 나이와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입사 4개월만에 생산2부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조선인이 여공 100여명을 통솔하는 자리에 올랐다는 건 파격적인 조치였다.
최종건 회장에게 직접적인 경영의 기회가 찾아온 건 1945년 광복 이후다. 한-일 합작사인 선경직물은 미군정의 관리를 받다가 정부 수립 이후 국가에 귀속됐다.
이후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쟁 동안 선경직물 공장은 크게 파손됐다. 하지만 최종건 회장에겐 하나의 기회였다. 당시 최종건 회장은 잿더미였던 공장 부지와 귀속 재산을 매수, 직기 15대를 두고 ‘선경직물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것이 SK그룹의 시작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파고를 넘어 기어코 자신의 직물회사를 설립한 최 회장의 집념이 빛을 발했다.
최종건 회장은 선경직물을 국내 제일의 직물공장으로 키우길 원했다.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때부터 최종건 회장의 품질제일주의가 시작됐다. 이는 1955년 10월 열린 ‘해방 10주년기념 산업박람회’에서 빛을 발했다. 선경직물의 ‘닭표’ 인견직물은 이 산업박람회에서 부통령상(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60~70년대 최종건 회장은 섬유산업에 주력, 1962년 인견직물을 해외로 수출했고, 이어 선경잔디공업(1965년), 선경화섬(1966년), 선산섬유(1970년), 선경산업(1962년)을 설립하며 사세를 넓혀나갔다. 1973년에도 선경유화를 설립해 석유화학 및 정유 사업에 진출하며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그룹의 큰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늘은 이 젊은 사업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잿더미 속에서 SK그룹을 일군 최종건 회장은 1973년 폐암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당시 최종건 회장의 나이 47세였다.
하지만 최종건 회장의 꿈은 동생인 최종현 회장에게 이어진다. 1975년 최종현 회장은 ‘제2창업’을 선언, 수직계열화를 천명하며 형의 꿈을 이어나간다.
1980년엔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며 정유사업의 기틀을 단단히 잡았고, 1994년엔 현재의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의 대주주로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하는 등 현재 SK그룹 주력사업의 윤곽을 잡았다는 평가다.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된 최종건 회장의 꿈은 2대를 걸쳐 ‘현재진행중’이다. 형제인 최종현 회장은 1998년 사망했지만, 2세인 최태원 현 회장이 그룹의 키를 잡고 순항 중이다. 정유, 화학, 이동통신사업은 물론 최근엔 자원개발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며 ‘자원부국’이라는 새로운 꿈도 키워나가고 있다.
◇SK 기업정신 대대로 계승한다= “인간은 석유와 비교도 되지 않는 무한한 자원이며, 경영은 결국 인간을 어떻게 활용해 가치를 극대화하는가에 달려있다.”
최종현 회장이 생전에 강조했던 말이다. SK그룹은 이 같은 최종현 회장의 인간중심경영을 체계화시켜 계승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SKMS(SK Management System)’다. 최종현 회장이 1979년 정립한 SK의 인간중심 기업문화다. 최종현 회장은 생전에도 기업가로서 한평생 동안 이룬 것 중 최고업적을 “SKMS를 만든 것”이라고 대답한 바 있다.
SK그룹은 최종현 회장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2008년 ‘SKMS연구소’를 경기도 이천에 개관했다. 이곳은 최종현 회장이 30여년 전 직접 밤나무를 심어 ‘계원율림’이란 숲을 만든 곳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개관식 때 “SK의 사업과 시장이 어떻게 변화, 성장해 갈지라도 우리를 유지, 존속, 발전시킬 수 있는 힘은 결국 SK문화, 그 중에서도 SKMS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SK그룹은 2007년 충북 충주 인등산에 인재양성 및 기업문화 전시시설인 ‘수펙스 센터(SUPEX Center)’를 개관했다. 수펙스 센터는 최종현 회장의 인재양성 기업문화를 확산, 발전시키기 위해 기획돼 SK그룹의 기업문화와 경영철학을 확산하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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