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具常) 시인의 문학 외적인 부분에 대통령 박정희가 있습니다.
구상 시인이 문단에서 유일하게 박정희 대통령과 개인적 우정을 나눈 친구임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두 사람의 신체에 사는 하나의 영혼>과 같이진실하였던 두 분 친구의 우정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우정을 상징하는 꽃, 라일락을 두 분의 영전에 바칩니다.
대통령 박정희의 카리스마와 시인은 걸맞지 않은 느낌을 주지만, 두 사람의 인연과 우정의 세월은 반세기를 헤아립니다. 시인 구상과 대통령 박정희는 격동의 근대사 한복판에 함께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연은 박정희가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 50년대부터 시작됩니다.
구상은 서울에서 태어나 원산 근처 덕원으로 이주, 해방 후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나 작품 성향 때문에 반체제분자로 몰려 월남해야 했습니다.
가난과 전쟁으로 국가적 고난이 극심했던 시절, 국방부 신문 승리일보 주간이며 종군기자단장이었던 구상은 피란지 대구에서 두 살 위의 청년 장교 박정희를 만납니다.
육군본부 작전국장 이용문(李龍文) 준장이 그에게 작전국 차장 박정희 대령을 처음 대면시키며 “의리의 남아”라는 한마디 말로 소개를 했습니다.
이용문은 박정희가 드물게 존경했던 군선배입니다. 구상의 눈에 비친 박정희, 이 날카롭고 고독한 눈매의 조그맣고 새까만 남자는 플라톤의 <국가론>, <월남 흥망사>를 탐독하는 등 지적 탐구심이 강했으며 민족주의 성향의 투철한 국가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구상과 박정희는 자주 만나 조국과 인생을 담론하며 의기투합으로 친분을 쌓아갑니다. 둘은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역사의 고난을 벗어날 수 있는 지를 뜨겁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은 먼발치에서 서로를 존경하는 반면, 강한 역사의식과 현실참여의 행동주의로 밀착되어 있었고, 고난과 모험에 과감히 자신을 던지게 됩니다.
구상에게 닥친 고난은 정치적 사건입니다. 자유당 정권 시절 그는 정치적 사건으로 15년 구형을 받고는 <사형 아니면 무죄를 달라>고 요구, 재판부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아냅니다.
사생관(死生觀)이 투철한 면에서 군인 박정희에 못지 않은 행동주의 시인의 강골(强骨)입니다.
시인과 군인은 서로 다르고 먼 길을 가게 마련이지만, 4.19혁명과 5.16군사혁명의 격변이 그들의 재회(再會)의 중력(重力)으로 작용을 했습니다.
박정희의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구상은 친구의 거사가 성공했음을 알고 주저없이 이를 구국운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4.19 후의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어. 학생들은 몽둥이를 들고 의정단상(議政壇上)을 점령하고, 맨손 맨발로 휴전선을 넘어 북한을 해방하겠다고 난리고 난장판이었지.> 시인은 말했습니다.
혁명의 돌개바람 속에서 4.19혁명의 주체인 학생세력은 5.16혁명의 군인으로 국가의 주체가 교체되었습니다.
-이해인 수녀와 시인 구상- 훗날 시인은 친구를 위해 시 한편을 선물합니다. < 당신의 영광에는 푸르름이 있다 밤안개를 헤친 결단의 그날이 땅에 또하나 새벽 동을 트게 하고
우리의 가슴 속에 새 삶을 불러 일으킨 저 5월의 푸르름이 있다 >
구상은 대통령 박정희에게 비판적이었던 지식인과 문단 인사들의 곱지 않은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친구 박정희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주저함이 없었고,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혁명 거사 며칠 뒤, 둘은 재회를 합니다. <어떤 분야라도 한몫 해주셔야죠!>
박정희가 국정에 참여하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두세요.> 사양을 하고 며칠 뒤 구상은 서둘러 일본으로 가버렸습니다.
경향신문 도쿄지국장을 자청해서 국내를 떠난 것은 친구 박정희의 청을 물리치기 위함이었습니다.
< 바로 내 앞방에다 사무실을 마련해 놓았는데 끝내 가시기요. 이 판국에 일본 낭자들과 재미나 볼 작정인가요?
시인이란 현실에서 보면 망종이지요. 그래서 <플라톤>도 그의 이상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게 아닙니까! >
박정희는 목메인 소리로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의 맑은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똑같은 말을 두번 꺼내지 않았습니다. 딱 한번으로 끝이었습니다.
박정희의 집권 기간 내내 구상은 멀리 친구로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구상에게 만만한 너나들이 친구였으며,
남들처럼 고개 조아리고 ‘대통령 각하’를 존칭하는 일도 없었고, 박정희도 그걸 원치 않았습니다.
집권 말기, 정치적 저항과 혼란이 심해지자 구상은 친구의 외로운 처지를 근심하다 청와대로 찾아갔습니다. 1979년 9월이었습니다.
< 이제 임자가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소. > 은퇴를 권유했습니다.
박정희의 대답은 고뇌어린 침묵 뿐이었습니다. 묵묵히 현관까지 배웅을 하던 박정희의 쓸쓸해 보이던 그 모습이 마지막 이었습니다.
한달 뒤 그가 세상을 하직하고, 구상은 5년 동안 그의 안식을 기원하는 가톨릭 미사를 올렸습니다. 제사를 지내준 것입니다.
그후 그는 거주지인 여의도 아파트에서 친구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을 내려다 보며 우정을홀로 새김질하다
2004년 봄과 여름이 갈마드는 5월, 저만치 다가올 채비를 마친 여름은 이제 자기 몫이 아니라는 듯, 가는 봄을 따라 훌훌 먼길을 떠났습니다. 우국의 충정으로 의기투합했던 시인과 대통령은
슬픈 가족사(家族史)를 지녔다는 점에서도 비슷했습니다.
박정희가 부인 육영수를 먼저 잃었듯이, 구상도 부인을 먼저 잃고 외로운 말년을 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상은 두 아들마저 병으로 잃은데다 그 자신도 투병 생활을 하는 남다른 불행을 한몸에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남의 불행을 더 챙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전란기에는 갈 곳 없는 상이군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정이 많아 주변의 가난한 시인들을 힘 닿는대로 도왔으며,
나라의 벼슬은 사양했지만 시단(詩壇)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얼굴 내밀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평생 따라다닌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폐결핵, 가난의 병이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투병하던 그가, 17평짜리 구형 아파트에서만 30년을 살아온 그가 장애인 문학지(文學誌)를 돕기 위해 2억원을 보내주어 주위를 숙연케 했으며, 그렇게 훌훌 털어주고 그 자신은 가난의 병을 가지고 떠난 것입니다.
박정희가 눈에 띄는 대로 서민들의 아픔을 챙기고 거기에 자신의 권력을 대입하여 그들을 손잡아 일으키며 눈물을 지었듯이, 시인과 대통령은 고난의 친구들이었다는 점에서도 같았습니다.
재물에 관심이 없는 청렴한 삶도 그들은 같이 살았습니다.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시 ‘오늘’ 중에서)
구상은 기교를 배제한 간결한 시어(詩語)에 풍부한 의미와 암시를 담아냈습니다. 박정희는 일체의 정치적 수사(修辭)가 없이 요점을 딱딱 집어 말하는 어법을 구사했습니다.
구상은 친구 박정희를 이렇게 말합니다.
< 의협심과 인정이 강하고 시심(詩心)이 있는 사람이었다. 난세에 파격적인 인물들을 모아서 혁명을 일으킨 뒤에 정상적인 사람들로 주변을 교체해가는 과정에서 갈등도 많았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람을 죽인 적이 한번도 없었다 >
그리고 먼저 간 친구를 위해 다음과 같은 진혼축(鎭魂祝)을 썼습니다.
<국민으로서는 열여덟 해나 받든 지도자요 개인으로는 서른해나 된 오랜 친구 하느님! 하찮은 저의 축원이오나 인류의 속죄양, 예수의 이름으로 비오니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고이 쉬게 하소서 > <이 세상에서 그가 지니고 떨쳤던 그 장한 의기와 행동력과
질박한 인간성과 이 나라 이 겨레에 그가 남긴 바 그 크고 많은 공덕의 자취를 헤아리시고 하느님, 그지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그 스스로가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 그가 앞장서 애쓰며 흘린 땀과 그가 마침내 무참히 흘린 피를 굽어보사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길이 살게 하소서 >
하느님 앞에 친구를 보내는 그의 우정이, 사랑과 용서의 기원이 지금도 절절히 가슴에 메아리칩니다.
시인과 대통령의 우정은 둘이 나눈 30년, 홀로 남아 새긴 20년을 합해서 반세기의 세월이었습니다. 대통령 박정희가 먼저 떠나고 시인 구상이 뒤따라 먼길을 떠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