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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사이드] 수원·화성 만세운동,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뉴스 인사이드] 수원·화성 만세운동,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김중래

승인 2022.02.27 19:28

수정 2022.02.27 19:37

2022.02.28 1면

 

잊혀가는 첫 농민 주도 민족항쟁

수원 송산·우정·장안 주민 항거 중

일본 순사 사망하면서 보복 시작돼

제암리 학살사건까지 이어진 역사

행정구역 개편으로 화성 편입된 후

사람들 각각 다른 투쟁 기억하기도

당시 지도자인 차병혁 선생 생가 등

유적보존·복원 안돼 대책마련 시급

▲ 3·1절 103주년을 이틀 앞둔 27일 오전 화성시 우정읍 화수리 화성 3·1운동 만세길 방문자 센터에서 자전거 동호회원들이 태극기 앞을 지나가고 있다. 천안수바이크 동호회원으로 소개한 곽진수씨는 “삼일절을 맞아 그날의 정신을 기리고, 숭고한 뜻을 알리고자 매년 회원들과 만세길을 찾는다”고 말했다. /김철빈 기자 narodo@incheonilbo.com

103주년 3·1절을 맞아 수원(화성) 3·1운동의 그 역사 현장을 되짚어 봤다. 이 만세운동은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일제 경찰을 처단한 첫 농민 주도의 민족항쟁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1949년 수원군의 우정읍과 장안, 송산면이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화성군으로 편입됐다. 이후 수원 3·1운동은 화성시에선 화성 3·1운동으로 불리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지금은 많은 사람이 각각 다른 만세운동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조차 기억에서 역사적 사건의 한토막으로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

 

▲역사의 그날 함성 … 일본의 처절한 보복

1919년 3월26일 수원군 송산면에서 홍면·왕광연 선생 등의 주동으로 시작된 만세운동은 28일 농민 1000여명이 송산면 뒷산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출동한 일본 경찰이 홍면 등 지도자에게 발포하자, 이에 격분해 일본 경찰 1명을 죽였다. 일제는 같은달 12일 농민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구금하고 민가를 마구 불태웠다.

수원군 우정읍과 장안면(현 화성시) 일대에서 일제 침탈에 항거해 2000여명이 넘는 주민이 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 순사를 처단한 '우정·장안 만세운동'의 신호탄이었다. 장안면 석포리에서는 이장이자 마을 지도자였던 차병한 선생과 차희식·차병혁 선생은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서로 친족 관계였던 세 사람은 마을 주민을 독촉해 거리로 나오게 했다. 비슷한 시간 수촌리에서도 이장인 백낙열 선생이 천도교인들과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마을 곳곳에서 만세를 부르고 장안면 사무소로 집결했다. 수촌리는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제의 보복을 당해 마을 가옥 42채 중 38채가 불탔다.

우정면 조암리에서도 수많은 농민들이 일제식민지 통치의 근거로 사용했던 우정면사무소의 문서와 집기를 밭에 내던지고 모두 불태우기도 했다. 우정·장안 만세운동에서 일본 순사가 처단되자 일제는 처절한 복수를 했다. 일본군대가 파견돼 일대를 짓밟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람을 체포했다.

4월15일 일제는 항쟁에 보복하기 위해 향남읍 제암리에서 마을 사람을 교회에 모으고 불을 지르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학살 사건으로 일본 육군에 의해 민간인 29명이 학살당했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와 언더우드에 의해 해외에 알려졌다.

 

▲격렬하게 저항한 이유

역사학자들은 오늘날 이 지역이 유독 격렬한 만세시위를 벌였던 이유로 집성촌의 발달, 드넓은 농경지, 혹독한 일제의 간척사업 등이 꼽았다.

이 지역은 과거부터 성씨를 중심으로 여러 마을이 발달해 있었다. 그런 만큼 서로 의견을 공유하고 힘을 모으기도 쉬웠다. 미묘한 집성촌간 자존심 싸움은 만세시위에서 서로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원인으로도 분석됐다.

일제가 넓은 농경지를 수탈하고 바다와 인접한 지역적 특성 때문에 보 건설과 간척 사업에 농민을 강제로 동원했다. 이 때문에 수탈당한 농민들이 만세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잊혀간 역사의 현장

지난 27일 오전에 찾은 화성시 우정읍 화수초등학교. 넓은 농경지 가운데 세워진 화수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3·1 독립운동 기념비와 화수리 주재소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초등학교 운동장 한 쪽에 있는 농구골대 주변은 1919년 당시 화수리경찰관주재소가 있던 곳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당시 만세운동의 유적은 충분히 보존되지 않고 있다. 만세시위를 이끌었던 여러 마을 지도자의 생가 중 차병혁 선생의 생가만이 남아있다. 이마저도 이곳저곳에 쓰레기가 쌓여있고 흙벽이 무너질 듯 위태하게 서 있다. 당시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등은 논과 밭으로 변해 있었다. 103년 지난 지금 역사의 현장의 곳곳이 제대로 복원되지 않아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앞서 화성시는 2019년 4월 고증을 거쳐 우정읍과 장안면 일대를 정비해 3·1운동 역사탐방로(31㎞)를 조성했다.

이 지역 출신이기도 한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은 “과거 역사보다 근현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던 곳은 관리가 잘 안 되고 있다”며 “3·1운동의 기록을 잘 보존하고 복원해 기억하고 역사관광 산업 성장동력으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중래 기자 jlcomet@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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