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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57)] 233년 전 옛 수원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김충영 수원현미경(57)] 233년 전 옛 수원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승인 2022.02.07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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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 300여호 중 기와집은 단, 한 채

일성록 표지. (자료=서울대 규장각)

정조13년 7월에 행해진 옛 수원읍(융·건릉경내) 거주민 244가구에 대한 보상내역은 당시의 모습을 미흡하나마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라 생각된다. 정조13년 7월 20일자 『일성록』기사에 이주대상 주민 244호에 대한 자세한 보상내역이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이후 작성된 최종 이주대상은 319호라고 적고 있으나 추가로 편입된 79호에 대해서는 보상조서가 기록되지 않아 확인이 어려운 실정이어서 244호를 대상으로 구읍의 모습을 살펴볼 수 밖에 없음은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일성록 1789년 7월 20일자 244호 보상내역. (자료=서울대 규장각)

244호에 대한 신분의 기록은 호적대장을 근거로 작성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을 살펴보면 직역(職役)을 42개로 구분해 적고 있다. 대체적으로 18세기의 신분 구분을 양반, 중인, 상민(양인), 노비로 대별하는 것이 보통이라 하겠다. 조서에 의하면 양반가구로 볼 수 있는 집은 만호(萬戶,종사품의 무관)1호와 유학(幼學,벼슬하지 않은 유생)5호가 있어 양반은 6호가 있었다.

다음은 중인 가구로 한량(閑良,무과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30호, 하리(下吏,하급관리)28호, 여러 직종의 군관36호가 있어서 중인가구는 94호로 구성돼 있다. 상민(양인)은 126호인데 사령, 통인 등 하급아전에 속하는 가구와 각종 군역을 진 부류 및 장인(匠人)과 역(役)을 지고 있지 않은 양인 및 부녀자가 포함된다. 노비는 관노, 관비, 교노, 사노를 노비로 구분하였는데 18호가 있었다.

읍내 거주민의 신분을 백분율로 살펴보면 양반이 6호로 2.5%, 중인이 94호로 38.5%, 상민(양인)은 126호로 51.6%, 노비가 18호로 7.4%임을 알 수 있다. 읍내에 양반이 2.5%, 중인이 38.5%가 살아서 하층민이 60% 가량살고 있음은 읍행정에 관여하는 인력들이 읍내의 주류를 이루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옛 수원읍내 거주민 백분율 그래프. (자료=김충영 필자)

당시 244호에 대한 신분별 주택규모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면 주택 244호중 1가구만 기와집으로 표기돼 있고, 243가구는 초가로 적혀 있다. 구읍당시 관청건물과 기와집 1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초가집이어서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초가집에서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집의 규모를 살펴보면 가장 작은 규모가 2칸이고 가장 큰집은 27칸이다. 평균 규모는 7.33칸이지만 244호의 절반이 넘는 58%가 6칸이 안 되는 집에 살고 있으며 한 가족이 살기에 협소한 4칸 집도 83호에 달했다. 상대적으로 큰 규모라 할 수 있는 15칸 이상 집은 21호였다.

주택규모별 백분율 그래프. (자료=김충영 필자)

주택을 규모별로 살펴보면 최소 크기인 2칸집이 5호로 2%, 3~4칸은 83호로 34%를 차지한다. 다음으로 5~6칸은 59호로 24%, 7~10칸은 43호 18%, 11칸 이상 집이 54호로 22%가 된다. 결국 읍내 244호 주택 가운데 6칸 이하 주택이 147호로 60.2%를 차지하는 셈인데 6칸 이하라면 한 가족이 생활하는데 결코 넉넉한 크기라고 할 수 없는 영세한 규모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1칸이 넘는 집도 58호가 있었으며 세 집은 21칸이 넘는 대형주택도 있었다. 신분별로 244호를 분류해보면 양반집의 평균규모는 11.6칸이다. 중인 중 한량과 가선 등은 8.3칸, 각종 군관은 10.39칸이었다. 상민에 속하는 사령, 통인 등은 7.78칸, 직역을 진 양인은 4.14칸 이었다. 관노, 사노 등은 6.81칸으로 나타난다.

이들을 네 신분으로 정리하면 양반의 경우 평균 주택규모는 11.6칸, 중인은 9.71칸, 상민은 5.26칸, 노비신분은 6.81칸이 된다. 이는 대체적으로 비율로 나눈 수치이므로 신분에 따라 주택의 규모가 정해진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당시 주택가격은 얼마였을까? 1789년7월19일자 '수원하지초록'에 기록된 보상내역을 살펴보면 전체 244호의 규모는 1789칸반, 원보상비는 3457냥, 위로금 형식의 추가보상비 4112냥, 합계 7569냥으로 기록되었다.

구체적으로 보상 내용을 살펴보면 최저 2냥에서 400냥까지로 큰 편차를 보이고 있다. 400냥을 받아간 집은 기와집인 하리(중인) 신분의 나태을의 집이다. 초가집 중에서 최고 가격은 한량 홍윤주의 집이 18칸 이었는데 122냥을 받아갔다.

보상내역 백분율 그래프. (자료=김충영 필자)

보상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최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3냥 이하의 집이 51호로 20.9%에 달한다. 4~10냥 정도의 집은 91호로 37.3%이다. 다음으로 11냥에서 40냥까지가 86호로 35.2%이며, 고액에 속하는 41냥 이상이 16호로 6.6%이다.

결국 읍내 중심부의 주택 20%정도가 원가 3냥 이하의 열악한 상태이며, 60% 가까운 집이 원가 10냥 이하의 영세한 수준이었다. 이는 호당 31냥이었으며, 건물 1칸당 4.2냥에 불가했다. 당시 화폐가치를 현재와 비교는 어려우나 쌀1섬당 6냥(1섬은 15말), 장인1일 노임이 3전 이었다.

일성록에 기록된 구읍 중심부의 보상대상 244가구를 통해서 제한적이나마 당시의 수원읍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읍 중심부에는 양반이 가장 낮은 비율을 보였으며 제일 많은 숫자는 상민 다음으로 중인이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가옥의 구조는 244호중 기와집이 단 한 채였음은 기와가 귀했음을 알 수 있다.

집의 크기도 7.33칸 이었으나 58%의 집이 6칸 이하의 영세한 규모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신분별로 보면 양반집이 가장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중인의 집이였으나 일부는 양반집을 능가하는 집도 13호나 됐다. 제일 규모가 작은 계층은 상민(양인)의 집이었는데 이는 노비의 집보다 적은 규모였다.

1789년 구읍의 상황은 중인 계층의 토착민과 고을을 경영하는데 필요한 일종의 하급공무원 계층과 상민, 노비계층이 읍내에 살지 않았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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