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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과 최은희 /나혜석기념관, 유물수집이 먼저다_수원일보 기사 모음

나혜석과 최은희 /나혜석기념관, 유물수집이 먼저다_수원일보 기사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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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과 최은희

나혜석기념관, 유물수집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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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과 최은희
[열린세상] 이달순(수원대 명예교수·hello sports.net 발행인)
2012년 01월 25일 (수) 편집부 suwon@suwon.com

나혜석과 최은희는 감옥에서 만났다. 1919년 3월 5일 나혜석과 조경민이 체포돼 서대문감옥으로 넘어갔다. 처음에는 나혜석과 두 사람이 한 감방에 있다가 최은희와 최정숙이 있는 큰방으로 옮겨갔다. 나혜석과 최은희의 첫 만남이었다. 최은희는 3월1일 경기여고 기숙생들과 함께 파고다공원 독립시위에 참석하며 체포됐는데 두 사람만 투옥됐다.

나혜석은 1896년 4월 15일 부친 나기정 모친 최시의 사이에 출생한 2남3녀 중 둘째딸로서 아명은 명순이였다. 본적은 경기도 수원군 신퉁면 신창리이며 태어난 곳은 수원 남수리라 했다. 수원3·1 여학교(지금의 매향여고)를 졸업하고 1910년 서울 진명여학교에 입학했다. 17세 때 동경여자미술전문대에 유학했다. 그의 애국활동은 1915년 여자일본유학생으로 나혜석과 김정하가 조선여자 친목회를 창립하며 시작했다. 그리고 잡지 (여자계)를 발행했다.

1919년 2월 5일 동경유학생들을 결속하며 성금 125원을 보내기도 했다. 때마침 세계1차 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부르짖는 강화회의가 열릴 때였다. 이화학당 안에서는 미국 유학수속 중인 신마실라를 우리나라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의논을 하기 위해 비밀화합이 거듭됐다. 동경유학생인 나혜석이 여류화가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 이로 인해 나혜석은 옥고를 치르면서 독방변기통에 올라가 가슴에 1906이라는 번호표가 붙은 최은희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은희가 조선일보 최초의 여기자가 되면서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졌다.

나혜석은 1921년 3월 19일 20일 동안 경성일보 내청각을 빌어 경성일보와 그 자매지인 매일신보의 후원으로 제1회 개인전을 열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더구나 그 주인공이 여자였기 때문에 그 인기는 대단했다. 풍경화를 중심으로 수년간 모아두었던 약 7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됐고 학생의 단체입장 사회 각계의 인사들 각국의 영사관원 미국의 남녀 선교사 하며 일본인 관객들도 많았다. 당시 매일신보의 보도를 참고하면 첫날의 입장자는 1000여 명이요 다음날에는 내청각을 싸고돌도록 대성항을 이루며 오후 3시까지에 5~6000명의 인파가 밀려들었다고 했다. 또한 전시품중 350원의 최고가격인 ‘신춘’은 경쟁 속에 팔렸으며 이 밖에도 예약딱지가 붙은 것이 많았다고 한다.

그녀는 조선 미술전 관람회에는 1회에 입선 2,3회에 4등 4회에 3등 5회에 특선, 총 출품 128점 중 금 딱지 11개에서 한 개를 차지한 여성 최초의 특선으로 개가를 올렸다. 그녀의 동경 ‘이과전’ 당선작인 ‘천후궁’은 부군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있을 때 짱골라 인력거 위에 화구를 싣고 다니며 그린 것인데 일본 궁내성에서 사갔고, 프랑스 파리에서 그린 ‘정원’은 귀국도중 이과전에 출품하며 당선된 것으로 그때 이왕가에서 사들여 갔다는 것이다. 동경의 ‘이과전’이라 하면 세계 어느나라 국전보다도 급수가 높을망정 결단코 손색이 없다는 국제적 정평이 있는 만큼 이에 당선하는 것은 화가로서의 최대의 희망이요 최고의 명예인 것이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유화를 개척한 최초의 여성이였다. 그는 단편소설과 수필 등을 기고했고 시도 쓰고 확고한 자기주장을 세운 여권론도 여러 번 발표해 신문학운동대열에도 앞장섰던 다재다능한 여인이었다.

나혜석은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식을 올렸다. 여신처럼 떠받드는 다정한 남편이기도 했으나 섬세한 정서적 감정에는 이해가 잘 안 가는 아쉬움이 있었다는 것도 틀림없는 고백이다. 그녀가 1927년 외유 중에 발칸해변에서 최은희에게 보낸 그림엽서에 “동생은 이 그림의 절경을 보라 여름 하늘의 흰 구름처럼 뭉게돼 오르는 그 신바람에 마음을 적실 애인이 그대에게는 있는가?”로 쓴 것을 보면 “나는 없노라” 하는 듯 허전해 보이는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아마도 그녀의 정열이 그 자연의 황홀감에 잠깐 이성을 잃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 예술 극치의 혼을 합하는 부부가 되지 못한 데서 실패의 원인을 불러왔다고 볼 수 있다.

최은희는 자서전에 나혜석의 주검을 추적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아일보 전 주필 고재욱의 부인 김숙배 여사와 함께 추모회라도 한번 열어 드리자고 벼르기만 했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현재 수원박물관에서 열리는 나혜석 특별기획전 ‘추모전시회’에 필자의 어머니 최은희의 뜻을 바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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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기념관, 유물수집이 먼저다
[김훈동칼럼]
2012년 01월 25일 (수) 편집부 suwon@suwon.com

수원예총 회장
박물관이나 기념관은 한 도시의 얼굴이자 예술과 문화수준의 상징이다.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架橋)를 놓는 일이다. 역사의 기록으로 남는 사실들을 그대로 남겨놓는 유물이 시간을 담아냄으로써 빛을 남겨놓을 수 있을 때 시민들은 삶의 희열을 맛보게 된다.

‘나는 나혜석이다’라는 특별기획전이 지난해 말 시작으로 오는 2월 말까지 수원박물관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는 전시다. 정월 나혜석은 100여 년 전 시대에 살았던 수원의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다. 최초의 전업작가로 물적 토대를 구축한 선구자였다. 최초의 여성유화가요 판화작가다. 유화개인전을 최초로 열었다. 근래에는 최초의 여성소설가로도 조명을 받고 있다. 그밖에 독립운동가, 신여성으로 여성해방론자라고도 회자 되고 있다. 이름 앞에 ‘최초’라는 낱말이 많이 붙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53세로 세상을 불우하게 떠난 비극적 인물인 나혜석은 ‘나는 지금 내 고향 수원에서 불꽃 같은 내 삶을 이야기’하듯이 몇 갈래 섹션으로 구분 지어 전시되고 있다. 하지만, 진품 유화는 리움미술관에서 대여한 1935년대 작품으로 알려진 화령전 작약 한 점만이 유일하다. 대부분 잡지에 게재된 나혜석의 문학작품들, 문학지 표지그림과 신문 삽화들이다. 그가 연속 입상의 영광을 차지한 ‘조선미술전람회도록’에 실린 그림 몇 점이 전부다. 대부분 사촌오빠 등 나씨 집안의 가족관계 계보, 야학을 하고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하던 3·1운동 재판기록 등과 당시 다양하게 교류를 나눈 이들의 면면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학창생활을 보여주는 그의 학적부와 유럽 여행기 등도 볼 수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미술계보다 문학을 통해 이광수, 염상섭, 김동환, 김일엽 등과의 교류가 잦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가 남긴 유화작품이 주 볼거리로 전시되지 못한 점이 다소 아쉽다. 수원시가 그간 나혜석을 재조명하는 학술심포지엄이나 미술공모전을 해마다 개최하고 있지만 정작 그가 남긴 미술작품 수집에는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나혜석이 남긴 그림작품 하나도 없는 수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껏 문제제기가 없었던 예술문화인의 책임도 크다. 이제사 누굴 탓하고자 하는 일은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나혜석의 예술세계를 제대로 조명하려면 그의 작품 확보에 나서는 일이 시급하다. 기념관 건립은 그다음이다. 현재 나혜석기념관을 짓기 위한 용역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찌 하드웨어가 먼저인가. 토목공사가 먼저일 수 없다. 그 안에 담길 내용물을 확실하게 확보한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 활기 넘치는 예술문화공간을 누가 마다하랴. 그렇지만 그건 아니다.

정월 나혜석, 그의 이름은 가슴을 아리게 한다. 나혜석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예술이라는 글 속에 넣을 때 그에 대한 평가는 명백해진다. 당시 유교의 예술천시사상이 만연한 사회에서 전업 여류화가로서의 활동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어느 한 사람에 대한 삶을 두고 위대하다는 찬사를 보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상찬을 아끼지 않을 수 있는 인물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은 복이다. 삶의 궤적(軌跡)을 물론 그가 일궈놓은 예술과 문화에 까탈을 부리고자 함이 아니다. 독립기념관을 먼저 짓고 유물을 수집한 것이 결코 아니다. 담겨질 유물을 먼저 수집하고, 분류 작업을 하면서 그것을 감안하여 내부 설계가 이뤄졌다. 벽돌을 모으기만 해서 집을 지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유물을 모았다고 해서 기념관을 곧바로 지을 수는 없다. 유물의 진위를 가리는 작업도 뒤따라야 한다.

나혜석을 보면서 한 선구자의 후세에 미치는 영향이 이처럼 큰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시민만이 아니라 미술인들의 고른 굄을 받고 있기에 그렇다. 건물 하나 짓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그릇에 담을 내용물을 마련하는 일은 어렵다. 건축공사보다 전시할 유물확보가 먼저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