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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재순 미래통합당 수원무 당협위원장

[인터뷰] 박재순 미래통합당 수원무 당협위원장

“상대적으로 낙후된 수원무지역을 위해 혼신의 노력 다할것”

박재순 미래통합당 수원무 당협위원장

정오의 해가 15도 정도 기울어진 오후 초입, 한적하고 아름다운 카페에서 한 인물을 만나 인터뷰를 시작했다. 수원지역 4·15총선 중 가장 강한 상대와 자웅을 겨뤘던 박재순 미래통합당 ‘수원 무’ 지역 당협위원장을 만났다.

지난 봄 총선을 한 열흘 정도 앞둔 시점에서 ‘본지‘가 박재순 후보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만나는 순간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그 당시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박재순 후보는 여당의 최고 거목을 상대해서인지 승부보다는 상대를 존 중하는 태도를 보였었다. 겸손을 바탕으로 한 언행이나 인품이 오히려 필자를 살짝 감동시키는면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그 치열한 전투에서 4할의 지지를 얻어낸 것이다.

결과가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선거공약도 ‘공유’를 바탕으로 한 사회환원적이며 헌신적인 내용들이었다. 대표공약인 “국회의원세비(월급) 전액을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는 문구가 참으로 신선했다. 박 위원장은 이미 제9대 도의원시절에 세비 약 2억 5천만 원을 전액 사회에 환원한 바가 있었다.

월급을 ‘경기도공동모금회’에 전부 반납해 ‘선행’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 위원장은 대표적인 나눔의 사업가로 지난 20년 간 지역사회에 봉사활동을 이 어오며 현장에서 행동으로 나눔을 실천해온 인물이다.

그는 주로 현장에서 정치를 하는 인물로도 정평이 나있다. 그래서 그는 주민들의 마음을 가장 잘 읽을 줄 아는 예의바른 정치인들 중 한사람이 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런 그가 4·15총선 ‘수원 무’지역에서 민주당의 ‘정치거목‘ 김진표 후보와 자웅을 겨루게 돼 영광이라고 겸손해 했었다.

배울 점이 있다면 적장에게서도 배운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서민들이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공약인 자녀들의 교육에 관해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넘어 ‘완전의무교육’ 실시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이어 수원시의 행정효율성을 높여 구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행정공약인 ”4개구에서 5개구로 분구해서 일 잘하는 구청유치“를 내걸었었다. 공약만으로는 4선의 상대후보와 견주어도 뒤쳐지지 않고 오히려 더 진솔하고 현실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참으로 능력있고 진솔한 인품을 가진 후보 중의 한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던 총선 후보였다. 그런 인물을 총선 70일 후 다시 만나 지난 총선의 여운과 그간의 심정을 차분하게 들어보기 위해 인터뷰를 시작했다.

▲ 4·15총선이 70일이나 지났는데 회상의 시간이 지나며 느끼신 소감은?

-네, 70일이라면 두 달이 넘는 시간이네요. 길다면 긴 것 같기도 하고 짧다면 짧은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선거였고 나름 얻은 게 많은 선거였던 것 같습니다.

인구에 회자되는 ‘권토중래(捲土重來)’하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다음을 준비 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묵묵하게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심정으로 지역주민들만 바라보며 앞으로의 길을 가겠습니다.

▲ 위원장님이 살아오신 여정을 말씀해 주신다면?

-저는 1962년 1월 5일,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고향에서 다녔습니다. 그리고 작은 아버님이 계신 부산으로 내려가 ‘동의대 경제학과’를 다녔습니다.

졸업 후에는 서울로 올라와 ‘한미약품’ 세일(sale)파트에서 병원을 담당했습니다. 젊은 시절 ‘중이염’이 심했던 관계로 군복무가 면제되었기에 ‘한미약품’에서 6년 정도 지속적인 근무를 할 수 있었고 91년도에 수원에서 선배가 ‘인성약품’이란 제약도매상을 창업, 차장으로 입사, 그때부터 수원에 거주를 하며 수원과의 인연 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3년 정도 머슴살이를 하며 회사를 성장시켰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던 ‘개 성약품’으로 직장을 옮겨 이사로 재직하며 ‘제약계’에서 경영에 관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이어 ‘한국 오티스(제약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재직, 드디어 2015년 수원에서 약품회사를 창업, 현재까지 사업을 이어오고 있는 중입니다.

▲ 위원장님이 정치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시기와 사연은?

-한미약품신입사원 때인 90년, 수원권선에서 3선(90년~2001년)을 지낸 김인영 국회의원이 의약품을 취급하는 사업체를 운영하시던 관계로 초선 때부터 자연스럽게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과의 교류가 시작됐고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김 의원의 3선 말기에 국가적으로 IMF가 터졌고 민자당 소속이었던 김 의원이 사업경영을 위해 후일 DJ정부로 적을 옮기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2002년 지방선거 時 DJ정부의 새천년민주당이 전국은 물론, 수원권선지 역에서도 인기가 없던 관계로 선뜻 나서는 도의원후보가 없었습니다. 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권선지역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을 하게 되었 습니다.

▲ 2000년대 초 정치인생이 굉장히 험난했다고 하는데 그 내막은?

-저는 짧은 시간 안에 세 번의 낙선을 겪었습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소속으로 첫 낙선을 경험했고 이어진 보궐선거인 2003년에서도 낙선, 그리고 2006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또 낙선, 4년 사이에 3번의 패배 를 겪고 나니 나름 ‘내상(內傷)’이 생기며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가 이명박 후보에게 500만 표라는 엄청난 차이로 패배하면서 민주당소속으로서는 정치인의 길이 힘들 것이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해인 2008년 4월 ‘수원 을‘ 당협에 한나라당 소속의 정미경의원이 후보로 올 때인 4월 3일, 민주당을 탈당해 4월 4일 한나라당에 입당, 정미경 후보 캠프에 합류했고 정 후보가 민주당의 이기우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도의원 후보 공천권을 받지 못한데 이어 2012년 총선에서도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2014년 시민경선을 거쳐 권선지역 새누리당 후보로 도의원에 도전해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8년 권선지역에서 재선에 도전을 했지만 시민 촛불혁명으로 민주당열풍이 전국을 강타하던 시기로 다시 한 번 낙선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 금 번 2020년 4·15총선 국회의원 도전까지 걸린 세월이 무척 긴 세월이다. 그 소회는?

-91년 경 정치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일반인이 국회의원 도전까지 장장 3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절실히 느낀 점이 있다면 정치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선 계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또한 어느 당이든 중앙당의 리더 ‘부재(不在)’는 말단 정치인들에게는 치명적인 걸 깨달았습니다. 모든 정치는 혼자 하는게 아니라는 것 또한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조직원이 모두 힘을 합쳐 지역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 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30년 정치인생을 통해 느낍니다.

‘민심(民心)’은 절대로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 야당인 미래통합당 수원 무 지역위원장으로서 주민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코로나19로 여야를 떠나 모든 시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4·15총선에서 낙선이 되었지만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민들을 섬기겠습니다. 지역현안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지만 우선은 ‘관(官)’과 ‘민(民)’이 힘을 합쳐 이 위기를 헤쳐 나가는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이 몰락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실패에는 노무현정부 때부터 경제부총리를 지내며 문재인정부의 100대 정책을 입안한 김진표 의원의 실책도 한 몫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 십 수년 간 전혀 진전이 없는 수원비행장 이전문제, 공군골프장 체 육공원화 문제, 덕영대로 교통체증 문제, 분당선 권선노선의 문제점 등은 권선구와 영통구에서 시급하게 풀어야 할 지역 현안입니다.

또한 분당선 권선노선(망포역→아이파크명성교회역→수원터미널 역→수원역) 6㎞의 추진과 신수원선 인덕원에서 영통역까지 공사를 1~2년 단축해 조기개통 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선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이어 수원 무 지역 내 GTX(수도권 광역급행철도)역사를 유치하는 것 또한 수원 무 지역의 교통인프라 확충을 위해선 필수조건입니다. 저는 야당으로서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혼신의 힘을 다해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정치인 생활을 함에 있어 말보다 행동으로 그리고 실천을 통해서 꾸준히 일을 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수원 무 지역구인 권선구 와 영통구를 위해 묵묵하게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수 년 간 낙후 되고 정체된 ‘수원 무‘지역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것입니다.

▲ 차기에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신다면 어떤 정치를 꿈꾸고 계신지?

-저는 윤리정치 즉, 깨끗한 나눔의 정치를 하는 게 꿈입니다. 정치는 대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인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주민들과 함 께 생활정치를 하면 훌륭한 정치가 되고 정치인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 가족사를 포함 인생과 정치에 대한 좌우명이 있으시다면?

-91년도 한미약품재직 時 아버님의 지인을 통해 제 아내를 만났습니다. 슬하에 딸과 아들이 하나씩입니다. 28세 된 딸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 중입니다.

30세가 된 아들은 중소무역회사에 다니며 나름 사회의 일원으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어 너무 고맙고 사랑스럽습니다. 물론 제 집사람이 일등공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인생철학은 낙천적인 ‘베이스’ 안에서 노력을 기본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좌우명도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입니다. 사람들이 인내하지 않으면 바라는 결과는 절대로 이룰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전 정신을 바탕으로 열심히 살면 인생은 반드시 그에 대한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대담=김인종 편집위원장/ ·사진=김동초 대기자 new1suw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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