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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칼럼] 김정은의 妄想·문재인의 夢想

[강천석 칼럼] 김정은의 妄想·문재인의 夢想

조선일보 강천석 논설고문

입력 2020.06.20 03:20

핵무기 그늘 아래서도 북핵 문제 당사자 아니라는 착각이 빚은 破局

강천석 논설고문

김정은의 동생 김여정의 말투와 단어는 버릇없고 고약했다. 제 오빠는 최고 존엄(尊嚴)으로 받들어 모시면서 아버지뻘 되는 남쪽 대통령을 몇 번이고 시궁창에 내팽개쳤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비판 여부를 떠나 국민 전체가 모욕감과 좌절감을 동시에 느꼈다. 지난 3년 남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말이 오갔기에 저들 남매에게 이런 닦달을 당해야 하는가. '지금은 인내하는 수밖에 없다'는 대통령 말이 더 허망했다.

이번 사태로 남북 관계가 채무자와 채권자 관계로 변질됐음이 확실히 드러났다. 세계에서 열 몇째로 잘사는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에 돈을 꿨을 리 없다. 마음의 빚을 따질 양이면 6·25와 그 이후 북한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의 얼굴을 떠올려 보라. 김여정은 남쪽 국민 세금으로 지은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추가적인 군사 행동까지 예고했다.

김여정은 "'판문점 선언'과 '평양 공동 선언'에서 남조선 당국이 이행하겠다고 약속한 내용 가운데 제대로 실행한 것이 한 조항이라도 있는가" 하고 추궁했다. 총액 계산서를 흔들었지만 계산서 세목(細目)을 들여다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재작년 방북 때 '평양 능라도 5월 1일 경기장'에서 한 군중대회 연설 가격도 나와 있을 것이다.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남북 정상 부부가 손을 맞잡은 사진은 또 얼마나 멋졌는가. 그게 공짜일 리 없다. 과거 남북정상회담은 '선불(先拂)과 후불(後拂)' '현찰 납부와 물납(物納)'의 차이가 있었을 뿐 공짜는 없었다. 이 사정을 모를 리 없는 대통령은 유럽 5국을 순방하며 대북(對北) 제재의 한 모퉁이라도 헐어보려다 프랑스 대통령한테 '국제 공조가 우선 아니냐'는 민망한 소리까지 들었다. 김여정은 이걸 '국제적 구걸질'이라고 상스럽게 표현했다.

문제의 근원은 '북한 핵 문제'와 '남북 관계'를 별개의 문제로 보는 이 정권의 착각에서 비롯됐다. 이 착각은 북한 핵무장 문제의 당사자는 한국이 아닌 미국과 북한이라는 더 큰 착각을 낳았다. 북한의 핵 위협 아래 살면서도 자신의 당사자 자격을 스스로 박탈한 결정은 연쇄 후유증을 다시 낳았다. 한국 대통령 자리는 운전석에서 조수석을 거쳐 미·북 회담 결과를 회담장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 처지로 격하(格下)됐다. 미국과 북한은 한국이 미·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고 미국과 북한에 각기 다른 말을 전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신뢰 저하(低下)로 중개인 자격마저 흔들리는 처지다. 김정은 남매의 폭언과 폭력 시위는 북한 핵 문제와 남북 문제라는 맞물려 돌아가는 두 톱니바퀴에 낀 한국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북한이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뒤 현 정권의 외교 문제 브레인들이 청와대에 모였다. 현재의 파국(破局)을 불러들인 아이디어를 대통령에게 심어준 사람들이다. '북한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기회를 만들자'는 그들의 결론은 그대로 대통령 소신(所信)이 됐다.

미국이 정말 북한 핵무장 문제의 제1 당사자일까. 미국은 동맹국 한국의 안보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있다. 미국은 자신의 국익(國益)이란 저울에 달아보고 미군을 증파(增派)할 수도 있고 뺄 수도 있다. 미국은 자신이 만든 핵 확산 방지 체제를 흔드는 북한의 핵 보유를 저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과 미국 국민에게 임박(臨迫)한 위험은 아니다. 미국은 1962년 코앞의 쿠바 핵무기를 제거하기 위해 소련과의 핵 전쟁을 무릅썼던 나라다. 행동 개시에서 작전 완료까지 13일이 걸렸다. 미국은 핵심 이익과 직결된 중동 지역 이라크의 핵 보유 위험이 커 보이자 침공을 서슴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스스로에게 다음 질문을 던져야 마땅하다. '미국이 북한 핵무장으로 자신들의 안보가 직접적이고 현저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했다면 북한 핵 문제 해결이 25년간이나 지지부진했겠는가.' '대화로든 그것이 안 되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해결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북핵의 당사자가 한국 말고 누가 따로 있겠는가.'

북한의 이번 협박과 위협은 핵 보유국이 핵 없는 나라를 압박하는 전형적 수법이었다. 북한의 본심은 미국과 핵무기 제거가 아니라 핵 군축(軍縮)을 논의하는 것이다. 그것이 김정은의 망상(妄想)이라면, 북한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면 스스로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대통령의 몽상(夢想)이다. 적(敵)의 망상과 내부의 몽상이 만나면 무서운 일을 비켜갈 수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20/20200620000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