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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여년 전 정조가 걸었던 능행차 길.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정조가 걷던 융릉 가는 길은 지금까지도 효심의 대명사로 전해지고 있다.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한 융릉은 화성시 안녕동 1의1에 있다. |
# 들어서며-정조와 사도세자, 신읍치 수원
수원에서 '옛길'을 논하려면 능행차길을 아니 말할 수 없고, 능행차길을 거론하는데 수원 신읍치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상이 높은 곳에 올라 고을 터를 바라보고 곁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본디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 5~6호였었는데 지금은 1천여호나 되는 민가가 즐비하게 찼구나. 몇 년이 안되어 어느덧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으니 지리의 흥성함이 절로 그 시기가 있는 모양이다."<정조실록, 정조 18년 1월15일>수원이 계획된 신도시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의 신도시급 택지지구를 조성하듯 정조는 200여년 전 신도시 건설을 위한 획기적인 구상을 해냈다. 때는 정조 13년(1789년), 정조 나이 38세에 달했지만 후사가 없자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묫자리를 이장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상소가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정조는 당시 경기 양주에 있던 아버지의 무덤 영우원(지금의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 서울시립대 뒷산 위치)을 당시 수원도호부 일대의 수원 구읍치(지금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융릉)로 옮겨 '현륭원'이라 일컬었다. 사도세자가 임금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때라 그 무덤조차 '능'이 아닌 '원'으로 불렸던 것. 참고로 정조는 당시 묘를 이전하자마자 바로 이듬해 후사로 순조를 얻게 된다.
이렇게 수원 구읍치에 아버지의 묘를 모신 정조는 이후 수원 읍치를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겨 수원행궁을 지은 뒤 신읍치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화성은 바다를 등지고 한강을 앞에 두어 서울 100리 땅을 차지했고, 영남을 당기고 늦출 수 있으며 호남을 움켜잡을 수 있는 사방으로 통하는 큰 길이 모이는 곳이다."<화성성역의궤>지금의 팔달산 아래 수원 신읍치에 대한 지리적 평가였다. 이같은 교통 및 상업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이점과 정조의 뜨거운 사랑으로, 수원 신읍치는 조성 1년 뒤 인가가 719호에 달했고, 화성 축성공사가 시작된 1794년에는 인가가 1천호를 넘어서는 대도시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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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6년 수원 화성의 모습을 담고 있는 화성전도. 화성은 정조18년(1794년) 1월 착공해 2년 뒤 9월 완공됐다. |
#1. 수원-원행길과 팔부자거리
■ 효심이 깃든 원행길
수원 행궁을 중심으로 한 신도시 개발이 진행되면서 길도 함께 들어섰다. 정조가 길지 않은 즉위 기간동안 무려 13번을 통행했다는 원행길(지금의 능행차길)은 현륭원에 모신 아버지 묘소를 찾던 길을 말한다.
원래 원행길은 의주로, 경흥로, 평해로, 동래로, 강화로와 함께 조선 팔도 6대로 중 하나인 제주로에 걸쳐 있었다. 제주로는 한성에서 수원을 통해 천안~정읍~해남에서 제주에 이르는 대로였다. 한성에서 수원까지만 보면 지금의 옛 1번 국도와 유사했는데, 원행길은 궁에서 노량배다리를 건너 금불암~사당리~남태령~과천행궁~인덕원천교~지지대고개~화성행궁~용주사~현륭원에 이르는 길이다.
이같은 원행길이 정조 19년(을묘년 1795)에는 다소 수정된다.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수원 행궁에서 열기로 한 정조가 원행길에 나서면서 과천이 아닌 시흥을 경유하기 시작했던 것. 이는 혜경궁 홍씨가 고갯길이 험준했던 과천, 남태령길에 고생할 것을 염려한 정조가 당시 경기감사 서용보를 통해 개발해 낸 평탄한 길이었다. 후에 정조가 이때 지났던 길은 수원별로라고 해서 19세기 말에는 조선 10대로 중 하나가 된다.
뒤주에 갇혀 억울한 생을 마감한 아버지가 못내 그리워 수원을 '고향'으로 여겼다던 정조의 원행길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서 태생해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심으로 발전됐고, 이로 인해 정조의 효심은 원행길에 녹아내려 이곳을 지나던 백성들을 통해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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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가 신읍치 이전 이후 수원을 상업요충지로 부흥케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팔부자거리의 현재 모습. |
■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성군의 팔부자거리
원행길에는 정조의 지극한 효심만 깃든 것이 아니었다. 풍수지리보다 교통이 편리한 곳에 수원 신읍치를 세워 실리를 중시함으로써 백성들의 풍요로움을 굽어 살피려는 성군의 인자함 또한 묻어났다.
지금의 수원화성 내 장안문에서부터 행궁 앞 종로 네거리에 이르는 팔부자거리가 그 증거다. 지금은 문구유통 거리로 알려진 이곳은 구불구불한 옛길의 형태는 그대로 지니고 있지만 아스팔트 포장과 현대식 건물들로 과거 팔부자거리의 면모는 떠올리기 어려웠다. 학계에선 정확한 사료가 없어 장안문에서 팔달문 방면으로 행궁 앞 종로 네거리까지를 팔부자거리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팔부자거리의 유래와 역사적 의미에 대해선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정조는 신읍치를 이곳 행궁 근처로 옮긴 뒤 신읍치를 상업요충지로 만들기 위해 한성 부호와 전국 8도의 부자들을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이자없이 자금을 융통해주고, 화성 성내에 점포를 차리게 해 주거나 전국의 인삼 상권과 갓 제조권을 허락했다. 실제 당시 한성 육의전과 팔부자거리 외에 상설시장이 있었다고 기록된 바가 없을 정도로 정조가 수원에 베푼 은혜는 차고 넘쳤다. 이에 팔부자거리 주변을 당시엔 '보시동'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처럼 수원의 시작이자 끝이 된 정조의 노력은 부모에 대한 효심에서 비롯됐고, 풍수지리보다도 교통 및 상업 요충지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백성을 널리 평안케 하고자 하는 성군의 마음에서 확장됐다. 또한 그런 정조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는 고스란히 원행길과 팔부자거리에 녹아있다.
길에는 인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서려 있다. 필요에 의해, 혹은 필연에 의해 사람들이 오가고, 사람들이 오가던 이유들이 모여 그 시대의 역사로 산화돼 길에 그대로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길에 서린 역사가 각기 다르다보니 어떤 길이 품은 역사는 간혹 아름답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며, 한스럽기도 하다. 선조들이 자연발생적 문화유산인 '길'에 쉬이 이름을 붙이지 못했던 것도 저마다의 역사가 녹아들어 굳어진 길을 억지로 규정하려 들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한번 붙인 길 이름은 쉽게 바꿀 수 없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한때 우리에게도 옛길은 저마다의 역사를 가득 품은채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남의 손으로 일궈진 강제적인 근대화와 이념차로 촉발된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선조들의 역사가 서린 옛길들은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게 됐다. 길을 잃다보니 뿌리를 잊었고, 뿌리를 잊고 살다보니 민족의 혼은 온데간데 없는 게 현실이다.
이에 경인일보는 임진년 신년 기획 '길에서 뿌리를 찾다'를 통해 경기지역 곳곳에서 숨쉬고 있는 옛길을 찾아 소개하고, 그 길에 새겨진 역사에서 현재를 되돌아보려 한다. ┃편집자 주
글┃최해민기자
사진┃하태황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