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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특례시의 종합/*수원화성(기타 문화재 종합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1. 수원 화성​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1. 수원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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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고시간 2020. 05. 04 19 : 54

정조와 정약용의 합작품… 방어기능 극대화

수원 화성(水原 華城) / 조선 정조 때인 1794년 1월 착공해 1796년 9월 2년 반 남짓 걸려 완공했다. 둘레 5천744m, 면적 130ha로 동쪽은 평지, 서쪽은 팔달산에 걸친 평산성이다. 아래는 돌을 위는 벽돌로, 성벽 가운데는 우묵하게 들어가고 위아래는 불룩하게 나오도록 쌓아, 적이 성을 타고 오르기 어렵게 만들었다.

■방어기능 없는 조선의 성

대포가 본격화되기 전, 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강력한 방어 시설이었다. 성은 도시방어와 주민 보호가 기본이고, 이를 위해 보조 시설물이 필요하다. 유럽과 중국, 일본의 성 대부분이 옹성, 해자와 돈대, 치성, 여장과 총안, 현안을 갖추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성들은 낙제 수준이다. 전란 때마다 하루도 못 버티고 뚫린 한양 도성부터 그렇다. 게다가 중국 역대 왕조는 번국(蕃國) 조선의 축성까지 까다롭게 간섭했다. 조선 천지에 제대로 갖춘 성은 남아나기 어려웠고,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성이 적을 막아 지키기 위한 것인가? 적을 만나면 버리고 달아나려는 것인가? 나는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성이라 할 것이 하나도 없다. (所謂城郭者 將以守禦歟 抑遇敵則棄而去也 果爾 吾不知己 否則國無一城焉)”

첫째, 벽돌은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크기가 균일하니 설계대로 정밀하게 축성할 수 있고, 시간도 절감된다. 왜 벽돌 아닌 돌로 성을 쌓는가?

둘째, 성이 인구보다 너무 커서 수비하기 불편하다. 청나라 주요 도시 영평성도 둘레 10리에 훨씬 못 미친다.

셋째, 성 바깥벽은 돌을 단단히 쌓았으되, 안벽은 허술하다.

넷째, 해자도, 현안도 없어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무용지물이다.

다섯째, 옹성이 없어 전투 시 성문이 바로 뚫릴 것이다.

수원 화성은 실학자들의 축성론이 상당 부분 반영돼, 전통 방식에 중국과 서양의 최신 기술이 어우러진 건축물이 되었다. 영·정조 연간 되살아난 경제력과 기술력이 2년 반 남짓한 짧은 기간에 대역사를 가능케 했다. 당시 수원 인구나 경제 규모, 전략적 가치와 비교하면 규모는 작지만, 구조물을 과학적이고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추었다.

화성 포루(砲樓) / 누각이 달린 치성을 ‘포루’라 한다. 정조나 정약용의 독창적 기획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때 명상(名相)서애 류성룡이 포루를 처음 구상했다. 임진왜란의 교훈서 '징비록(懲毖錄)'을 보면, 서애 대감은 1592년 중양절(음력 9월 9일) 포루에 대한 구상과 구조를 남겼는데 화성 포루와 비슷하다.

■정조 기획하고, 정약용 설계하다

기능과 경제성, 심미적 요소라는 디자인의 3원칙이 잘 살아난 ‘작품’ 수원 화성은 대한민국 사적 3호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축성 책임자인 좌의정 채제공, 현장소장인 감관 조심태보다 더 큰 이바지를 한 인물은 기획한 정조와 설계자 다산 정약용이었다. 조선 왕조에 드문 명군과 조선 500년 최고 천재의 합작품인 셈이다. 정조는 ‘효도’를 명분으로 당쟁을 청산하고 왕도 정치를 구현하고 싶었다. 여차하면 한양 도성을 버리고 수원화성을 근거로 중원의 대군과 맞싸우고 싶었다. 정조 이산(李)은 성격 차, 정견차로 할아버지 영조에게 밉보여 일찍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와 전혀 다른 인물이다. 서고모(庶姑母)들의 견제와 방해를 뚫고 대권을 잡은 속 깊은 아들이다. 아버지를 참소한 인물을 차례로 치죄(治罪)해 제대로 셈을 치러준(, 셈 산) 효심 깊은 아들이다.

옥에 티가 있었다. 후에 금정 찰방, 오늘날로 치면 금정역장쯤인 한직으로 좌천된 다산이 임지로 가면서 화성 옹성 문 위에 구멍 다섯 개가 가로로 뚫린 것을 발견했다.

“오성지(五星池)는 적이 성문을 불태우려 할 때 물을 부어 막는 것이니, 구멍을 세로로 곧게 뚫어 성문 바로 위에 놓아야 쓰임새가 있다. 감독자가 도본만 보고 구멍을 가로로 뚫었으니, 이른바 ‘그림만 보고 천리마를 찾는’ 격이구나.(五星池者, 將以灌水禦賊之焚門也. 直穿其穴, 正當門扇之上, 然後方可有用. 董役者, 只見圖本, 橫穿其穴, 此所謂按圖索驥者也.)”

남치(南雉) / 치성(雉城)은 성벽 바깥에 덧붙여 쌓은 벽.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관측하고 싸울 때 가까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한 시설.

■아름다운 수원 화성의 멋

정조는 계산에만 밝은 게 아니라, 심미주의자요 낭만파였다. 착공 전인 1793년 12월 후일의 공사감독관 조심태에게, 성곽의 기초와 치성, 옹성, 현안 등 부속시설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화성(華城 ‘화려한 성’)답게 아름답게’ 축성하라고 지시한다. “성루가 웅장하고 화려해 꾸며 보는 이의 기가 꺾인다면,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然則城樓雄麗, 使觀者奪氣, 亦爲守城之大助)”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른다, 군사지휘소인 동북각루(東北角樓)의 공식 이름이다. 너무나 여유롭고 낭만적인데, 중국 송나라의 거유 명도(明道) 선생 정호(程顥)의 ‘춘일우성’(春日偶成) 칠언절구에 유래한다. 그 첫머리 ‘운담풍경(雲淡風輕), 구름은 맑고 바람은 가벼우니….’로 시작하는 가사가 조선 후기 가사집 청구영언, 해동가요에 실리고, 해방 후에는 박녹주, 이봉희가 불러 유성기 녹음까지 했단다. 봄날 풍류에 시대와 학문의 깊이는 상관없구나. 다음은 ‘춘일우성’ 원시.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구름 맑고 바람 가벼운 한낮에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 꽃 찾고 버들 따라 시내 건너네,

방인불식여심락(傍人不識余心樂) 사람들은 내 즐거운 마음 모르고,

장위투한학소년(將謂偸閑學少年) 한가함을 탐내 소년처럼 논다 하네

암문(暗門) /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둬, 바깥쪽에 있는 적에게는 보이지 않는 비밀 통로였다. 사람이나 가축이 문을 통해 양식 등을 실어 나르도록 했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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