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대책, 왜 약발 안 듣나
보도 : 2018.01.17
역대 가장 강력한 부동산 투기 대책이라던 '8·2 대책'이 시행된 지 불과 5개월, 부동산시장은 대책의 약발은커녕 새해 들어 또 다른 가격폭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서울 아파트 매매가 상승률은 '과열지역 내 거래에 대한 무기한 단속' 방침에도 불구하고 8·2 부동산 대책 직전 수준까지 치솟았다.
특히 강남구는 서울 평균상승률의 2배가 넘었고, 송파구와 광진구, 양천구 등 범(汎)강남권도 덩달아 크게 올랐다. 반면 입주폭탄을 맞은 경기 남부권을 비롯한 지방에선 정부대책 발표이후 거래가 얼어붙고 가격이 내려 양극화만 심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작년 5월 출범한 뒤 6·19 부동산 대책을 시작으로 작년 말까지 7월을 제외하고 매월 부동산 관련 대책을 발표했다. 부동산 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은 “강남 집값은 지극히 비정상이며 부동산 가격 문제에 대해 물러서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더 강력한 부동산 대책들이 주머니 속에 많다”며 힘을 실어주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강남 집값 상승률은 5개월 만에 원위치로 되돌아왔다.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의 고강도대책은 공급확대 보다 다(多)주택자를 집중 규제하는 수요억제에 치중했다. 주택보급률이 102%나 돼 공급은 충분한 데 다주택자들의 투기로 집값이 오른다며 이들의 투기수요를 억누르는 데 주안점을 두어왔다.
여기에 노무현정부 때의 '집값 트라우마'도 한 몫 했다. 노무현 정부가 집값을 못 잡은 것은 찔끔찔끔 규제를 추가해 시장내성을 키워주었기 때문이라며 8·2 부동산 대책 때는 세금·대출·청약 규제를 한꺼번에 꺼내 '융단폭격'을 했다. 그러고도 지난해 12월 13일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와 대출제한 등 강력한 규제책을 추가했었다.
이 모든 대책에도 아랑곳없이 연초부터 집값이 다시 뛰자 정부당국도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일단 정부는 강남 등 서울 특정지역의 경우 투기수요가 가세하면서 재건축·고가 아파트 중심으로 과열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하고 과열현상이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무기한, 최고수준 강도로 현장단속을 실시키로 했다.
전국의 투기 의심 지역에 특별사법경찰을 배치해 부동산 불법 행위가 적발되면 압수수색, 긴급 체포, 영장 신청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한다는 얘기다. 지난 해 '8·2 대책' 때 운을 뗐던 집값 잡는 '특사경 카드'가 정말 현실이 된 것이다.
특별사법경찰은 물론 경찰청 소속 경찰관은 아니고 수사권을 가진 국토부 소속 공무원이다. 하지만 '미친 집값' 잡느라 정부가 수사력까지 동원할 정도로 부동산 대책은 백약이 무효인 상태에 이르렀다.
일부 강남 고급 아파트 값 오름세는 광풍(狂風) 수준이다. 자고 나면 1억 원씩 오르고, 압구정동 대치동 반포 등 강남 일대 부동산중개업소에는 번호표를 들고 매물 나오기만 기다리는 대기자들이 줄지어 있다고 한다. 한 채 나오면 순서대로 한 채 채가는 식이다.
서울의 강남 아파트는 편리하고 쾌적한 생활 인프라에 교육환경이 좋아 부동산시장에서 희소가치를 인정받아 온지 오래다. 최근 몇 년간 집값은 비교적 안정세를 보였지만 다주택자를 표적으로 한 각종 부동산 시장안정 대책이 불씨를 들쑤셔 놓았다.
다주택자들이 여러 채를 팔고 '똘똘한 한 채'만 갖는다며 강남 아파트 매입에 나서고, 지방 자산가들까지도 가지고 있는 자산을 현금화해 강남 아파트로 몰려들고 있다. 다주택자들이 집을 팔기보다 일찌감치 자녀에게 증여하는 현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의 각종 정책이 결과적으로 강남 쏠림을 심화시키고 있다. 자립형 사립고와 외국어고의 학생우선선발권이 폐지되면서 강남학군의 몸값이 올라가며 강남·송파·양천구 전세시세가 요동쳤고, 매매가를 밀어 올렸다.
서울시가 잠실주공5단지에 최고 50층짜리 아파트를 짓는 재건축안을 사실상 승인하면서 송파구 아파트가 급등했고, 서울시의 영동대로 지하 광역 복합 환승센터 추진 계획 등도 강남 아파트 급등의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수요가 들썩거리는 데도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다. 실제 강남 4구(강남·서초·송파·강동구)의 주택매매 수급지수는 116.7로,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12년 7월 이후 최고치였다. 지수 100이 넘으면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는 얘기다.
게다가 장기화되고 있는 저금리와 증시 호황, 가상화폐 시장 활황 등으로 풍부해진 유동성도 안전자산인 강남 부동산 시장에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
투기수요든 실수요든, '강남 3구' 주택 시장에는 지속적으로 수요가 있는데 이를 인위적으로 누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강남 집값을 근본적으로 안정시키려면 이 지역이 가진 희소성을 해소해야한다. 이는 공급확대와 수요분산이 동시에 이뤄질 때만이 가능하다.
고밀도 개발로 아파트 공급을 늘리면서 강남수준의 여건을 갖춘 주변 신도시들 쪽으로 거주수요를 다변화해 결과적으로 강남 집값의 하락을 유도하는 게 최선이다.
임기 초 2월과 임기 말 2월을 비교한 강남 아파트 값은 노무현 정부 때가 67%, 박근혜 정부 때가 11.5% 오른 반면 이명박 정부 때는 6.5%가 내렸다. 보금자리주택이 보급되면서 강남 집값이 상대적으로 안정세를 보인 결과다.
정부대책의 마지막 카드로 보유세인상이 남아있지만 보유세를 중과할 경우 '똘똘한 한 채' 현상이 더 두드러지면서 매물이 실종될 것이라는 우려도 벌써 나온다. 보유세 인상분이 전·월세로 전가되고, 다시 집값을 자극할 공산이 크다. 조세로 집값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보유세는 집값과 상관없이 조세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 순리다.
강남 집값 상승이 강북과 수도권, 지방 집값 상승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강남만 잡으면 전국의 부동산시장이 안정된다는 믿음 또한 허물어지고 있다.
정부가 강남 집값과 씨름하는 사이 일부 수도권이나 지방은 거래가 끊기고 입주물량 과잉의 악재까지 겹쳐 매매가가 폭락하는 등 파탄직전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주택자들을 몰아붙이면 임대주택의 대부분을 공급하는 민간임대시장이 축소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들에게 돌아간다. 동시다발로 이뤄지는 강남 재건축이 집값 상승을 부추기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하고, 강남 인근의 성남 하남 과천 등지의 그린벨트를 풀어 중장기적으로 택지공급을 늘려가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다.
강남 아파트값을 잡겠다고 내놓은 고강도규제들이 기초체력이 약한 지방 부동산시장의 판을 흔들어 양극화가 심화되는 부작용도 막아야 한다. 지방에서도 매매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구입자금에 대한 대출조건 완화 등 맞춤형 접근도 필요하다. '주머니속의 규제조치들'을 만지작거리기에 앞서 정부의 부동산정책 전반에 대한 정밀진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변상근 논설고문
[약력]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한양대 겸임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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