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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운동권’이 떠난 시민사회, 다시 흥할 수 있을까

‘386운동권’이 떠난 시민사회, 다시 흥할 수 있을까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가습기살균제 피해 진상규명 활동을 주도적으로 하고 있는 환경보건시민센터의 서울 서대문구 피어선빌딩 사무실. 문제를 일으킨 옥시 제품들의 불매를 호소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 정용인 기자

가습기살균제 피해 진상규명 활동을 주도적으로 하고 있는 환경보건시민센터의 서울 서대문구 피어선빌딩 사무실. 문제를 일으킨 옥시 제품들의 불매를 호소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 정용인 기자


시민정치 이후의 시민사회: 장하나 전 의원의 도전

대낮에 형광등이 켜져 있는데도 살짝 어두침침하다. 벽면 나무책장 가득히 진열되어 있는 옥시 상품들. 위로 구호가 적힌 펼침막이 걸려 있다. ‘제2의 옥시를 막자’, ‘Oxy Out’, ‘스프레이 제품이 위험하다!’ 7월 27일 <경향신문> 인근 건물에 자리하고 있는 환경보건시민센터를 찾았을 때 안쪽 사무실에 앉아 있던 최예용 소장(51)이 나와 반갑게 인사한다. 에어컨이 있지만 틀진 않는다. 선풍기를 들고 나온 최 소장과 마주앉았다. 개인적으론 이렇게 1대 1 대면으로 만난 건 2007년 4월 이후 처음이다. 9년이 지났지만 한결같다. 달라진 게 없다. 그를 처음 만난 건 훨씬 전이다. 근 20년 가까이 됐다.

최 소장은 누구보다 오래 ‘이 판’에 있었던 인물이다. 환경운동연합 전신인 공해추방운동연합(1988년 창립)이 만들어지기 전부터다. 그가 대학(서울대 산업공학과) 2학년 때인 1986년부터 청년반공해단체인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공청협) 활동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30년째다. 예전 일-서울대 공대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김세진(미생물학과)·이재호(정치학과) 열사의 신림동 사거리 분신-에 대해 물었다. “사실 어리바리한 상태였는데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인 것은 맞습니다. 제가 계속 활동가로서 삶을 사는 데 막연하지만 배경으로 자리잡은 사건이에요. 매년 4월 28일이면 추모제를 하는데, 어느덧 까먹고 지내다가 20주년이 지나고, 다시 얼마 전에 그때로부터 30년이 흘렀다고 하니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을 알고 있었느냐는 물음에 “학번으로는 제가 후배급이라-그는 삼수 후 대학에 들어갔다-저는 옛날 말로 ‘패밀리’에 무관한 일반 학생이었고….”

패밀리. 요즘에는, 아니 안 쓰인 지 거의 20년은 된 운동권 은어(隱語)다. 그가 시민운동판에 들어온 지 몇 년 뒤부터 민주화운동을 하던 386그룹 인사들의 ‘러시’가 일어났다. 1989년 경실련 창립, 다시 1994년 참여연대 설립으로 대거 존재 이전을 했던 이 ‘386운동권’ 인사들은 다시 몇 차례의 계기를 거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지금 그는 ‘희귀종’이 됐다. 이른바 메이저 시민운동판에 남아있는 몇 명 안 되는 386세대다.

시민운동판에 남은 ‘마지막 386세대들’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각 시민사회단체의 사무처장급 인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참여연대의 김기식·김민영·이태호, 환경단체 쪽의 서왕진·오성규, 경실련의 박병옥 등이 주요 멤버였다. 현재 이들의 길은 모두 달라졌다. 여전히 ‘시민운동’에 남아있는 인사는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위원장뿐이다. 최 소장은 이 386인사들의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원래 그런 모임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외톨이가 된 측면이 없지 않네요.”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사단법인 등록도 하지 않았다. 상근자는 그와 임흥규 팀장 딱 두 사람이다. 더 늘릴 계획도 없다. 사단법인 등록을 하지 않는 건 프로젝트에 휘둘리다 보면 해야 할 발언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로 화려한 주목을 받고 있는 요즘이 시쳇말로 ‘리즈시절’(전성기를 뜻하는 인터넷 용어)이다. 그렇다고 딱히 살림이 편 것도 아니다. “주위에서 ‘분위기가 이렇게 떠 있으니 회원 가입 많이 하죠?’라고 덕담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밖에서 보면 한 200~300명쯤은 신규 회원이 들어왔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데, 사실 그 후 관심을 보인 사람을 다 더하면 20~30명 정도?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해요.” 과거 그는 운동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스칼라 액티비스트’를 지향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굳이 번역한다면 ‘전문성을 가진 활동가’ 정도의 비전 제시다. “이전에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인데, 활동가가 갖는 주제와 학위 주제가 일치하지 않고서는 논문을 쓰는 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NGO 활동은 아무래도 호흡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시민운동 활동가의 위치가 그대로 두면 애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과 전문가의 딱 중간 정도? 언론이 필요로 하는 정도는 알지만 그 이상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는 한계가 옵니다. 굳이 박사학위가 아니라도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하나의 주제를 잡고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 이쪽에서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사회의 위기담론이 처음 나온 것은 2000년 총선시민연대 활동 직후였다. 그 후 16년. 위기를 넘어서 황폐화되었다. 이미경 환경재단 사무총장은 “지난 8년간 벌어진 보수정권의 끈질긴 탄압과 방해도 한 원인이지만 사람들의 의식과 욕망이 바뀌었는데도 따라가지 못하는 기존의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고답적인 태도도 주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안처럼 나온 것이 ‘시민정치’였다. 시민운동 활동가들 사이에서 ‘시민정치’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2009년 ‘희망과 대안’이라는 토의모임이 만들어진 때가 처음이었다. 시민정치는 거버넌스에 대한 이야기다. 시민사회가 GO, 그러니까 정부와 지자체나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협치’를 하는 것이 보다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에 부합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원론이다. 현실은?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존재 이전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빅텐트론’이라는 연합정치를 주장하던 김기식은 당시 <주간경향> 인터뷰에서 ‘스스로 권력의지가 부족하다’며 정계진출을 부인했다. 하지만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된 후 그는 ‘진보 집권플랜B’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시민정치 영역에서 운동하는 것이 당시 목표였는데, 통합을 주장한 책임론 때문에 정치권에 들어왔다”고 주장했다.(<주간경향> 978호 인터뷰 참조) 당시 ‘플랜B’를 꺼내든 것은 역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변화된 정치권의 상황 때문이었다. 그해 총선에서 야권은 다수당이 되는 데 실패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통합진보당 분당사태가 일어났다.

3월 3일 총선시민네트워크 소속 시민단체 대표들이 참여연대 회의실에서 공천 부적격자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3월 3일 총선시민네트워크 소속 시민단체 대표들이 참여연대 회의실에서 공천 부적격자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2012년, 그리고 2016년의 ‘플랜B’

2016년, 또 다른 ‘플랜B’ 논란이 한창이다. 플랜B는 시민공익활동 플랫폼의 이름이다. ‘대나무숲’과 같은 익명의 온라인공간 형식을 빌려 현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하는 활동가들의 운동에 대한 생각과 조직문화 등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다. 지난 7월 중순, 강정모 시민교육콘텐츠연구소 소장이 이 ‘플랜B’에 투고한 글이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시민단체의 상근활동가는 상근회원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하며 영리조직의 ‘직원’은 급여만큼 일하지만 조직의 가치에 동의한 회원이 아니기 때문에 가치와 비전에 대한 동의에 기반한 상근활동가는 ‘직원’과 다른 정체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글에 대해 ‘2030 현업 시민활동가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단적인 반박이 이것이다. “시민단체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과 일반기업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의 노동윤리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하는가.”(‘활동가를 향한 정신 승리의 파산을 바라보며’ 명의의 글)

사실 현재의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2030대 활동가는 이른바 ‘386운동권의 존재 이전’으로 형성된 과거의 시민사회 활동가와 참여경로나 비전, 목표하는 바가 다를 수밖에 없다. 앞의 ‘플랜B’ 논쟁에 댓글을 남긴 조원영씨(36)는 2009년부터 ‘1인 시민활동가’를 표방하고 있다. 대학원에서 북한학을 전공하고 “2007년부터 평화네트워크 활동을 시작으로 1년을 꽉 채우고 나왔다”는 조씨는 “나부터 이해할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내 또래나 나보다 어린 사람들은 어떤 이슈가 자신과 맞닿아 있지 않으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재미가 없어도 움직이는 윗세대의 느낌과는 확연히 다르다. 재미와 의미를 함께 추구하는 운동을 하고 싶다.” ‘시민활동가는 이래야 한다’는 전형을 깨고 싶어 1인 시민활동가를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사회에 공헌하고 싶고,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작게라도 자기 자리에서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을 돕는 운동방식이다. 그가 요즘 꿈꾸는 것은 새로운 형식의 강의를 조직하는 것이다. “서로 일면식도 없지만 합치면 묘한 케미가 만들어지는 두 사람의 강사를, 딱 10명의 청중만 초대해서 이뤄지는 그런 모임을 만들고 싶어요. 이야기만 듣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다들 가깝게 만나고 끝나면 좋은 관계가 계속 이어지는.” 기존 시민사회의 전형적인 활동방식과는 확실히 다른 ‘꿈’이다.

“압축성장 비판하며 압축성장 닮아갔다”

“어떻게 보면 K팝 붐과 비슷한 것 같다. 실제 일본에 가서 보면 ‘K팝은 이제 죽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확실히 붐이 꺼진 것은 맞다. 다만 K팝 차트나 팬텀 같은 것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아가는 것이다.” 이재현 NPO스쿨 대표의 말이다. 그동안 정치적으로 과잉 대표화되었던 시민사회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과정이 최소 10년은 걸릴, 앞으로도 오래갈 과제라고 전망했다. “과거처럼 사회적 영향력이 있었다면 본인의 타이틀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잘 나가는’ 시민단체 간사였다면 웬만한 국회의원 부럽지 않았다. 관료들 뿐 아니라 국회의원 보좌관도 앞에서 설설 기지 않았나. 그런 영향력이 있을 때는 정치권에 있든, 시민사회에 있든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과거에도 전망을 찾지 못했던 것은 똑같다. 자기 전망을 못 찾아도 ‘어떻게 되겠지’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을 뿐이다.” 현실을 되돌아보는 냉혹한 시기를 맞이하여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시민사회가 그럼에도 여전히 옛날 방식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이며, 내부 갈등은 거기에서 벌어진다고 말했다. “시민사회가 압축성장을 비판하면서 성장했는데, 돌이켜보면 자신도 그런 압축성장 방식을 닮아 있었다. 결국은 여기서도 시민과의 소통이 아니라 성과 창출이라는 효율성을 추구하다 보니 시민과의 괴리가 확대된 것이다. 총선시민연대 활동이 비판을 받는 지점도 평상시 생활의제와 관련해 지역을 방치하다가 선거철에만 정치인을 심판하자고 나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공감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아니었을까.”

지난해 7월 창립한 단체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이하 ‘바꿈’)은 그런 시민사회 내 세대 갈등을 풀어내자고 만든 단체라고 이 단체의 전진한 상임이사는 말한다. “사실 모든 영역에서 경계가 애매해졌다. 운동이냐 아니냐를 단순히 나누는 것도 애매해졌고, 제도권이냐 비제도권이냐를 따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바꿈’의 경우 폭로를 주요 활동방식으로 하는 과거의 시민운동 방식을 지양하고 주로 사람을 만나 조직하게 해주고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옛날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게 뭐하는 것이냐, 이게 목적은 무엇이냐고 물어보곤 한다. 우리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힘을 실어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풀뿌리 차원에서는 다이내믹하게 변하고 있는데 그 변화를 수용하는 틀이나 방법론에 대한 논의는 없고, 그런 밑바닥으로부터의 변화를 한국의 시민사회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공석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의 말이다. 곧 출간될 저서 <한국 시민사회를 그리다>를 준비하면서 전국의 풀뿌리 지역단체에 대한 현장조사를 하면서 공 교수는 그런 사례를 많이 봤다고 했다. 공 교수는 핵심적인 문제로 ‘순환형 로테이션의 부재’를 거론했다. “마틴 코라고 말레이시아 소비자운동 출신의 국제적으로 유명한 시민단체 활동가가 있다. 영국 유학파 출신의 엘리트이긴 한데, 유엔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위로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제3세계 네트워크’라는 조직을 만들어내 계속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은 이런 시민사회 활동가가 없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환경석학인 레스터 브라운 지구정책연구소 소장도 마찬가지다. 월드워치를 1970년대 창립한 데 이어 다시 FAO(유엔식량농업기구)에 들어가 인도에 가서 현장경험을 쌓은 뒤 다시 시민사회 영역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염태영 경기도 수원시장이 환경운동 출신인데, 그런 사람들이 풍부한 시정 경험을 쌓고 다시 시민사회 영역에 돌아와 활동할 수 있으면 그런 것이 시민사회뿐 아니라 정부 관료 쪽에도 큰 자산이 되는 것이 아니냐.” 간단히 말해 시민사회에서 공직, 연구기관 등을 거쳐 다시 시민사회로 돌아올 수 있는 순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 교수는 덧붙였다. “지금은 시민사회가 하나의 정거장, 보다 위로 올라갈 레버리지쯤으로 작용한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 시민사회는 황폐화될 수밖에 없다. 떠나는 사람만 있고, 돌아오는 사람은 없는.”

국회의원 경력을 마치고 환경단체 팀장이라는 직책을 택한 장하나 전 의원의 사례는 그러기 때문에 종전에 없는 주목을 받고 있다고 시민사회 내·외부 인사들은 입을 모은다(인터뷰 참조). 공 교수는 “장 전 의원이 하나의 전형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시민사회나 정부 관료 어느 쪽으로든 유익한 결과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7월 창립한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은 시민사회 내의 다양한 세대와 단체를 네트워킹해 소통하고 협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 바꿈 제공

지난해 7월 창립한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은 시민사회 내의 다양한 세대와 단체를 네트워킹해 소통하고 협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 바꿈 제공

‘시민사회-공직 순환모델’ 만들어질 수 있을까

시민사회에서 공직으로 ‘존재 이전’을 한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하승창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아이쿱협동조합지원센터 사외이사를 역임하다가 올해 1월 서울시로 들어갔다. 하 부시장은 공직에 들어가기 전에 더 체인지, 씽크카페 등 기존의 시민운동 방식을 탈피한 새로운 형태의 시민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창했다. ‘시민정치 이후의 시민사회’가 어떻게 될 것 같으냐는 물음에 대해 하 부시장은 “이전에 책 등을 통해 주장했던 것처럼 시민사회가 약해진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과 같은 형태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은 오히려 풍부해졌다”며 “다만 이들의 활동이 눈에 안 띄는 것은 참여연대나 경실련처럼 이들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조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남는 질문. 박원순 서울시장이나 염태영 시장 이후의 시민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예를 들어 박원순 시장은 장하나 전 의원처럼 임기를 마치면 시정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시민사회로 복귀할 수 있을까. 당장 박 시장을 따라 들어갔다가 서울시에서 나온 시민사회 인사들의 행보가 주목되고 있다. 하 부시장은 “변화된 상황에서 나 자신도 2011년 서울시 재·보궐선거, 2012년 대선, 그리고 다시 2014년 선거에 참여하고 다시 시민사회로 돌아갔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그는 “서울시에서 나온 분들의 경우 시민사회든 정치권이든 자기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그분들 스스로의 의사를 존중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환경운동연합 생활환경TF 팀장 맡은 장하나 전 의원 “애엄마가 되니 생활환경 문제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환경운동연합 팀장이 된 장하나 전 국회의원이 19일 서울 누하동 환경운동연합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 정지윤기자

환경운동연합 팀장이 된 장하나 전 국회의원이 19일 서울 누하동 환경운동연합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 정지윤기자

“오늘은 선글라스를 끼고 멋지게 나타나셨네요.” 그가 나타나자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들이 덕담을 건넨다. 19대 국회의원에서 환경운동연합 생활환경TF 팀장으로 최근 변신한 장하나 전 의원이다.

“저기 커피잔 하나 놓인 빈 자리, 제가 차지했습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비상근 활동가로 시작합니다. 첫 사업인 ‘생활화학제품 팩트체크’에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7월 9일 장 팀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환경운동연합에서 새로운 일을 맡게 됐다고 주변에 알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새출발’에 성원을 보냈다. 7월 19일, 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서 장 팀장을 만났다.

어쩌다 환경단체에 들어와 일할 생각을 하게 된 겁니까.

“사실 19대 국회 때 가습기살균제 사건에 깊게 관련이 되어 있었어요. 20대로 넘어왔지만 이 사건이 끝난 것은 아니잖아요. 생활환경의 연장선상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외에도 가습기살균제 참사 전국네트워크에서도 대외협력위원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어요. 시민사회와 국회가 긴밀히 소통하는 데도 제가 메신저 역할을 해야

겠죠.”

국회의원을 하다가 임기를 마치고 시민단체에, 그것도 현역 팀장으로 들어간 건 아마도 최초 사례인 듯 싶습니다.

“그런가요? 보통 국회의원을 하신 분이 계속 정치에 뜻을 두고 활동할 때는 관행적으로 사단법인 같은 것을 만들어 대표를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해보라는 이야기를 동료·선배 의원들에게 듣기는 했는데….”

주변 권유를 따르지 않은 이유는.

“다른 분들은 단체를 잘 꾸려 나갈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활동력이나 기대할 수 있는 성과라고 할까, 이런 면에서 제가 이렇게 기존에 활동하는 단체에 들어와서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생활환경TF를 맡으셨나요.

“처음부터 이 일(생활환경TF)을 하겠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환경연합을 통해 제 역량도 더 키우고 일도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논의드렸는데, 같이 의논하다가 나온 것이 생활환경TF예요. 생활화학 제품과 관련한 부서가 있기는 했는데, 활성화되지 않았으니 이번에 한 번 잘해 보자고 의기투합한 거죠.”

비상근 팀장인데, 월급은 나옵니까.

“비상근을 선택한 것은 육아 때문이에요. 사실 애 낳고 1년 이상 역할을 못했어요. 국회의원은 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출산휴가 두 달을 겨우 썼는데, 사실 지금은 엄마 역할에 저도 푹 빠져 있어요. 당분간은 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제가 비상근을 하겠다고 했고, 염형철 총장님이 보수 이야기는 안 하시네요.(웃음)”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활동가로서의 역할은 아무래도 조금 다를 텐데요.

“그렇죠. 국회가 못할, 시민사회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회가 아무래도 정부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국회에서 경력이 오래다 보면 공무원들과의 관계도 ‘좋은 게 좋은’, 그런 관계가 되고, 그게 유능함의 지표가 되곤 했어요. 의원을 할 때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처럼 타협을 안 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유지되려면 삼권분립 이외에도 시민사회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사회가 감시를 못하면 썩은 권력이 되는 것이에요. 시민사회단체 없이 스스로 자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거꾸로 정부나 국회도 파트너로 인정해야지요. 단체들도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단체들이 많은데, 어느 정도 독립성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요.”

생활환경TF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게 되는 겁니까.

“말 그대로 팩트체크를 하는 거예요. 가습기살균제 사건 이후에 다른 생활화학제품에 대한 우려도 많고, 국가나 관련 법에 대한 불신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국민들이 스스로 직접 화학물질이 안전한지 자료도 찾아보고, 국가의 스크린 시스템을 불신하는 상황이에요. 피해가 나타나면 그 피해는 그대로 국민의 몫이고요. 이것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활동도 환경단체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냉정하게 판단했고, 그래서 국민들께 이런 팩트체크 프로젝트가 있으니 같이 하자고 제안하는 겁니다. 곧 SNS페이지도 만들고, 활동이 시작될 겁니다.”

아이를 낳아 보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던가요.

“계획하지 않았던 임신과 출산을 하고 나니 ‘엄마가 돼 바라보는 세상’은 정말 다른 세상, 다른 세계였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 있잖아요? 그 영화 제목을 빌려 말하면 ‘엄마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정치’를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요. 진짜로. 20대 때 일을 못하는 것은 정말 아쉽기는 한데, 청년도 그렇고 엄마도 진짜로 그 처지가 되어보지 못하면 정책을 만들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씩 변하겠죠. 정치제도도 바뀌면 국민들을 만족시킬 의정활동을 하는 정치인들도 늘어날 것이고.”